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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어떻게 연결된 길입니까?”
“성에 설치된 상하수도 시설의 일부에요. 숲에서는 성 근처로 아예 접근이 되질 않아서 못 봤겠지만, 성곽을 둥글게 둘러 파서 못처럼 만든 해자가 있어요. 수심도 깊고 폭도 넓은 편인데 우린 지금 그 밑 어딘가를 지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 머리 위에 호수가 있단 거로군.”
원래 해자(垓字)라는 것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 주변을 큰 원으로 둘러 파서 만드는 방어 목적의 인공 못이었다. 성 입구에서 다리를 내려 주지 않으면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도록.
하지만 마법사의 성에선 내부에 공급할 물을 위한 저수지 용도로 만들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다른 성들의 해자보다 훨씬 깊고 넓어 쪽배를 띄울 정도로 커다란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그곳에 고여 있는 물들이 성 구석구석에까지 설치되어 있는 지하 수로를 타고 흘러가며 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했다.
“그나저나 이 땅굴 진짜 대단하네.”
습기를 머금어 눅눅한 벽을 이즈가 만졌다. 천 년이 넘도록 같은 자리에 있었을 바위는 갈색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도 무너지지 않고 견고하며 무게 중심과 구조에조차 빈틈이 없다.
거기에다가 지난 세월 동안 거쳐 갔을 위대한 마법사들의 강화 마법식이 수로 전체에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짜여 있어 이 거대한 터널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것들을 감상하느라 정신없이 고개를 돌려 보던 이즈가 갑자기 머리칼을 쭈뼛 세우며 손을 뒤로 뻗어 전진을 막았다.
“잠깐, 멈춰! 뭔가가 있다!”
어두운 바닥 밑에서 희미하게 솟아오른 듯한 윤곽이 보였기 때문인데, 태리는 기겁해서 호들갑을 피우는 그의 말을 대충 듣고는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아아, 함정일 거야. 그대로 걸었으면 발바닥에 쇠꼬챙이가 꿰였겠는걸. 역시 널 선두에 두길 잘했어.”
“너, 인마…… 그렇게 아무런 일도 아닌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해체하는 방법은 다 알아. 정확히 어느 지점에 있는질 일일이 다 기억 못 해서 그렇지. 가면서 다 해체하고 가자. 돌아올 때도 대비해야 되니까.”
그녀의 말대로 터널은 함정 밭이나 다름없었다. 웬 덫이 그렇게 많이 놓여 있고, 뭔 놈의 마법은 그리도 현란한지. 긴 세월이 지났음에도 고장 나지 않고 모두 다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즈가 뛰어난 눈썰미로 수상쩍은 기미를 알려 주면 태리가 쉽게 그것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그녀가 도착한 것 같다고 일러 주었다.
“여기서 올라가는 게 맞을 것 같아요. 더 가면 나갈 수 있는 문도 없을 테니까.”
출발했던 입구에 비해 안으로 들어갈수록 수로에는 점점 더 많은 물이 차 있어서, 세 사람이 맨홀 뚜껑 같은 지상으로의 출구를 손으로 밀어서 올라왔을 때엔 모두 찬물을 뒤집어쓴 상태였다.
그러나 젖은 옷에 불평할 겨를도 없이 올라오자마자 쌩쌩 몰아치는 강풍이 덮쳐들어서 다들 서둘러 그 축축한 옷깃이라도 여며야 했다.
방문객을 환영하는 인사치곤 격하다 싶을 만큼 센 바람이다 싶었더니, 주위에 펼쳐진 허허벌판의 불모지를 마주하고 나서야 썰렁한 바람이 납득이 되었다.
“웬 바람이 이렇게 부나 했더니.”
“올바르게 도착한 게 맞습니까?”
풀 몇 포기 겨우 남은 황량한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네, 제대로 왔어요. 장미원으로 들어왔잖아요. 여기가 성의 앞뜰이에요.”
“장미원?”
“여기가 말입니까?”
