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3화 (143/186)


 

143

그래, 이렇게 뭉뚱그리는 게 최선의 설명이었다. 게다가 콧김을 내며 잔뜩 흥분하고 있는 듯한 꼴들이니 저들은 머지않아 각각 따로 무리 지어서가 아닌 다 같이 통째로 합쳐서 돌진해 올 게 분명했다. 

살아날 구멍이 있다면 그 혼란을 이용해 어부지리를 노리는 방법뿐이었다.

“잘 들어요. 우린 꼭 살아야 돼요. 그러니까 내가 신호를 주면 동시에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거예요.”

“흩어져서 그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알아서 살아서 다시 봅시다.”

“그게 죽으란 소리지, 인마!”

천만에. 죽으란 소리는 아니었다. 단지 죽은 척할 수 있으면 매우 좋다는 뜻인 거다. 미치광이 소환수들의 먹잇감은 자신들 말고도 이 다리 위에 천지로 널려 있으니까.

당장은 운도 실력이라고 믿어야 했다.

“지금!”

잠시 후 예측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한 무더기의 적들이 그들을 향해 진격해 왔다.

뒤돌아서 일직선으로 도망치면 발각되기 쉽다는 걸 다들 알았기에, 세 사람은 일단 적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옆으로 찢어져서 회피했다가 단숨에 뒤로 빠져나갔다.

일렬에서 무질서하게 뛰어오던 하마와 염소들은 세 사람이 증발하듯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참을성 없는 어린아이처럼 바로 다른 화풀이 대상을 찾아 자기들끼리 맹렬하게 싸워 댔다.

서로가 서로를 짓밟으며 끊임없이 밀쳤고, 얼마 안 가 두 집단 모두 흉포한 곰의 앞발에 찢어 발겨져 떼죽음을 당했고, 뒤에서 꽝 머리로 박아 버리는 코뿔소의 무지막지함에 그 곰도 몇 분 못 버티고 공중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의기양양했던 코뿔소는 그보다 더 늦게 달려온 외눈박이 거인 사이클롭스가 던진 염소의 시체에 부딪혀 꽥 소리를 내고 쓰러졌다.

“이 외눈박이 자식아, 그만 던져!”

혼잡했던 다리 위가 사이클롭스의 세상이었던 한동안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신이 난 놈은 세레모니를 하듯이 손에 잡히는 것들이라면 무엇이든 던져 댔다. 다리 위의 철제장식을 뽑아 허공으로 던질 때는 가슴이 철렁했다.

다리의 바깥 측면으로 붙어서 난리 통으로부터 피신해 있던 세 사람은 날아오는 걸 피하랴, 몸을 숨기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필사의 사투를 벌였다.

몇 분마다 승자가 바뀌는 혼잡한 난투 속에서 그렇게 세 사람은 30분가량을 숨죽여서 납작 엎드려 있었다.

도축장이 따로 없었던 다리 위가 서서히 한산해져 갔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흘린 피와 살점으로 흥건한 가운데에 고요해진 바닥에는 정신 사나울 정도로 빠르게 지면을 기어 다니는 거대거미의 발소리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저쪽도 마찬가지로 어부지리인데 본인이 최후의 승자인 줄 알고 기뻐서 저러는 것이다.

상황이 일단락되었음을 알아차린 세 사람이 슬그머니 다리 위로 돌아왔다. 되돌아온 그들을 알아차린 거미가 괴상한 울음을 내며 자신감을 내보였다.

하지만 저 정도는 해 볼 만하다고 느끼는 건 서로가 마찬가지다. 별별 것들을 다 봤는데 거미 따위야. 만만하게 생각하고 움직이려는 남자들을 태리가 저지시켰다.

“한 번만 더 기다리죠.”

실제로 그들은 성난 거미가 코앞까지 올 때까지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것이 거미줄을 뱉으려 입 같은 꽁무니를 크게 넓혔을 때조차도 가만히 제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자신만만해 보이던 거미가 갑자기 멈칫거리면서 더듬이 다리를 마구 비비기 시작한다.

당장에라도 고치로 만들 것처럼 위협하더니, 셋에게 쏘려고 했었던 거미줄은 공격은커녕 도주에 사용되었다. 거미줄을 타고 황급히 내빼는 다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도망쳐? 왜 싸우지 않고?”

