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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부스러기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사방이 정신없는 와중에도 클로드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검을 뽑아 들어 넘어진 트롤을 향해 뛰었다.
그는 이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앞으로 엎어지면서 이마를 제대로 박은 트롤은 어지러운 골을 붙잡은 채로 등을 훤히 내보이고 있는 채였다.
녀석이 꿈틀거리며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등허리 위로 클로드가 훌쩍 올라탄다. 척추를 따라 늘어진 기다란 등줄기를 밟고 달린 그가 심장이 있을 자리에 빛나는 한 줄기의 검광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박은 다음에는 아예 심장을 반으로 갈라 버릴 심산으로 깊이 박혀 있는 손잡이를 잡고 쭈욱 아래로 당겨 가며 살을 찢었다.
북, 부욱!
겉만 살짝 긁어 놓은 것도 아니고 내장에 직접적으로 칼을 꽂아 파괴한다.
필살에 가까운 일격이었고, 복구 불가한 치명상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는 증거로 이번 공격은 무용지물로 돌아가지 않았다.
깊이 박혀 있던 칼을 그가 발로 힘껏 눌러서 빼낸 순간, 심장에서부터 솟구친 피가 등 뒤로 폭포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전과는 다른 생명이 빠져나가는 느낌에 트롤이 발작을 하며 몸부림친다. 핏발 선 눈동자에 절망과 분노가 깃들었다.
제 상태를 믿을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그것이 폭주의 기폭제라도 되었던 것일까. 살기를 내뿜으며 온몸을 들썩이던 녀석이 엎어진 채 대지를 주먹으로 콰쾅 내리쳤다.
“뭐…… 무적이냐, 저거?”
트롤의 까다로움은 재생력. 그다음은 큰 몸과 거센 힘.
1번은 방금 막 제거되었다. 그러나 아직 2번은 남아 있었다. 잃어 가고 있긴 하지만 마지막 저항을 할 수 있을 만큼은 어느 정도 남아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위험에 빠진 사람은…….
“피해야 돼요!”
태리가 외치는 것보다 더 먼저 클로드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집채만 한 손바닥의 존재를 인식했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빠져나갈 구멍을 가로막으며 트롤이 울부짖는다. 먹잇감을 향한 분노이자, 그를 함께 죽음의 길로 데려가겠다는 최후의 발악이었다.
“타르타르! 벌레! 잡는다!”
다른 방향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그는 황급히 부서진 다리 조각을 밟고 높이 뛰었다. 그러나 직전의 충돌로 인하여 손상된 바위가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지면서 원하던 만큼의 도약력을 내지 못한다.
부족한 높이만큼 거대한 손가락이 그를 향해 뻗어 왔다. 그것이 하나에서 두 개로, 또 서너 개로 불어나더니, 폐를 쥐어짜는 듯한 고통과 함께 순식간에 열 개의 손가락이 그의 몸을 칭칭 휘감았다.
“……!”
사로잡히고, 조여들고, 숨이 막힌다. 내장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귓속으로 절규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클로드, 클로드. 안 돼, 안 돼.
몸을 터트릴 것처럼 조여드는 손가락의 완력에 클로드는 어깨와 팔을 바깥 방향으로 밀어 내며 저항했다. 그가 혼미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정면으로 고개를 치켜들자 핏줄 터진 눈동자가 그를 증오한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곧 쓰러질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놈에게서 힘이 빠질 때까지 자신이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정신 잃지 마!”
가장 날래게 달려온 이즈가 물결치는 단검을 꺼내서 트롤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집어넣었다. 조금이나마 벌어진 간격 덕분에 클로드는 부족했던 산소를 급하게 들이켰다.
이어서 달려온 태리는 곧바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트롤의 손목을 도끼로 찍었다. 전투에 눈이 먼 광전사처럼 강화된 도끼날로 살점을 찍는다.
“끄어어어!”
놈이 목구멍 너머로 포효를 내지르며 뿌리쳐 내려 했지만, 태리는 더 과감하게 입을 벌리고 위협하는 놈의 턱주가리를 그대로 쓸어 버렸다.
그러나 손에 넣은 먹잇감을 조여 쥔 채 이대로 죽을 각오를 했는지 트롤은 불화살이 마디마디에 박혀도, 손등이 몇 번이고 도끼날에 찍혀도 결사코 손가락을 풀지 않았다. 피가 통하지 않아서 점점 하얗게 질려 가는 클로드의 얼굴이 보였다.
위험하지만 이보다 더 강한 일격이 필요하다. 태리가 막강한 원소 마법의 주문을 외려 할 때였다.
금속이 바람을 뚫고 날아들 때와 같은 쐐액 소리가 울리더니, 다리의 초입에서부터 수십 개의 굵직한 창들이 일제히 날아들어 트롤의 팔뚝에 박혔다.
놈이 고통스러워하며 힘이 빠진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태리가 다시 한번 손등을 내리찍었고, 헐렁해진 틈으로 이즈가 재빨리 클로드의 어깨를 잡아 밖으로 빼냈다.
“정신 차려 봐! 괜찮냐?!”
“괜찮……아.”
“근데 저것들은 또 뭐야. 왜 우릴 도와줬지?”
창이 날아온 방향에는 갑옷과 투구를 걸치고 인간 병사처럼 창을 앞으로 치켜든 존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두 발로 직립 보행한다. 하지만 사람은 아니다. 굳이 표현하면 도마뱀. 악어처럼 울퉁불퉁한 가죽에 뱀처럼 긴 꼬리가 달렸다.
그러나 지능도 있고 지성도 있어 보였다. 여타의 소환수들과는 달랐다. 척척 발을 맞추는 걸음이 제식 훈련이 된 인간 군대를 연상시켰다.