제대로 보고 말하는 게 맞냐는 듯한 되물음인데 이해한다. 메마른 대지는 전후좌우로 그저 넓게 펼쳐져만 있을 뿐 그 어디에도 꽃과 나무란 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새카맣게 죽은 나무둥치로 보이는 것들이 몇 개 보이긴 했지만 그걸 가리켜서 나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발 밑창을 긁는 감촉에서도 버석한 모래의 느낌만이 전해졌다.
“맞아요, 장미원.”
꽃과 나무로 빽빽하게 차 있었을 예전의 모습을 상상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지나치게 황폐해서였다.
흙바닥에서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보곤 태리가 손을 탁탁 털며 일어섰다.
“가요, 얼른.”
세 사람은 다시 조용히 벌판을 가로질러서 성채의 중심이자,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한 본성을 향해서 걸어갔다.
주변이 휑하게 비어서인지 달빛이 환하게 들어찬 성안은 눈앞의 사물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밝았다.
가는 도중에 그날의 처참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흔적들을 여럿이나 스쳐 지나갔다.
공멸에 가까운 대규모의 마법이 벌어졌던 건지 곳곳에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땅이 움푹 파였고, 그 구덩이 속에 알 수 없는 뼛조각이나 찢어진 천 조각, 부러진 지팡이 같은 것들이 고여 파묻혀 있었다.
또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아서 성을 지키다가 빠져나갈 수 없음을 직감한 마법사들이 스스로에 건 석화 저주로 인해 돌이 된 모습으로 들판에 버려져 있었다.
오랜 세월 풍화되어 눈 코 입이 마모되고 깎여 나갔으나 로브를 여민 브로치와 하늘을 향해 치켜든 화려한 지팡이의 장식에서 궁정 마법사의 고고함이 엿보였다.
멸망의 순간에 돌로 변해 시간이 멈춰 버린 잔해들을 지나치며 태리는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처음 목격하는 것도 아닌데 가슴속에서 원인 모를 감정들이 부글부글 끓으며 솟아나오려 하고 있었다. 식은땀이 나고 경련하듯이 아랫입술이 잘게 떨리는 건 그 충동을 눌러 참으려고 하다 보니 나오는 반응이었다.
‘뭐지…… 이 상실감은?’
왜 당신들이 이곳에 이렇게 버려져 있어야 하는 거지. 왜 나는 이걸 이제야…….
너무나 부당하고 끔찍한 죽음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그걸 누구에게 외친단 말인가. 누구를 붙잡고 따져야 옳단 말인가.
자신이 외친 말을 들어야 할 사람도 그녀 자신이라고 느껴졌다. 전부 다 자신이 들었어야 하는 말 같았다.
“공주님.”
“괜찮…… 괜찮아요.”
이상해진 그녀의 상태를 알아차린 클로드가 뒤에서 쫓아오던 걸음을 빨리해 그녀의 옆에서 어깨를 감싸 부축했다. 힘이 빠진 다리는 그에게 기대서야 그나마 제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가 천천히 보폭을 맞춰 주었다.
“이미 다 끝난 일입니다.”
“……알아요.”
“끝나지 않고 무언가가 더 남았다면 그게 더 끔찍한 일일 겁니다. 그러니 힘들더라도 받아들이고 버텨야 돼요. 그래야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재앙이 휩쓸고 지나갔고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이다. 그것을 마치 전시하듯이 늘어놓아 두 눈으로 보게 한 것은 비참한 경험이나 그럼에도 끝난 것은 되돌릴 수 없으며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음을, 클로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했다.
혹여나 그녀가 무너져 내릴까 봐 마른 어깨를 감싸 쥔 손아귀에도 강한 힘이 실렸다.
그렇게 쓸쓸하고 외로운 뜰의 절반 이상을 버텨 내서 지나갔다.
앞장을 서던 이즈가 돌연 허리를 굽히더니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보지 못했던 들판에서 끝부분이 말라 있는 깃털 하나를 발견하곤 주워 들었다.
