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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히 최면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그녀는 그의 뺨을 잡고 제게로 고정시킨 뒤 그들이 처해 있는 이 심각한 상황을 강조해 가며 설명했다. 옆에서는 이즈가 계속해서 그냥 버리고 가자고 꼬드겼다.
“우린 지금 아주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어요. 괴물의 입 속에 거의 한 발이 들어간 상태란 말이에요. 당신이 정신을 차려 줘야 다 같이 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빨리 깨어나요. 형도 찾으러 가야죠. 우리, 같이 해 나가야 할 일이 산더미잖아요.”
티 없이 맑은 눈을 끔뻑거리며 경청하던 남자는 잠시 한눈이 새 나가는 법도 없이 오직 그녀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질문했다.
“정신을 차리면, 그럼 나를 버리고 가지 않을 겁니까?”
“……!”
“날 버리고 혼자 어디론가 떠나 버리지 않을 겁니까? 계속 나와 같이 있어 주는 겁니까?”
왜일까. 그가 이 이야기의 결말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태리는 그 순간 대답하지 못하고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떠나지 않을 거라고, 당신을 혼자 남겨 두지 않을 거라고 쉽게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머뭇거릴수록 클로드는 더욱더 그것에 대한 확신을 받아 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재차 연속해서 물었다. 제발 나를 버리고 가지 말아 달라고. 곁에 남아 달라고. 안타까울 정도로 갈망이 어린 목소리였다.
“그럼……요. 그럴게요.”
가시를 삼키듯이 안간힘을 다해서 소리 낸 거짓말이었는데 클로드는 거짓을 주워듣고도 아주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다행이다, 아,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 웃음에 가슴이 먹먹해져서 더는 그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이즈 너도 어서 이 사람을 깨워. 자꾸 버리고 가잔 소리는…… 하지 말고.”
“참나. 미치겠네. 왜 내가 이 녀석한테 그런 동기 부여 선생님 같은 소리를 해 줘야 하는 거냐고.”
하지만 이즈도 클로드가 중요한 전력이라는 것쯤은 인지하고 있는 편이다. 게다가 거의 발각된 거나 다름없는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기사의 역할이 절대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으, 진짜! 그가 팔꿈치로 툭툭 클로드의 가슴을 쳤다.
“정신 차려, 멍청아. 바보같이 있다가 공주를 여기서 죽일 셈이냐?”
“한 번만 더 그딴 말을 지껄이면 네 목을 비틀어 주겠다.”
“아니, 이건 왜 나한테만 이렇게 살벌한 거야. 지금 너 필요하니까 머저리 같은 짓 좀 그만두라는 소리 아니야. 못 알아들어?”
“알아들었어. 하지만 부탁은 공손하게 해라. 나는 고모님한테 무릎도 꿇었다.”
“공손 같은 개소리……! 후우, 아니지. 그래, 일단 나도 살고 봐야 하니까.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네가 제정신으로 있어 주면 우린 좀 괜찮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그만 정신 차려 주지 않겠니?”
“탈락. 공손하지 않아.”
“이 시발! 너, 이 새끼 정신 다 돌아왔지!”
요만큼의 고민도 없는 클로드의 냉정한 탈락 소리에 이즈는 분개했고 그의 외침은 만드레이크의 비명에 버금갈 정도는 아니었으나 외출한 클로드의 정신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데에는 획기적으로 성공했다.
그리고 또한 다리 위에 있는 모든 것들에게 세 사람의 존재를 확정적으로 알리는 데에도 큰 기여를 하고 말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셋은 동시다발적으로 무기에 손을 갖다 댔다. 클로드는 단숨에 발검할 자세가 되어 있었고, 태리는 도끼 자루와 샷건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각각 움켜쥐었으며, 이즈는 화살을 이미 시위에 걸어 메기고 있었다.
“거의 다 왔는데, 젠장.”
“어쩔 수 없어. 이미 들킨 거야.”
“엘프 탓입니다.”
“네 탓이지. 누구한테 뒤집어씌워!”
“입 다물어라. 시끄럽게 하지 말고.”