의식에 끼어든 방해자를 보듯이 트롤은 분개한 야수처럼 그들을 향해 포효를 내질렀다. 그러나 대치하는 병사들의 기색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다.
“저건…….”
용이 만든 가디언, 용아병들이었다.
‘결국 빌이 우리가 온 걸 알게 됐구나.’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당장은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일단 우린 가야 돼. 저들이 시간을 끌어 줄 동안 뛰자. 어떻게든 성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돼.”
다행히 클로드는 큰 부상 없이 빠르게 몸을 추슬렀고 용아병들이 트롤의 시선을 붙잡아 준 동안 세 사람은 성 입구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어차피 길은 하나뿐이었다.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밀어!”
세 사람은 자기 몸을 거의 문짝에 갖다 던지다시피 하며 육중한 문에 어깨를 대고 온 힘을 다해서 밀었다. 엄청난 무게여서 쉽게 열리지 않았지만 체중을 가해서 밀어붙이자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더 빨리! 더 세게 밀어! 쫓아온다고!”
그들의 부재를 알아차린 트롤이 용아병을 무시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뻑뻑한 이음새가 서서히 돌아가면서 사람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틈새가 생기자 클로드는 태리부터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어서 이즈가 머리 위쪽으로 훌쩍 뛰어넘어 들어가며 반대쪽에서 문을 잡고 있어 주고, 마지막으로 클로드의 차례가 되었다.
광분해서 달려든 트롤이 다시금 흉측한 손을 그의 목뒤로 뻗는다.
촤악!
하지만 클로드는 검집에서 검을 빼는 동시에 녀석의 손목을 한 번에 베어 버렸다. 썰려 나간 손 하나가 그대로 날아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얼마나 빠른 속도였으면 공중에 검기가 지나간 궤적이 그대로 잔상으로 남았을 정도였다.
괴성과 함께 나머지 손아귀가 또 한 번 달려들어 보지만 이번에는 잡히는 일 없이 간발의 차로 들어가 사라져 버린다. 동시에 그가 들어올 수 있도록 잡고 있었던 문을 이즈가 놓아 버리면서 문틈은 빠른 속도로 좁아져 갔다.
마지막까지 그들을 쫓아 들어오려는 트롤의 모습이 어깨, 가슴, 얼굴 순으로 훅훅 줄어들다가 최종적으로 눈알 하나만이 남았을 때 태리는 허리춤에서 총을 뽑았다.
장전하는 철커덕 소리. 이어서 탄약이 터지는 격발음.
클로드를 죽이려 했던 것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던 탓인지 방아쇠를 당기는 힘이 유독 거칠었다.
동공 한가운데에 정확하게 탄환이 박히고 빨간 꽃이 선명하게 피어나는 것과 동시에 성문이 쿵 울리며 닫혔다.
한동안은 헉헉거리는 숨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가까스로 본성 안에 들어오는 데 성공한 세 사람은 문에 주르륵 기대고 주저앉아서 세찬 숨을 몰아쉬었다.
창백해진 이마 위로 이즈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은발을 넘기며 중얼거렸다.
“저거…… 저거……. 내 눈이 틀리지 않으면 저건 용아병인데?”
숨이 차서 소리로는 못 내고 태리는 맞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믿고 싶지 않았던 꿈을 꼼짝없이 현실로 선고받은 사람처럼 그가 으악! 하고 소리쳤다.
“그러면 진짜 여기가 드레곤 레어라는 거잖아!”
“그렇다고 말했잖아.”
“안 믿었지! 설마 했지! 장난이라고 믿고 싶었다고!”
마찬가지로 사실을 확정받은 클로드조차 심각한 얼굴로 다시 검을 움켜쥐었다.
언젠가 드래곤을 잡아야 한다고 했을 때, 그 말을 믿으면서도 사실은 믿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이 명백한 사실이며 언젠가 반드시 맞닥뜨리게 될 필연적인 일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다만 그게 부디 오늘은 아니길 바랐다.
지친 숨소리 뒤로 착잡한 한숨이 이어지다가 세 사람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드래곤의 둥지에 침범했고 내부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도 알 수 없으니 호흡을 정돈하는 것도 사치라는 생각에서였다.
어둡긴 했지만 현재 그들이 들어선 입구가 거대한 중앙홀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천장이 높고 광활한지 작은 속삭임조차도 두세 번씩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옹기종기 붙어서 띄엄띄엄 몇 발자국을 걷는 도중에 찍 하는 생쥐 소리가 들렸다.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칼같이 제자리에서 멈춰 섰다.
“……저것도 소환수입니까.”
“설마 그런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함정 같은 거라면 어떡해?”
“함정이라면 자기가 여기에 있다고 저렇게 먼저 알려 주진 않을 걸. 숨어 있겠지. 일단 불부터 밝히고 싶은데…….”
달리는 동안 어디에다가 던져두고 잃어버린 건지 모를 등불을 대신해서 그녀가 두 손으로 빛나는 구체를 만든 뒤, 열기구처럼 머리 위로 띄워 올렸다.
구체는 두둥실 올라가면서 어두웠던 실내의 채도를 전체적으로 올려 밝혔다. 그러곤 더 올라갈 곳이 없어서 천장의 꼭대기에 살짝 부딪힌 다음 그 자리에서 부유했다.
“으악!”
“읍!”
“……!”
주변이 환해지면서 어두운 천장에 달라붙어 있던 물컹한 슬라임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일행을 일부러 노린 것은 아니었지만 개중에 하나가 이즈의 얼굴 위로 떨어져서 질펀하게 이목구비에 달라붙었다.
“숨! 숨…… 막혀……! 떼! 떼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