병든 기색이 완연한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든 생각은……
“살아 있는 것도 있네?”
이곳에 ‘아직 죽지 않은 것들’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민감한 엘프의 감각 안으로 어떠한 낌새가 느껴졌다. 본능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그는 해당 방향으로 화살을 뽑아서 시위에 메겼다.
태리가 화들짝 놀라며 그의 팔을 저지했다.
“쏘지 마!”
잠시 후 흰족제비가 ‘흐으…… 흐으…….’ 하는 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흐느적거리듯이 그들의 옆을 지나갔다. 이어서 또 몇 마리가 똑같은 모습으로 지나쳤다.
쥐새끼 한 마리도 없었던 곳에 언제 이렇게 순식간에 모인 건지 연달아 나타난 숫자가 꽤 되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정상 같아 보이지는 않는 게 전신에 오염된 기운이 만연했다.
“이게 다 뭐냐.”
“죽은 마법사들의 계약자, 소환수들이야.”
“들어오자마자 난관이잖아.”
“되도록 쳐다보지 마. 지나가도 무시해. 눈만 마주치지 않으면 돼.”
“그 말은.”
“눈을 마주치면 무조건 공격한단 소리지.”
이들은 몬스터라고 밀어 넣고 부르기엔 가혹한 대상들이었다. 그저 친구일 따름이다.
계약자를 잃어버리고 정신이 망가진, 마법사들의 오래된 옛 친구들이었다. 제 친구가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몸도, 영혼도 이 폐성에 묶여서 맴도는 가여운 대상들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 부리를 처박고 콕콕 찌고 있는 그리핀을 보곤 이즈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거대한 날개로 공중을 누비며 제 등에 태울 사람을 스스로 고르는 영물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새는 지금 눈앞에서 비둘기보다도 더 멍청한 표정으로 뒤뚱뒤뚱 걸어 다니며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천둥새가…… 아? 설마 저 돌에 붙어 있는 나비도 그런 쪽이냐.”
“그래. 그런 거야.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 그리고 나비가 아니라 감기나방이야.”
“만지면 큰일 나?”
“우울증 걸리고 싶으면 실컷 만지든가.”
날개가 무려 여섯 짝이나 되는 나방이었다. 원래는 밀림이 우거진 남쪽 섬에서 서식하던 건데 모험심 많은 어느 마법사가 구해다가 자신의 던전 안에 1년 내내 불을 피워 번식시켰다.
날개를 잡으려고 하면 순간적으로 가루를 분사해 짧은 우울증을 겪도록 만들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그걸 감기에 걸린다고 표현해서 감기나방이라고 불렀다.
당연히 태리도 이곳에 오기 전엔 몰랐던 지식이고, 게임 속에서는 안일하게 성 이곳저곳을 달리다가 무심코 저것들과 스쳤던 적이 많았다.
옆으로 닿기만 해도 캐릭터의 스태미나가 푹푹 깎여서 기력 회복제로 꼭 상태 이상을 풀어 주고 전투를 해야만 했던 성가신 기억이 남아 있었다.
“왜 저런 걸 소환한 겁니까?”
“적의 사기를 떨어트리려고요. 나방에 대해 알지 못하는 침입자라면 신기해서 만지게 되어 있으니까요.”
“이야, 잔머리가 굉장하잖아, 마법사 녀석들. 그나저나 이 이빨은 뭐야. 강도가 굉장한데. 깎아서 화살촉으로 재활용하면 좋겠어.”
“미쳤어?!”
“그게 어떤 괴물의 이빨일 줄 알고. 겁도 없군.”
“참나, 미쳐서 겁도 없는 건 나보단 너희거든.”
한낱 인간 주제에 실력 좀 있다고 용의 아가리로 배낭 챙겨서 기어 들어오는 녀석들 주제에. 지금 누구더러 미쳤냐느니 겁대가리가 없다느니 몰아붙이나. 이즈는 기어코 물갈퀴처럼 휜 치아 조각들을 전부 채집해서 호주머니에 쑤셔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