글쎄, 이건 누구의 탓이랄 것도 없다. 억지로 원인을 찾는다면 주인공으로 태어난 대가일 것이다.
“싸우는 수밖에 없으니까 준비들 해요. 더 이상 고개 숙일 필요 없어요.”
왜 일이 이렇게 됐을까 하는 후회는 가지고 있어 봤자 의미가 없으니 신속하게 버린다.
조용히 눈 깔고 쭈그러져서 걷던 신세에서 보란 듯이 고개를 필 수 있으니 그나마 비굴한 감정만은 날아가서 상쾌했다.
“다들 벼르고 있었나 보네요.”
벌이 바글바글한 꿀통 속에 얼굴을 처넣은 심정이 딱 이럴 텐데.
“옵니다.”
“좌측!”
먼저 공격을 개시한 건 줄곧 주변을 맴돌며 성가신 장난을 걸었던 원숭이들이었다. 녀석들이 즐거워하며 넓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긴 꼬리로 몸을 감아서 포박하려고 하지만 그 전에 끊어 내는 속도가 더 앞선다. 도끼와 검으로 올가미처럼 휘감아 오는 것들을 끊어 내면 이즈가 본체를 명중시켜 마무리했다.
셋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밀려오는 소환수들에 맞서 전진하듯이 밀고 가면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베더라도 되도록 정방향으로 베고, 내던지더라도 되도록 앞쪽으로 내던진다. 어차피 이 다리를 통과해 성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돌파를 최우선으로 둔 그들의 추진력이 생각보다 뛰어나자, 성의 지붕과 탑, 귀퉁이 같은 곳에 매달려 있던 박쥐 모양의 석상들이 갑자기 움직이며 일제히 날개를 펼쳤다. 머리 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펄럭이는 날갯소리에 고막이 찌를 듯이 아팠다.
“저거, 살아 있는 거였습니까?”
“네, 가고일이에요.”
“그런 멸종 위기 생물이 여기 있단 말이야?”
“그런 생각 하지 마. 죽여야 된다고!”
조각상이라고 오해를 받을 만큼 가고일은 앉은 자리에서 몇 달이고 움직이지 않는 박쥐였다. 하지만 등 뒤의 피막 같은 날개를 확장하면 비행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비행을 할 때는 대부분 딱딱거리는 날갯짓 소리로 적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강한 상대는 아니지만 저 성가신 특기를 사용하면 훌륭한 방해꾼이 된다.
“서로 떨어트려서 분산시켜.”
가고일의 공격 패턴을 알고 있는 태리는 그들이 날개를 펼친 즉시 이즈에게 지시했다.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무리이기 때문에 따로따로 흐트러뜨리면 곧잘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되어 있었다.
“한 마리 정돈 생포해 가고 싶은데. 어쩔 수 없지.”
거의 점에 가까운 먼 거리였지만 하이엘프가 가진 천리안의 시력에는 어렵지 않은 도전이었다.
핑!
흰 화살 깃 위에 작은 정령들을 가득 싣고 쏘아진 화살은 당구대의 벽을 팅팅팅 부딪쳐서 구멍으로 들어가는 포켓볼처럼 한 놈의 심장을 꿰뚫고 관통한 다음 방향을 바꿔 또 다른 놈의 날개를 찢고, 또 한 번 꺾여서 마지막 놈의 머리에 꽂혔다.
한 번에 서너 번씩 꺾여 나가는 화살 덕분에 박쥐로 빼곡하게 찼던 머리 위는 제법 듬성듬성해진다. 화살에 맞아 낙하한 놈들은 다리 바깥으로 굴러떨어져 안개인지 연기인지 모를 아래로 삼켜져 사라졌다.
역시 장거리 공격의 최강자, 궁수다웠다. 이런 일은 기사도 마법사도 총잡이도 하지 못한다.
이즈의 손을 떠난 화살들이 한 번도 어긋나지 않았기 때문에 가고일들은 아래로 내려와서 제대로 휘젓지도 못했다.
어쩌다가 운 좋게 접근한 것들이 생기더라도 그때는 여지없이 태리의 총알이 날개를 찢고 나가든가 클로드의 검이 빗자루처럼 머리통을 쓸어 냈다.
