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8화 (138/186)


 

138

이즈가 소름 끼치게 웃으며 다가오자 남자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가까이 오지 말라고 고함쳤다. 

꿀밤 먹이듯이 사람 두개골을 깨기에 아주 좋은 찬스였다. 최고의 타이밍이었고.

이즈가 담배 한 모금을 크게 빨아들인 뒤 연기를 뱉어 남자들의 시야를 뿌옇게 덮었다. 동시에 입에서 떨어진 담뱃대가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섰는데, 순간 뒤에서 악력이 강한 손아귀가 날아와 그의 팔뚝을 올가미처럼 움켜잡았다.

“……!”

몸 전체가 그쪽으로 끌려갈 만큼 강한 힘이었다. 욕설이 절로 잇새로 튀어 나갔다.

팔이 꺾이는 것도 아랑곳없이 저항해 봤지만 상대는 이즈의 흰 피부가 아예 창백해질 정도로 움켜잡아서 그를 제압해 버린다. 그러곤 내동댕이치듯 팔을 놓아 그를 서 있던 자리에서 밀쳐 냈다.

밀려나기가 무섭게 이즈는 곧장 형형한 기세로 고개를 돌렸다. 내뿜었던 연기가 모두 가라앉고 그 자리에 나타난 건 그가 좀 전에 평생 나타나지 말라고 했었던 그 클로드였다.

아씨, 얘는 왜 또 온 거야!

“이 두 놈 모두 끌어내라. 이 앞에서 치워.”

겁을 잔뜩 줬으니 이제 제 손으로 골로 보내면 딱 알맞은 마무리였는데 저 엉뚱한 놈이 나타나서 제 몫을 가로채 가 버렸다.

“이 시발! 내놔! 그건 내 몫이야!”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드는 이즈를 클로드는 성가신 손으로 쳐 내더니 바늘 한 귀퉁이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서늘한 모습으로 끌고 온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앞으로 수색에 참여할 필요 없다. 전과 같이 호텔 주변으로 퍼져서 경계를 서라. 여기서 보고 들은 것들은 수상함의 유무와 관련 없이 모조리 내게 보고해라.”

소란을 일으킨 남자들을 끌고 가도록 하고, 호텔을 삽시간에 자기 군사로 포위시키는 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총독의 얼굴이었다. 그래, 딱 침략자의 모습 그 자체다.

그대로 호텔 입구를 향해 들어가려는 녀석의 앞길을 이즈가 날렵하게 튕겨져 날아와 가로막았다.

“너 이 새끼, 여기 왜 왔어?”

“…….”

“약혼자로 온 거냐, 아니면 총독으로 온 거냐?”

서리가 낀 늑대의 털처럼 차갑게 타오르는 듯한 눈빛은 이즈를 고요하게 응시만 할 뿐 다른 감정은 엿보이지 않았다. 대답도 없다.

그 사이에 다른 기사가 다가와서 ‘끌어낸 남자들을 어떻게 할까요?’라고 조심스럽게 묻는다. 클로드는 변함없이 건조하고 메마른 목소리로 지시했다.

“감옥에 가둬라. 물도 주지 말고, 먹을 것도 주지 마. 규정대로 한다.”

그러곤 무시하듯이 이즈를 지나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입자를 걸러 낼 보호 마법이 비밀리에 대여섯 개나 중첩되어 있는 문고리는 그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았다.

“하아…… 못 해 먹겠군, 정말.”

철이라도 씹어 먹을 것처럼 굴었던 클로드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바로 풀썩 주저앉았다. 딱하다는 듯이 이즈가 그를 내려다보며 쯧쯧거렸다.

“연기 지지리도 못하더라.”

밖에서 그가 일부러 엄격한 척 연기했다는 것을 코 푸는 것보다 쉽게 알아차린 이즈였다. 워낙 재주가 없어야지. 제 뒤에 있는 놈들 보라고 그런 것 같진 않았고, 이 동네 사람들 보라고 한 짓인 것 같았다.