가고일에게 했듯 태리가 공포 마법을 부린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거미는 그들에게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게 아니었다.

“자기보다 더 강한 것이 온다는 걸 아니까.”

“더 강한 것? 그게 뭔데…… 으어!”

거대한 망치로 연달아 바닥을 내리치는 것처럼 발밑이 쿵쿵쿵 진동하기 시작했다. 한 번 울릴 때마다 땅이 쪼개지는 것처럼 진동했고, 그 흔들림에 다리 가장자리에 있던 시체들이 쓸려서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진다. 태리도 휘청거리다가 넘어질 뻔했다.

이윽고 거미가 달아나고 난 빈 무대로 진동의 근원이 나타났다. 거침없이 다리 중앙으로 쿵쾅쿵쾅 걸어 들어오는 커다란 덩치를 따라 클로드의 눈이 위로 올라갔다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이것만큼은 그도 아는 생물이었다. 아, 물론 안다고 해서 만나 봤다거나 상대해 봤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이것을 목격할 수 있었던 곳은 오로지 책 속. 그것도 무서운 그림책 같은 곳에서만 자주 보았으니.

“……트롤이군.”

마지막 주자는 트롤이었다. 신이 내다 버린 외모라는 별명을 지닌 자연계의 포식자.

신이 한낱 생명체의 외모를 버리고 말고 할 게 어디 있겠느냐고 코웃음 쳤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었다. 클로드는 확신했다. 신께선 확실히 트롤을 버렸다.

독이 오른 듯한 녹색 피부와 노인의 얼굴에서 떼어온 듯한 쭈글쭈글한 코, 악취를 풍기는 주둥이, 조화와 비율이라곤 조금도 없는 덩치만 큰 몸뚱이였다.

“뭐, 뭐, 트롤……?! 야, 장난하냐! 아니, 트롤까지 하수인으로 삼았던 능력 있는 놈들이 대체 어떻게 하면 나라를 이 모양 이 꼴로 말아먹을 수 있는 건데! 이봐, 공주 대답해!”

으악, 진짜 싫다면서 이즈가 고래고래 고함을 쳐 대지만 태리도 답할 수 있는 정신머리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정말 좋지 않았던 기억이 되살아나려 하고 있었다.

‘내가 이 트롤을 사냥하다가 몇 번이나 YOU DIED 화면을 봤었지?’

그야말로 질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때려도 때려도 도저히 바닥이 보이지 않는 트롤의 HP통에 아주 학을 뗐었는데.

그녀가 시작도 전에 피곤한 기색으로 눈썹 뼈 부근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방금 기억났어. 생각해 보니까 이 녀석 이름도 있었어. 왕성의 호위병 타르타르.”

보통 게임이 그렇다. 대장급 몬스터이거나 중간 보스만 되어도 졸개1로 나오지 않고 나름의 고유 명칭이 있다. 그리고 이 트롤의 이름이 바로 타르타르였다. 왕성에서 근무하던 마법사들이 키우던 트롤 타르타르.

“쿠오오오! 타르타르!”

오랜만에 불린 본인의 이름이 기뻤는지 녀석이 호응하며 외치는 포효가 성 전체를 장대한 소음 속에 가라앉게 만든다. 청력이 우수한 엘프는 괴물 멱따는 소리에 고통받는 표정으로 괴로워하며 끔찍해했다.

“트롤 주제에 옷도 입고 있잖아!”

“맞습니다. 게다가 원피스입니다, 공주님.”

“아, 그거는 실험실 옷 같은 건데.”

트롤은 덩치가 크고 힘이 센 것 말고는 별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 미간에 바람구멍이 나도 도로 살이 채워지는 어마어마한 회복력을 가진 동물이었다. 웬만한 상처 따위는 수 초 이내로 아물기 때문에 몸뚱이 전체가 깨지지 않는 방패나 다름없었다.

“트롤의 피는 최고급 힐링 포션의 주재료거든요. 일반 포션보다 치유 성능이 뛰어나서 물약을 제조하는 마법사들에게는 필수품일 수밖에 없어요.”

다시 말해서 안정적인 재료 수급을 위해서, 더 정확히는 안정적인 수혈을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 명의 마법사들이 힘을 모아 이 트롤과 소환 계약을 맺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저건 환자복이라고 해야 맞는 거죠.”

