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186)


 

144

“벌레! 먹이!” 

너무 작아서 사람이 벌레로 보이는 건지 트롤은 뭔가 움직이는 듯한 낌새만 보여도 바로 그곳으로 뛰어가서 양 주먹을 땅에 쾅 내리찍었다.

파괴력도 파괴력이지만 움직임을 포착하는 능력이 대단해서 뒤뚱거리는 덩치에도 불구하고 내리찍는 동작만은 날쌨다.

요리조리 뛰어다니며 가슴팍으로 총알을 쏘아 대는 태리를 발견한 트롤이 또다시 크게 점프해서 주먹을 휘두른다. 맞기 전에 앞으로 굴러 무사히 피해 나갔지만 그녀가 있던 자리는 트롤의 주먹만큼 파여서 파편이 위로 솟구쳤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계속해서 달리면서 거리를 벌려야 한다. 내리치는 범위가 광범위해서 후퇴하면 최대한 빨리 달아나 관심에서 벗어나야 했다.

역시나 놈은 먹잇감이 반경에 걸리지 않고 빠져나가자, 다른 인간이 보이는 쪽으로 뛰어가서 또 연거푸 쉬지 않고 땅을 내리쳤다.

황당하지만 트롤이 하는 일은 그게 다였다. 그런데 그 하나가 너무 막강하다. 이동하면서 따라오는 지진과 맞서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싸움에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트롤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는 클로드와 이즈의 전투력을 보며 태리는 문득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이게 다 동료를 잘 둬서야. 왠지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네.’

이날을 위해 이제껏 열심히 클로드를 키우지 않았던가. 이미 보았듯 그의 검은 높은 수준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스토리에 맞춰 이쯤일 것이라고 예측했었던 것보다 훨씬 웃돈다.

현재 이야기의 흐름이 이토록 빠르게 흘러가게 된 것도 어쩌면 그의 성장 속도가 게임의 진행 속도를 너무 우월하게 앞질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최종 장에나 가서야 기웃거릴 수 있었던 폐성을 벌써부터 들어왔으면 말 다 했다.

실제로 클로드의 검은 눈앞에서 트롤의 강한 근섬유조차 문제없이 끊어 내고 있었다.

무질서한 돌격에도 걸려들지 않고 무릎 위의 관절을 노린다.

따끔한 통증에 트롤이 아프다고 야단법석을 피우면 미리 활을 조준하고 있던 이즈가 심장, 명치, 사타구니 같은 급소를 겨냥해 기세를 몰아갔다.

흉포해진 녀석은 여지없이 화살이 날아오거나 검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그들을 잡으려 쿵쾅쿵쾅 뛰었고, 행여나 그 손아귀에 걸리지 않도록 태리가 계속해서 반대 방향에서 주의를 끌어 주었다.

방금도 클로드를 잡겠다고 갈퀴처럼 휘적거리는 팔에 로프를 감고 올라타서 제 허리 굵기 만한 새끼손가락을 도끼로 찍어서 찌부러뜨렸다.

꾸워어억!

차근차근 호흡을 맞추며 협공이 숙달되어 가자 어느 순간부터는 달려드는 트롤을 피하지 않고 거꾸로 몰아붙이는 방식에도 성공해 냈다.

“제기랄, 죽을 고생도 자주 하니 보니까 적응이 됐네. 저 녀석의 원피스 차림을 봐도 더 이상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아. 무감각해져 버렸다고!”

점차 익숙해져 가는 상황에 이즈는 미적 감각을 외치며 절규했지만 클로드는 그저 묵묵하게 트롤을 찌르고 베며 결정적인 순간이 오길 기다렸다.

몇 번이고 검기와 화살, 마법이 독두꺼비 같은 피부 위로 퍼부어졌다.

그러나 세 사람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트롤은 아직까지 조금도 상처 입지 않았다.

한 번은 클로드가 녀석의 허벅지를 밟고 가슴을 발로 차 도약해서, 목젖이 꿀렁거리는 턱 밑을 단숨에 그어 버리는 데 성공한 적이 있었다.

