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1화 (141/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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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장미원까지도 무사히 통과했다. 차근차근 걸어 나간 일행은 어느새 본성으로 연결되는 마지막 관문인 구름다리로 들어섰다. 

집채만 한 돌덩어리 수천 개를 어떻게 이렇게 일률적인 정사각형 모양으로 깎아서 다리를 놓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평탄한 길인데도 뒤를 돌아보면 검은숲 전체가 내려다보일 정도로 가파른 오르막이다.

낭떠러지처럼 보이는 다리 밑으로는 영문 모를 자욱한 연기까지 끼어 있어서 방문객으로 하여금 마치 창공의 성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들도록 만드는 길이었다.

자연적인 현상일 리는 없고 마법으로 인한 환시 같았다.

꾸준히 나아가던 태리는 문득 멈춰 서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가파르게 깎아 내지르는 길 아래로 전망이 한눈에 들어왔다. 숲 안에서는 접근도 할 수 없어 첨탑의 끄트머리만 겨우 내비쳤던 성은 안에서 내려다보니, 숲은 물론이요 그것과 경계가 닿아 있는 장벽과 구시가지의 모습까지도 넓은 시야 안으로 한 번에 잡혀 들어왔다.

그녀는 그 풍경 속에서 성벽을 두르고 있는 물웅덩이 해자를 가늘어진 눈으로 살폈다.

세 사람은 저 밑의 지하 수로를 지나 입성했지만 사실 정상적인 출입로는 저 해자를 지나쳐야 한다. 그리고 지금 그 해자 위에는 조각배를 타고 노를 저으며 성 앞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이 자그마하게 보이고 있었다.

사람은 아니고 드래곤의 어금니로 만들어진 용아병들이다.

제 신체 일부를 떼어 만든 병사로 자신의 레어를 지키도록 하는 건 용들의 오랜 습관이었다. 지금은 빌의 의지에 따라 아마도 이 성을 지키고 있을 터였다.

‘저기 말고도 더 있을 거야.’

아직까진 들키지 않은 것 같지만 곧 성에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걸 빌이 알아차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서둘러야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다리를 태리는 다시 부지런히 걸었다.

본성의 커다란 대문이 서서히 정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파트 5층 높이 정도는 거뜬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문 위에는 소네티 왕가의 소유물임을 드러내는 갖가지 부조와 문양, 장식들이 번성했던 시대의 흔적을 과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웅장한 만큼이나 이곳은 재앙의 근원이다.

그 사실을 암시라도 하듯이, 문까지 고작 몇 미터 남짓한 직선거리에는 유독 길을 잃은 소환수들이 진을 치듯 산재해 있었다.

그들은 다리 난간을 잡고 아이 잃은 엄마처럼 흐느껴 울기도 하고, 넋이 나간 멍한 얼굴로 걸어 다니거나, 의미 없이 허공으로 팔다리를 휘두르고 다녔다.

무시하고 전진하려는 일행의 발밑으로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원숭이가 부서진 껍질들을 주워다가 마구 집어 던지면서 장난을 쳤다.

눈이 마주치지 않으니 공격은 하지 않지만, 이렇게 해서 자신들을 쳐다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조용히 지나고픈 이들에겐 위험한 도발이었다.

다행히 날아오는 대부분의 것들을 클로드가 보지 않고도 쉽게 검으로 쳐 낼 수 있었지만, 포기하지 못한 몇몇이 대놓고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태리의 긴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이즈의 날렵한 걸음에 발을 걸어 넘어트리려고 했다.

“장난이 점점 더 심해지는데. 계속 무시해야 되는 거냐?”

“이 다리가 길목이라서 그래. 이성과 지성을 모두 잃었어도 본능적으로 침입자가 성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걸 막으려는 거야. 계속 나올 테니까 참아.”

꽥꽥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는 광인들 사이를 ‘나는 투명인간이다, 나는 투명인간이다’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계약자를 잃고 미쳐 버린 소환수들은 자신들이 미쳤다는 것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채 낄낄거리고 있었다.

게임 내에선 ‘폐성의 부패한 다리’라는 지명으로만 등장하지만 사실 이곳은 거의 마굴이나 다름없는 구간이었다.

눈을 마주쳐선 안 된다는 숨겨진 규칙을 발견해 내기 전의 태리는 이 다리에서 참 많이도 죽어 봤다. 그렇기에 안다. 단언컨대 상대하지 않는 게 최고의 승리법이라는 걸.

특히 가장 마지막에 나타나는 녀석의 HP통은 정말 어마어마해서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종일 때려도 죽지 않는 정도다.

그녀는 이들이 하필이면 이 구간에 배치된 이유를 게임의 난이도를 월등히 높이려는 의도로 해석했다.

다리에서 엉망으로 구르고 나면 겨우 살아서 통과하더라도 기력과 생명력이 절반은 깎인 채로 성 탐색을 시작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만큼 플레이가 어려워진다.

그러니 더더욱 싸우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다.

전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여기가 그녀에게 현실이었다. 현실은 게임과 다르다. 한번 소비해 버린 체력은 게임에서처럼 조금 쉰다고 그렇게 간단히 채워지지 않는다. 동료가 다치거나 죽게 되어도 그걸로 끝이다.

다행히 그녀가 입 아프게 여러 번 말하지 않아도 두 남자는 알아서 잘 조심하고 있었다. 둘 다 경험이 많아서 이 자리에서 탈이 나면 좋지 않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는 듯했다.

싸움이 일어날 기회를 철저히 차단한 채로 세 사람은 신중하게, 하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마는 것일까.