녀석이 원피스처럼 두르고 있는 천 쪼가리의 정체는 연구실의 흰 환자복이었다. 확실하게 피를 뽑았다는 증거로 팔뚝에는 끊어진 링거 줄이 아직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도 했다.

“역시 인간이란 종족은 제정신이 아니야. 발명품 재료 좀 얻겠다고 생태계의 질서를 마구 바꾼다니까. 필요한 자원이 있으면 너희는 악마의 땅도 점령하러 갈 거야. 엘프들도 숲에만 처박혀 있지 말고 나와서 이런 악랄함을 좀 보고 배워야 하는 건데.”

“공주님 잘못은 아니잖나.”

“내가 언제 얘 잘못이라고 했냐. 인간이 그렇다는 거지. 근데 너는 뭘 맨날 그렇게 보자기처럼 싸고돌아. 싸고돌기만 한다고 뭐 되는 줄 알아?”

“그렇게 비난한다고 해도 딱히 변명할 여지는 없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 타르타르는 확실히 인재(人災)는 맞는 것 같긴 해.”

왜 소환해 내서는 이 다리의 길목에서 마주치게 한 건지.

유명 영화에 등장하는 초록색 피부의 괴물을 한 서너 명쯤 합쳐 놓은 듯한 덩치의 트롤이다. 그녀가 골치 아픈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오랫동안 굶주린 녀석은 그런 이들을 맛있는 먹잇감으로 보는 건지 입을 크게 벌렸다. 턱 밑으로 떨어지는 침과 함께 튼튼한 치아가 보였다.

“뭐야, 의외로 치열은 고르고 예쁘잖아?”

“타르! 타르!”

“저 목구멍에서 불같은 걸 뿜는다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그런 능력은 없어요. 그래도 치악력은 무시무시하죠. 씹으면 뼈째로 우릴 으스러트릴 거예요.”

질긴 가죽에 몇 겹이나 되는 지방과 근육을 겨우 뚫고 들어가서 상처를 내도 금방 아물어 버리는 사기적인 생명체. 그에 비해 이쪽은 한 번의 실수만 해도 저 튼튼한 치아 사이에 끼어서 몸이 분쇄가 된다. 아무리 따져 보아도 절대 시작하지 말아야 할 싸움 같았다.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들은 접어요. 애써서 여기까지 왔잖아요. 그리고 트롤도 완전 무적은 아니에요. 심장만큼은 다쳐도 회복되지 않거든요.”

“머리가 아니라?”

응, 하고 태리가 명쾌하게 끄덕였다.

“어떻게 압니까?”

“싸워 봤으니까.”

트롤에겐 오직 심장만이 유효한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머리는 부속품이다. 보통 게임에선 일반적으로 ‘헤드샷 대미지’라고 특별 판정이 있어서 머리를 부수면 치명타로 쳐주는데 이 트롤만은 그렇지 않았다.

“머리, 심장. 난 둘 다 절단해 봤어요. 심장을 부수면 죽었지만 머리는 몇 번을 깨트려도 살아남더라고요.”

아마도 재생의 동력원이 되는 기관이 뇌 쪽에는 없는 게 아닐까 미루어 짐작만 할 뿐이었다.

“너는 대체…… 여기 오기 전에 어디서 무슨 삶을 살다가 온 거냐?”

“전쟁 같은 삶.”

“뭐?”

“그냥, 그런 게 있어.”

어떻게 하면 저런 괴물을 몇 번씩이나 잡아 봤다는 건지 클로드도, 이즈도 반신반의하는 눈치였지만 설명해도 어차피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마우스와 키보드만 있으면 어느 곳에서는 우주 전쟁도 할 수 있고, 밀림에 떨어져 배틀로얄도 벌일 수 있으며, 하늘이든 땅이든 산이든 바다든 원하는 입맛대로 구를 수 있다는 것.

“그럼 또 살아서 다시 봐요.”

또 한 번의 무책임한 발언을 남기고 태리는 한 팔을 들었다. 입에서 나온 중얼거림과 함께 손끝에서 주문이 흘러가며 바둑판식으로 깔린 돌바닥이 출렁이며 들썩거렸다.

거대한 구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지나가듯 돌들이 차례대로 파도칠 때마다 널브러져 있는 나머지 사체들이 깔끔하게 밀려 나가고, 트롤조차 휘말려서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세 방향으로 동시에 팟 하고 도약하며 퍼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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