몇 겹이나 되는 검기를 중첩시켜 한 번에 머리통과 몸통을 2등분으로 절단 낸 칼질이었다. 목이 잘렸기에 트롤은 고통스러워도 울부짖지 못했고, 찢어질 것처럼 확장된 눈구멍으로 치명적인 공격이 들어갔다는 것을 모두가 확신했었다.

거대한 머리통이 두꺼운 목에서부터 천천히 미끄러지려 할 때였다.

경악스러운 일은 바로 그다음에 일어났다.

목이 떨어지기 직전 절단면의 피부가 서로 끈끈하게 붙기 시작하더니,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세포처럼 잘린 목이 도로 몸통에 붙어 버린 것이었다.

다만 재생의 타이밍에 영향을 줄 정도의 치명적인 공격이었던 탓에 조금 늦게 살이 붙어서 머리가 몸의 정중앙이 아닌, 한쪽 어깨로 치우친 상태로 붙었을 뿐이었다.

트롤 같은 끔찍한 회복력이라는 말뜻이 무슨 의미인지를 제대로 실감하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진짜 저래도 안 죽는다고? 방금 모가지를 잘라 냈는데?!

물론 체력은 회복력과는 상관없이 소모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전보다 트롤의 움직임이 지쳐서 둔화되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지만, 애써서 상처를 입혀도 쉽게 아물어 버리니 싸움이 지속될수록 전투 의지가 깎이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내내 말 한 마디 없이 찌르고 베어 내던 클로드가 트롤 앞에서 성검을 쿵 하고 바닥으로 찍었다.

괴수를 코앞에 둔 상황이었지만 무섭다기보단 지긋지긋한 감정이 더 앞섰다. 너무 오래 싸웠다.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머리칼을 그가 짜증스럽게 쓸어 올렸다.

“후…… 타르타르. 장난하나.”

“우우?”

“그딴 능력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타르타르!”

“정말 미치겠군.”

웬만큼 피해 입히는 걸로는 턱도 없다는 걸 실감했는지 그가 피곤한 손바닥으로 목덜미의 땀을 쓸어서 닦아 냈다.

‘지금보다 더 여러 번, 더 많이 때려서 차근차근 심장까지 도달해야 하는데…….’

태리는 차마 아직 한참은 더 남았어요, 라고는 말할 수가 없어서 두 남자를 제 주위로 불러들였다.

“우리 차라리 새로운 시도를 한번 해 볼래요? 혼자일 때는 꿈도 못 꿨지만 셋이니까 가능할 것도 같거든요.”

“어떻게?”

“한꺼번에 타격을 몰아서 큰 피해를 주면 아주 잠깐이라도 트롤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때 단숨에 심장을 터트려 보죠.”

10초, 아니 5초 정도만 되어도 좋다. 트롤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도록 한순간만이라도 제어할 수 있다면 방금 목을 도려낸 클로드의 실력으로 보건대 그 안에 두꺼운 근육과 지방을 뚫고 들어가서 심장을 부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이 방법이 성공하면 여기서 소비하는 시간도 단축시킬 수 있었다.

솔직히 이곳에서 이렇게 시간을 끌어도 되는지 아닌지 모르겠으니까. 여기서 시간을 쓰고 소란을 키울수록 자신들이 성에 왔다는 걸 빌이 더욱 잘 알게 될 것이다.

“몇 초 정도라면 내가 눈을 맞혀서 실명 상태로 만들 수 있지. 금방 회복이야 되겠지만 잠깐이면 붙잡아 둘 수 있지 않겠어?”

“아니, 눈이 안 보이면 아마 안 보이는 채로 그냥 뛰어다닐 거야. 그건 통제했다고 할 수 없어. 눈이 아니라 몸을 속박해야 돼. 너는 차라리 유인을 맡아 줘.”

태리가 처음 바닥에 깔린 돌을 들썩거렸을 때, 트롤은 중심을 잘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모습을 보였었다.