원숭이들이 쉼 없이 던져 대는 열매 껍질을 보지 않고 연신 검으로 받아쳐 내던 클로드의 칼끝이 바닥을 살짝 스쳤을 때였다. 날카로운 칼끝은 돌과 돌 사이에 흙이 채워진 야트막한 틈 사이를 긁고 지나갔고, 그 비좁은 틈에 솟아 있던 민들레를 닮은 잡초의 뿌리를 함께 베어 내고 말았다.

꺄아아악!

머리가 얼얼해질 것 같은 끔찍한 비명 소리였다. 거의 울부짖음에 가깝다. 게다가 소리 자체도 무지막지하게 컸다.

세 사람은 모두 당황했고, 그 순간 제각기 공상에 빠져 있던 넋 나간 소환수들의 눈동자들이 일제히 그들에게로 쏠렸다. 마치 내 집에 들어와 있는지도 몰랐던 도둑의 존재를 지금 막 알아챈 것처럼 흐늘거렸던 동공에도 서서히 초점이 들어오려 했다.

“머리 숙여요, 당장!”

태리는 재빨리 두 남자의 목덜미를 잡아끌어서 아래로 눌렀다. 거의 간발의 차로, 뒤이어서 보이지 않는 눈동자들이 무더기로 꽂혀 들며 목덜미에 오한이 느껴졌다.

“젠장, 들켰냐?”

“침착해. 눈만 마주치지 않으면 돼. 아무것도 못 봤다고 생각해.”

하지만 고개를 들면 전부 다 이쪽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세 사람은 둥글게 모여 서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바닥만 내려 보았다. 그리고 비명을 질러 댄 문제의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거…… 만드레이크 아니야.”

클로드의 칼끝이 아슬아슬하게 베고 만 것은 만드레이크의 뿌리였다.

그러고 보니 바둑판처럼 깔린 바닥의 돌 틈 사이에는 군데군데 자라나 있는 잡초들이 드물지 않게 보였다. 민들레 홀씨라도 날아와 어렵게 싹을 틔웠나 했는데, 이제 보니 전부 다 야생 만드레이크였다.

“이딴 데에 왜 만드레이크가 있어!”

“마법사 성이니까 있을 수 있긴 한데…….”

뿌리가 사람 모양처럼 생긴 이 식물은 마력 보충이라는 기본적인 효능을 가진 아주 흔한 마법 재료 중의 하나였다. 적어도 마법사들에게는 약방의 감초와도 비슷한 식물이다.

하지만 외부인들에게는 낯선 약초이며 무엇보다 이 식물은 뽑아낼 때 방금과 같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기 때문에 주변 흙 전체를 들어내서 조심스럽게 채취를 해 줘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비명은 자신을 강제로 흙 속에서 뽑아낸 사람을……

“괜찮아요?”

걱정스러운 시선이 클로드에게로 향했다.

“당신이 걱정해 줘서 무척 기쁩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왜 나는 아프지 않습니까?”

그렇다. 일시적으로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만들기 때문이었다. 아주 약한 최면제와도 같은 효과였다.

“아오, 돌겠네. 이거 봐, 이 녀석 역시 비명을 듣고 미쳤어.”

미쳤다기보단 뭔가를 물으면 저항하지 못하고 진실만을 토하는 무방비한 상태와도 비슷한 것이다. 브리짓은 만드레이크의 비명 소리를 유리병에 수집해서 자백 유도제로 활용할 수도 있다고 했었다.

“미친 게 아니야. 얼른 정신이 깨어날 수 있도록 우리가 옆에서 도와주면 돼. 강한 사람이니까 조금만 자극해 줘도 쉽게 깨어날 수 있을 거야.”

“안 됩니다. 당신이 나를 자극하면 난 아주 위험한 짐승이―”

“봐! 미쳤잖아! 버리고 가야 돼! 미친 소리를 술술 하잖아!”

그 어느 때보다도 순둥순둥해 보이는 클로드의 회색빛 눈동자가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엘프를 멀거니 응시했다. 그러곤 역시나 순수한 진심만을 담아 성실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나는 네가 싫습니다. 너는 대체 왜 따라왔습니까?”

“내가 어딜 가든 말든.”

“형을 찾느라 숲을 헤매는 며칠 동안 너는 계속 공주님 주변을 차지했습니다. 하루에도 몇십 번씩 돌아와서 당장 너를 그 자리에서 쫓아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하, 그랬냐? 아이고, 근데 어떡하냐? 그렇게 못 하셔서? 속이 잔뜩 뒤집어지셨겠구만.”

“보지 않고 버티는 건 몹시 괴로웠습니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제어가 되지 않을 클로드는 방향을 바꿔서 태리에게 엉겨 붙듯이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어깨와 목덜미 사이를 파고드는 콧날과 머리칼 때문에 그녀가 간지러워서 움츠러들면 더욱 벗어나지 못하도록 잡아당긴다.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순진한 상태가 되어 버려선지 평소보다 힘이 더 센 것 같았다.

제 것이라고 고집이라도 부리듯이 안고서는 이즈에게 또박또박 내뱉는 말에는 더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경고하는데 공주님 곁에 얼씬거리지 마십시오. 나는 약혼자입니다.”

“인간들끼리 한 그런 종이 쪼가리 계약. 엘프는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거 몰라? 막말로 나는 너희들이 백년해로하고 살다가 헤어질 때까지도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단 말이지. 워낙 오래 살아야지.”

“그럼 신경 쓰이게 해 주겠습니다. 네 인생, 짧게 살도록 해 주겠습니다.”

“뭐야?!”

검을 스르릉거리며 뽑아내려고 하는 클로드를 태리가 서둘러 저지했다. 안 돼, 이러지 마. 제발 정신 차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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