소설리스트

146화 (146/186)


 

146

흐느적거리는 점성질의 몸으로 먹잇감을 질식부터 시키는 게 슬라임의 먹이 사냥법이다. 한번 달라붙은 먹잇감에 대한 애착도 강해 자발적으로 떨어지는 경우는 절대 없다. 

손으로는 떼어지지 않는 걸 클로드가 이즈의 얼굴에 검을 들이밀어서 갈라 냈다. 당연히 이즈는 너 미쳤냐고, 누구 죽일 일 있냐고 기겁을 했지만 마스터급의 검술은 슬라임만을 정확하게 베어 냈다.

자르면서 핵까지 동시에 파괴된 탓에 슬라임은 주르륵 힘을 잃고 발아래로 떨어졌다.

이미 죽은 슬라임의 시체를 이즈가 분풀이하며 퍽퍽 부츠로 찧었지만, 나머지 두 사람은 그런 그를 돌아볼 짬이 없다.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마치 부름에 응답하듯이 차례대로 하나둘씩 자동으로 빛이 들어오고 있는 벽등이었다.

태리가 던져둔 구체에 더해 그 벽등의 불빛들까지 합쳐지자 홀은 쨍할 만큼 밝지는 못해도 노을에 잠긴 오후의 햇살 밝기 정도로는 은은해졌다.

“어찌 된 일일까요.”

“촛불이 달린 건 불이 들어오지 않은 걸 보니, 마나석이 박혀 있는 램프만 반응한 것 같아요. 아마도 내가 방금 사용한 마나가 안으로 흘러 들어간 것 같고요.”

태리가 구체를 만들면서 그로부터 퍼져 나온 그녀의 마나가 마나석에 흡수되어 전류처럼 작용한 듯싶었다. 본의 아니게 에너지 공급원이 된 듯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태리는 더 많은 구체들을 만들어 내 연이어 공중으로 띄워 보냈다.

“이런 게 가능하다니.”

“마법사잖아요.”

점점 더 많은 마나를 빨아들이면서 벽등의 불빛은 처음보다 더욱 환해졌다.

기둥머리의 장식까지 세밀하게 확인이 될 때까지 세 사람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오랫동안 금단의 성으로 폐쇄되어 있던 마법 왕궁을 살펴보았다.

긴 시간 주인이 없는 빈집이었던 데다가 재앙이 휩쓸고 가기도 했기에 성은 곳곳에 쳐진 거미줄과 먼지에서 낡은 티가 여실하게 드러났다. 또한 이 중앙홀은 무슨 일로 인해 화마까지 입었는지 여기저기 불에 그을린 자국이 많았다.

그럼에도 약탈이나 침략 따위로 훼손을 당한 것은 아니었기에 옛 모습을 대부분 간직하고 있는 채였다.

‘묘하네.’

성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와도 절로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자연의 신비와 다른, 인간이 자아낸 상상의 신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으면 말소리가 섞인 오래된 바람이 앞머리를 매만지고, 웃음 섞인 휘파람 소리가 귀밑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길은 여러 갈래가 있었다. 기둥 사이사이에도 작은 문들이 있었고 이대로 정면으로 쭉 직진한다고 해도 어디론가 통할 것처럼 보인다.

좌측에 일직선으로 나 있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홀에서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상층부로 이동할 수도 있었다.

“으음.”

태리가 이 성안에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길은 오로지 탑의 대서고. 즉, 보스의 방뿐이었다.

다른 곳들은 되는 대로 돌아다니고 외우지를 못했는데, 성의 길 찾기에 마법이 개입되어 있어서 쉽게 외울 수가 없었던 탓이다.

‘보스 방은 네 번째 기둥 사이로 들어가서 좌우좌좌 순서대로 꺾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다음 직진 후 오른쪽 층계지.’

그곳만 꾸준히 드나들었기에 그곳만이 가장 확실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오늘은 그곳을 가기 위해 온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곳 어딘가에 있을 미리엘을 서둘러 찾아내야 했다. 물론 보스 방에는 빌이 있을 테니, 만약 정말로 빌이 미리엘을 데려갔다면 이대로 당장 그곳으로 가는 게 맞겠지만 미리엘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리고 온 김에 이것도 좀 처리했으면 하는데.’