넘어질 정도의 흔들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발밑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견고하게 버틸 수 있을 만큼 중심 잡기를 잘하는 편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면 발밑을 흔들면서 동시에 다른 자극을 조금만 더 보탤 수 있다면…… 그 거구의 몸을 넘어뜨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 방법은 어때요?”

“시도해 볼 만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녀석은 계속해서 뛰어다니고 있으니 그 점을 이용하면 됩니다.”

“그렇지. 저렇게 커다란 몸뚱이로 우당탕탕 뛰다가 넘어지면 엎어질 때도 크게 엎어지게 되어 있지. 좋아, 그럼 저 녀석한테 싫은 상황을 한번 만들어 볼까.”

셋 중 가장 민첩한 이즈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기꺼이 몰이꾼 역할을 도맡기로 했다.

“어이, 원피스! 타르타르! 여기 좀 봐 봐!”

겁 없이 트롤의 주의를 끈 그가 한 손 안에 다섯 개의 화살을 한꺼번에 잡아 활시위를 탱탱하게 잡아당겼다.

“우오!”

“너 악어한테 제일 성가신 게 뭔지 아냐? 그건 바로 자기 이빨 사이에 낀 콩알만 한 생선 가시다.”

먹잇감을 발견한 타르타르가 전과 똑같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드는 순간 손안에 있던 화살이 몽땅 쏘아 올라가 놈의 앞니 사이사이에 끼어 들어간다.

클로드가 해 댄 공격과는 결이 다른 도발성 공격이었다. 크게 아프지는 않지만 그냥 놔둘 수는 없고, 무시해도 되지만 살살 열을 긁는 부분이 있어서 결국 추격하게 만드는.

이 사이에 낀 화살을 부러뜨리며 날뛰는 트롤을 이즈는 계속해서 약 올렸다.

그가 다리의 비좁은 난간 위로 올라가서 아슬아슬하게 달리기를 시작하자 모기처럼 날아다니는 엘프를 잡기 위해 거대한 몸집이 맹렬하게 뒤쫓아 왔다.

트롤이 뛰는 박자에 맞춰 태리는 정확한 순간에 다시 한번 다리 바닥에 깔린 포석들을 출렁거리게 만들었다.

갑작스럽게 발밑이 파도치기 시작하면서 이즈를 쫓아가던 트롤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제자리에서 발이 묶였다. 녀석은 전과 똑같이 넘어질락 말락 기우뚱거리면서 양팔을 좌우로 뻗어 어떻게든 중심을 잡기 위해 애썼다.

그것을 보고 눈빛을 빠르게 교환한 태리와 클로드는 그 즉시 트롤을 향해 있는 힘껏 내달렸다.

너울 치듯 꿀렁거리는 지면을 달리는 건 그들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인간의 몸으로 저만한 크기의 거구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처럼 달리면서 얻게 되는 추진력이 필요했다.

발바닥으로 돌을 꽉꽉 밀듯이 밟고 질주하며 단숨에 등 뒤로 접근한다.

녀석은 아직도 제대로 서지 못하고 팔을 허우적대고 있었다. 둘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흔들리고 있는 팔 밑으로 질주하면서 동시에 몸을 날려 통나무처럼 두툼한 트롤의 오른쪽 팔뚝에 매달렸다.

커다란 덩치에서 한쪽 팔만이 갑자기 무거워지면서 쑥 아래로 꺼진다. 동시에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던 무게 중심이 깨졌다.

“우어어― 우어어!”

마침내 거대한 트롤이 바닥으로 쓰러진다. 그 무게에 깔리기 직전 두 사람은 잡고 있던 팔을 한 번에 확 놓아 버리고 공중으로 뛰어내렸다.

거구의 몸이 엎어지면서 다리 일부가 붕괴될 정도의 엄청난 충격과 진동이 있었다.

“……저 미친 녀석들. 진짜로 트롤을 던졌어.”

자그마한 인간 둘이서 트롤을 던졌다.

작은 지렛대로 무거운 쇳덩이를 퍼 올리듯이 정말로 팔을 잡아서 넘어뜨렸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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