교묘하게 자신의 기사들을 호텔에 배치한 것도 겉으론 공주를 압박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다른 누군가가 허튼수작을 부리기 전에 자기 사람들로 깔아 놓으려는 그만의 보호 방식일 터였다.

접수대 뒤에 숨어서 그들을 훔쳐보는 꼬마 여자애 둘을 이즈가 손가락으로 까닥까닥 불렀다.

“거기 릴리와 마치인지, 마치와 릴리인지 너희들. 거기 숨어 있지 말고 가서 공주한테 알리기라도 하는 게 어때.”

“릴리가 먼저예요!”

“아냐, 마치가 앞에 서는 게 맞아요!”

“에이, 시끄럽긴. 누가 먼전지 알 게 뭐야. 순서는 네들이 알아서 정하고 방문객 맞이나 하라고.”

발끈해서 튀어나온 아이들은 고약한 말솜씨의 엘프에게 열띠게 항의하는 듯했으나 눈썹이 매섭게 선 지배인이 나타나자, 히익 놀라며 쏜살같이 구석으로 도망가 사라진다.

블라우스 정장에 구김 하나 만들지 않은 안시가 클로드를 보곤 한숨을 푹 쉬더니 말없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길을 비켰다.

“요즘 같은 때에는 공주님이 밖에 나오셔서 좋을 게 없습니다. 되도록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는 게 낫죠. 뵙고 싶으시거든 직접 올라가십시오.”

“고맙군, 지배인.”

짧게 감사 인사를 한 클로드는 긴 다리로 뛰듯이 걸어서 신속하게 계단을 타고 올랐다. 이즈 또한 그 못지않게 민첩한 움직임으로 잽싸게 쫓아 올라갔다.

“너는 왜 따라오나.”

“오늘 새벽에만 내가 아홉을 때려 눕혔어. 방금도 네가 가로채지 않았으면 걔들도 사이좋게 골로 보내 줬을 거다, 이 말이야.”

네놈이 자리를 비운 나흘 내내 진료소 창문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여길 지킨 게 누구? 딱 그런 뉘앙스로 거들먹거려 주니 클로드는 못마땅하지만 차마 꺼지라는 말을 못 하고 이즈의 참견을 납득했다.

그러곤 잠시 후에는 정중한 목소리가 뒤따라왔다.

“부탁한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지만 알아들었다. 딱히 부탁을 하고 말 것도 없을 텐데 새삼스럽네. 이즈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쓸데없는 걱정 하네. 내가 알아서 해.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내가 다 알아서 한다고. 애먼 공주한테 살인자 딱지가 붙도록 내가 그냥 두고 볼 것 같냐?”

공주가 살인자라니, 누구에게 지금 되지도 않는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건지. 상대를 봐 가면서 시비를 걸어야 할 거 아닌가. 이즈는 마치 제 일처럼 신경질을 부리다가 고단함이 얹혀 있는 클로드의 어깨를 뒤에서 툭 쳤다.

“네 형이란 사람은 아직도 깜깜무소식이냐?”

클로드는 어두운 표정으로 끄덕인다. 그 꼬락서니도 썩 보기 좋지는 않아서 이즈는 결 좋은 머리를 박박 긁으며 또 에이씨, 하고 짜증을 냈다.

평범한 숲이었다면 숲의 종족인 그가 나서서 금방 찾아 주었을 것이다. 나무의 뿌리에서, 새의 지저귐에서, 동물들의 발자국에서 엘프는 숲에서 일어난 일들을 공유받는다.

하지만 죽은 숲에서는 그 능력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죽은 숲은 더 이상 엘프의 친구가 아닐뿐더러 오히려 그를 위험에 빠트린다. 검은숲을 가로지른 첫날 그도 안일하게 돌아다니다가 똑같이 당해 봤으니 누구보다 잘 알았다.

“너 형이랑 친하다고 하더라. 공주한테 들었어.”

“……그래.”

“그래서 네 걱정 엄청 한다. 잠도 잘 못 자고.”