태리는 코트 주머니 속에 있는 빳빳한 황금색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이자리스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던 예전에 돌팔이 점술사를 두들겨서 되찾아 온 이 성의 보물 창고 열쇠였다.

이걸 쓸 수 있는 날이 오길 두고두고 기다렸다. 창고에 있는 보물을 왕창 가져가려고 부피와 무게를 줄여 주는 마법 배낭도 메고 왔고.

고민하던 손가락이 좌측의 계단을 다음 코스로 지목했다.

“우선 위로 올라가요. 어디를 가든 그곳에서 목적지를 고를 수 있을 테니까.”

목적지를 고른다는 표현이 어딘지 아리송하게 느껴졌지만 다 같이 위로 통하는 계단으로 향한다. 한 층을 전부 올라오고 나니,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벽을 따라 쭉 나열되듯 걸려 있는 수십 개의 액자 그림이었다.

“이건 뭐냐. 다른 길이 없는데.”

붓으로 그렸다고 하기엔 사진보다도 더 정교한 그림 속에는 각각 성안의 어딘가를 표현한듯한 장소가 그려져 있었다. 신기해서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이즈는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표면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떨어졌다.

“저 안에서 뭔가가 움직였어!”

“조용히 좀 해.”

“아, 진짜 움직였다니까!”

“당연히 움직였겠지. 여긴 마법사의 성이야. 모든 것이 마법사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침착해.”

그러고 보니 테두리를 치듯이 벽을 따라 붙어 있는 계단들의 옆에는 모두 공통적으로 액자 그림과 걸개그림이 도배가 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구조는 이곳뿐만이 아니었다.

“사람을 현혹시키는 효과라도 있는 겁니까? 꼭 미궁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액자 밑의 글씨를 봐요.”

그녀가 직접 보라고 한 것은 그것이 마법사의 언어로 쓰인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누구라도 와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대륙 공통어다.

그렇다는 것은 이것이 방문객을 곤란하게 만드려는 함정이나 현혹술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길이란 정해진 게 아닌 때마다 변해 가는 것. 누구든 자유롭게 입장해 주십시오? 뭔 개소리야?”

남자들이 얼빠진 사이에도 태리는 혼자 열심히 액자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변해 가는 그림 속에서 일행이 가야 할 길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대충 감을 잡았겠지만 이건 그림을 통해서 해당 장소로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간 마법이다.

그들이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이중에 갈 곳이 없다면 다른 곳을 보여 주겠다는 것처럼 액자 속의 그림들이 흐릿해지면서 곧 다른 그림들이 나타났다.

이쪽 벽이 달라지자 다른 쪽 벽에 걸려 있던 액자의 그림들도 같이 덩달아서 변해 버렸고, 그에 맞춰 창문이나 전등의 위치도 변경된다. 수십 개의 벽들이 서로 자리를 바꿔 앉듯 일정한 간격마다 변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저 그림 속으로 들어가야 된다 이겁니까?”

“그래요.”

“너무 위험한데요.”

“위험하지 않아요. 마법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겐 괴이한 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이건 그냥 마법사들이 필요해서 만들어 둔 이동 수단일 뿐이에요.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어떻게든 몸은 최소한으로만 움직이면서, 머리만 쓰고 살고 싶었던 사람들의 꼼수일 뿐이고요. 큰 뜻은 없어요.”

“무슨…… 그 정도로 걷기 싫었던 겁니까?”

“호텔 사람들 보고 못 느꼈어요? 어떻게든 육체노동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 거. 다들 몸 쓰는 거 무척 싫어해요.”

“대체 마법사란 놈들은 도저히 그 사고를 이해할 수가 없구만.”

기가 막혀서. 이런 걸 머리 싸매고 연구해서 만들어 낼 시간에 그냥 통통 뛰어서 가면 금방이겠구만.

아무래도 기사와 궁수에게는 영 공감할 수 없는 세계인 모양이었다.

하긴. 뭐, 그럴 수도 있긴 하지.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던 태리는 챙겨 온 배낭 속에서 각기 다른 세 개의 물약이 담긴 병들을 꺼냈다.