지금도 그랬다. 몇 마리가 주둥이를 캬악 벌려서 그의 성검을 송곳니로 물며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그대로 매달려서 검날을 둔하게 만들려고 하는 수법이었지만, 클로드는 여러 마리의 박쥐가 올라타서 무거워진 검의 무게에도 아랑곳없이 올려 쳤다.
붙어 있던 것들과 날아오던 것들이 한꺼번에 휩쓸려 날아가 내동댕이쳐졌다.
이어서 표면에 남아 있던 마수의 타액을 성검이 빛을 내며 스르륵 흡수하는가 싶더니, 잠시 후 클로드가 그것들을 푸른 검기로 바꾸어 허공 아무 곳으로나 방출시켰다.
‘혹시, 피흡……?’
본인은 전혀 모르는 것 같지만 클로드는 지금 ‘피해 흡수’라는 엄청난 기술을 사용했다. 따로 치유 능력이 없는 전사들에게는 생존기가 될 수 있는 능력이긴 하지만 저건 결단코 성기사가 넘어 들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태리가 깜짝 놀라서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언제부터 그런 걸 할 수 있었던 거예요?”
“아, 방금 돌풍이 나가는 것 말입니까?”
“그건 돌풍이 아니라고요.”
“묘지에서 왕을 꺾었을 때 어설프게 익힌 겁니다. 그분이 하시는 걸 보고 응용했습니다.”
맙소사. 그건 마검사가 사용하는 기술이라고 일러 주기도 전에 또 다른 적들이 몰려왔고 클로드는 정확히 같은 반격을 사용해서 물리쳐 냈다.
그녀가 경악한 것과 비슷하게 가고일들도 크게 놀라서 달려들던 것을 멈추고 점차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예상을 벗어난 경우의 수에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어? 혹시 겁줘서 쫓아낼 수 있나?’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일이지만 가능성이 없을 것 같진 않았다. 태리는 신속하게 손끝을 세워 허공에 마법식을 흘려 적었다.
내면의 공포. 3서클밖에 되지 않는 초급수준의 정신계 마법이지만 클로드로 인해 이미 까무러치는 것을 보았으니 시도할 만하다고 여겼다.
이윽고 마법이 완성되자 하늘에서 쭈뼛대던 가고일들의 정신이 공포로 잠식되기 시작했다. 잠시 저항하는 것처럼 뱅글뱅글 선회하던 녀석들은 얼마 못 가서 하나둘씩 방향을 돌려 달아났다.
“도망간다.”
알아서 물러간다. 성공했다. 세 사람의 얼굴이 기쁨이 번졌다.
신이 난 이즈가 태리의 머리를 껴안고 마구 쓰다듬었다.
“이 자식 진짜 대단하잖아! 어떻게 해낸 거야!”
“잠깐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두 번은 통하지 않을 요령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발밑을 뒤흔드는 진동을 먼저 알아차리는 건 당연히 감각이 우수한 엘프다.
그녀의 머리를 마구 비비며 칭찬하던 이즈의 귀가 쫑긋 서더니, 삽시간에 심각한 흑빛으로 안색이 물들었다.
“아, 제발. 다 장난이라고 해 줘.”
“미안해. 장난이 아니야.”
“……무엇 무엇이 더 있습니까.”
내렸던 검을 다시 가슴 앞으로 세우며 클로드가 다리를 가로막고 있는, 정면의 무리를 향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너무 많아서 잘 분별되지도 않는 그것들을 태리는 눈으로 살폈다.
일단 하마를 닮은 베헤모스 떼거리가 있고요, 그리고 삼지창 뿔을 가진 검은염소가 있고요, 외눈박이 사이클롭스가 있고, 또 커다란 코뿔소랑, 사람을 찢는 곰, 바질리스크, 대왕 거미…… 그 외에 다수가 있네요.
차마 위의 사실을 그대로 말할 수는 없어서 최대한 간소하게, 그러면서도 사실에서 어긋나지는 않도록 축약해서 전했다.
“대체로 달리기를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