자기 형제도 아니고 남의 형제를 잃어버린 일에 공주는 제 마음이 다 닳을 정도로 걱정했다.

아마 옆에서 기를 쓰고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몇 번이나 찾는 걸 돕겠다고 숲으로 뛰쳐나갔을 터였다.

“자주 들여다봐 줘라. 부탁한다.”

“그딴 건 안 시켜도 알아서 잘 하고 있다니까. 어? 쟤 나와 있네.”

2층으로 올라가니 태리가 먼저 문밖으로 나와 있었다. 한걸음에 클로드에게로 달려온 그녀는 수척해진 그의 얼굴을 충혈된 눈으로 바라보다가 까칠해진 눈가를 쓸어 주었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거더라. 떨어져 있던 며칠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피로감으로 인해 쳐진 속눈썹이 손끝을 쓰르르 간지럽혔다.

제 얼굴을 매만지는 손을 잡아 내려서 방 안으로 이끈 클로드는 그대로 문을 닫곤 문단속을 하듯 재차 문고리의 잠김을 점검했다.

주변에 별다른 위협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태리를 소파에 앉히곤 자신은 그 아래에 카펫에 무릎을 댄 채 그녀의 양팔을 감싸고 올려다보았다.

“나 봐요. 시간이 없어서 먼저 말합니다. 중요한 얘기고. 밖에…… 정말로 위험해졌으니까 앞으로 웬만하면 호텔 밖으로, 아니, 방 밖으로 나오면 안 됩니다. 무슨 일 있으면 사람을 부르고.”

찻집을 공격당했던 브리짓의 일이 스쳐 지나간다. 이 호텔도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의 감정은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해졌고 이제는 그 명분마저도 차차 타당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이 분위기에 제국이 공식적으로 편승하겠다고 결심한다면 머지않아서 그와 그의 성기사단에게는 이곳으로 칼을 겨누라는 명령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뜨겁고 쓰라린 눈을 질끈 감은 태리는 잠긴 목소리를 내는 대신 몇 번을 거듭해서 끄덕거렸다.

가족의 생사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마당에, 자기 몸은 지쳐서 쓰러질 지경이면서도 이 남자는 자신을 챙겨 주러 왔다. 내가 걱정되어서, 내가 마음 쓰여서…….

한없이 수그러지는 그녀의 머리를 클로드가 소중하게 감싸서 들었다.

“누구에게도 잘못 없이는 고개 숙이지 말고.”

이건 그녀의 탓이 아니었다. 그녀로 인해선 그 어떠한 잘못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부디 그녀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에 머리를 숙이고 있지 않기를 바랐다.

“형을 찾을 때까진 자주 못 올 겁니다. 그래도 꼭 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나 기다려요.”

오늘도 시간이 그리 많이 없다. 서둘러 복귀해야 한다. 더는 태리를 혼자 둘 수가 없어서 기사들이라도 남겨 두기 위해 잠시 빠져나온 것뿐이었다.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대신해 그가 태리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창밖에서 대치 중인 성기사들을 힐끗 내려다본 이즈가 저것도 오래는 못 할 짓이라며 끼어들어 말했다.

“근데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는데. 뭐라도 대책이 있어야 할 거 아냐.”

태리의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단은 견뎌 보고.”

“이 수모를? 네가 왜! 미쳤냐?”

네가 뭘 잘못해서 이런 취급을 참아 줘야 하냐고 이즈는 닦달했지만, 참지 않는다면 제국과의 본격적인 전면전뿐이다. 그렇게 되면 애써 해 놓은 협상은 물거품이 되고 전보다 더 확고하게 두 세력으로 갈라서게 되는 일만이 남았다.

태리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클로드를 적으로 두고 그와 갈라서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반드시 형을 찾아오겠다.”

그러니 갈등의 씨앗이 된 미리엘이 살아 돌아와 줘야만 했다. 그의 귀환만이 이 난리 통을 말끔하게 잠재울 수 있으니. 실종은 단순 사고였고 마법사들에게 씌워진 건 누명인 것으로 꼬인 매듭을 풀어 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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