전부 귀하고 유용한 아이템으로, 본래 게임 속에서는 ‘역병의사 브리지테’와의 친밀감을 최대치로 달성했을 시에 해금이 되어 구매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그녀는 여기 오기 전에 그냥 급하게 브리짓을 찾아가서 ‘좀 줘.’라는 말 한마디로 쉽게 얻어 냈다.

“어디로 가는 게 좋을지 모르니까 이건 아무래도 당신이 먹는 게 낫겠어요.”

브리짓이 가르쳐 준 대로 그녀가 세 가지의 물약을 하나의 병 안에 합치면서 설명했다.

“이 노란색 물약은 찾고자 하는 대상을 뚜렷하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추적 물약, 이 빨간색은 무언가를 발견할 확률을 증가시켜 주는 행운 물약,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푸른색 물약은 오감을 일시적으로 증폭시키는 기민함의 물약이에요.”

분명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었을 때는 색이 영롱하고 예뻤는데, 어째서인지 한데에 넣고 섞어 버리니 상한 가지처럼 꺼멓고 퍼런 액체가 되어 버렸다.

누가 봐도 찝찝한 색깔. 그래도 효과 하나는 확실하다는 것을 알기에 태리는 그 탁한 색의 물약을 클로드에게 선뜻 내밀었다.

“마시기 전에 찾고 싶은 사람을 강하게 떠올리고 마셔요. 형이니까 나보단 당신이 훨씬 더 가깝잖아요. 효율이 더 좋을 것 같아요.”

“아니, 근데 이 녀석은 성기사잖아. 자꾸 이렇게 마법사의 물건을 사용해도 되겠어? 이러다가 이 녀석 영영 성기사로 못 돌아가는 거 아니냐고.”

“상관없다.”

남 걱정 안 하기로 유명한 이즈가 한 번쯤 말려 봐야 할 만큼 실제로 근래의 클로드의 삶은 온통 마법에 노출되어 있었다. 마도구니, 마법 물약이니, 마법사니. 정작 당사자는 전혀 거리낌이 없어 보였지만 이즈와 같은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최근 그의 주변으로 많이 늘었다.

찰랑거리는 액체를 힐끗 내려 본 클로드는 병을 입가에 대고 한 번에 깔끔하게 마셔 버렸다. 다들 눈을 빛내며 ‘좀 어때?’라고 묻자, 그가 빈 병을 들어 보이며 ‘맛있는데?’라고 답했다.

“그런 거 말고. 무슨 특별한 느낌 같은 거 없어요?”

“그래, 아무거나라도 말해 봐.”

“음…….”

약효가 듣질 않는 건가. 그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벽에 다닥다닥 붙은 그림들을 훑어보았다. 전혀 아무런 감각도, 느낌도 없는데 무슨 효과가 있다는 건지. 그런데 그 순간 어렴풋한 빛이 한 그림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일직선의 통로였다. 바닥에는 푹신한 융단이 깔려 있고 닫혀 있는 문들이 오른편에 띄엄띄엄 붙어 있었다.

다소 어두운 그림이었는데도 그림 속의 모든 윤곽들이 또렷하게 인식된다. 더불어서 반드시 저기로 가야만 한다는, 가고 싶다는 열망이 솟구쳤다. 누군가가 조종하는 것처럼 몸이 스르륵 그 앞으로 움직이자 두 사람이 얼른 따라붙었다.

“골랐어요?”

“저기냐?”

클로드는 머뭇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느낌은 그러한데 가도 될는지 모르겠으니. 그렇다고 그림 속의 장소가 썩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고.

세 사람이 그림 앞에서 고민하는 사이, 액자가 또 한 번 변하려고 하는 것처럼 출렁거렸다.

“늑장 부릴 여유도 주지 않는구나.”

“일단 가 보죠.”

“그럼 서둘러요!”

그들은 재빨리 흔들리는 표면으로 팔을 뻗었다.

이게 말이 되나? 가능한가? 뻗는 그 순간에도 그런 의심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손끝이 그림에 닿는 순간 뭔가가 안에서 잡고 쑥 잡아당기듯이 단숨에 몸이 빨려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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