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 * *
밤새 장대비가 쏟아지고 화창하게 갠 아침이었다. 이른 오전부터 들이닥친 손님들로 인해 태리는 그들과 함께 1층에서 아침 식사를 하게 되었다.
남자 둘, 여자 둘. 넷이서 오붓하고 살벌한 아침상이었다.
구운 빵에 버터를 바르며 태리는 자신을 둘러싸고 앉은 이들을 폭풍 전야 앞의 촛불처럼 노심초사하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 다 모였을까.
오크의 발가락으로 요리를 해도 이것보단 나을 거라고 악담을 퍼부으면서도 호텔에서 매 끼니를 챙겨 먹는 게 일상인 하이엘프, 자고 갈 때면 언제나 조식이 포함된 방으로 예약을 하는 성기사, 그리고 이제 막 도착해서는 비를 쫄딱 맞은 생쥐 꼴로 샐러드를 우적우적 씹어 넣고 있는 찻집 주인.
“그래서 무슨 일이라고?”
빈 잔에 김이 오르는 커피를 채워 넣어 주며 물었더니, 먹기에만 열중했던 브리짓의 눈이 쓰윽 올라왔다. 어금니에서 양상추 씹는 소리가 까득까득 울렸다.
“집을 잃었어. 신시가지 깍쟁이 새끼들이 고용한 폭도들에 의해 내 찻집이 완전히 반파가 됐다고! 돌 세례를 맞아서 유리창이 다 깨졌는데 어젯밤에 비까지 왔잖아. 물 빼는 데만 해도 며칠은 걸릴 텐데 가구까지도 전부 다 버렸단 말이야!”
“어이, 그거 네가 먼저 우물에 독을 풀다가 걸려서 그런 거란 얘기가 있던데. 선방을 쳤으면 맞아야지.”
깐족대며 진실을 알리는 이즈에게 브리짓의 서슬 퍼런 눈깔이 날아갔다.
“닥쳐! 여긴 우리 땅이야! 우리 땅에서 내가 내 맘대로 우물에 독을 풀든 지랄을 하든!”
뜨거운 커피를 벌컥대며 들이켜는데도 뜨거운 줄을 모르는 걸 보니, 속이 어지간히 불타는 것 같았다.
다시 빈 잔을 채워 주며 태리가 의자 옆에 내려져 있는 짐 가방을 눈짓했다. 안 그래도 이른 아침부터 저렇게 큰 트렁크를 씩씩거리며 짊어지고 왔길래 무슨 일인가 했다.
“그럼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야겠네.”
“어, 며칠만 신세 질 거야. 근데 얘네는 표정이 왜 그래?”
“하아. 독방구를 며칠씩이나 봐야 된다니.”
“너 꼭 여기서 지내야 되냐?”
“뭐야. 호텔이 네놈들 거라도 돼? 나 꼴 보기 싫으면 네들이 여기 안 오면 될 거 아니야. 당장 갈 데도 없는데 그럼 어떡하라고. 수리만 대충 하면 가지 말라고 해도 알아서 나갈 거니까 걱정 마. 그놈들, 내 찻집을 망가뜨려서 날 신시가지에서 쫓아내고 싶은 모양인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 알 박기를 해 줘야지.”]
귀족들을 향해 복수를 다짐하는 브리짓을 보며 태리는 말없이 쓴 커피를 머금었다. 이건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니다. 힘겨루기도 정도껏 하다가 말겠지 싶었는데 너무들 싸우고 있었다. 클로드도 비슷하게 느꼈는지 진지해진 목소리로 얘기했다.
“누구의 소행인지 조사하고 처벌을 내리도록 조치해 주겠다.”
“됐어.”
그건 필요 없다기보단 너에게 내가 그런 빚을 질 것 같냐는 말투였다. 역시나. 토마토를 포크로 콱 찍은 브리짓의 원색적인 비난이 클로드를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모든 원흉이 지금 눈앞에 있는 무슨 조사람. 이건 다 네 탓이야. 이 도둑놈 같은 자식. 정말 이자리스에 있는 건 뭐든 다 훔쳐 갈 셈이야?”
국경을 타고 넘어와선 멋대로 남의 땅을 훔치더니, 이젠 그 땅의 하나뿐인 공주마저도 훔쳐 가려고 하는 놈이다. 이러다간 이 지독한 도둑놈의 손에 이자리스가 탈탈 털려서 알거지가 될 성싶었다.
“고작해야 기사 주제에 마법사를, 아니, 우리 공주님을 차지하려고 해?!”
겁도 없이 부푼 네놈의 간을 이 자리에서 썰어 주겠다고 포크와 나이프를 든 채 갖은 패악과 힐난을 일삼는 브리짓을 태리가 서둘러 막아 냈다.
실상은 그녀가 협박하다시피 해서 얻어 낸 계약일 뿐인데 욕이란 욕은 클로드 혼자 먹고 있으니. 이래서야 그를 볼 낯이 없다.
“브리, 그게 아니야. 이건 나와 제국의 황제, 그리고 이 사람까지 서로 다 충분히 논의하고 합의한 일이야. 훔쳐 간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히려 얻어 갈 게 있는 일이라고.”
그녀는 이성적으로, 현실적으로, 어른의 사정을 들어서 흥분한 브리짓을 차분히 설득해 나갔다. 클로드야말로 살아 있는 자신의 방패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이며 이 밖이 아무리 무법지대 같아도 호텔만큼은 절대적인 안전지대인 이유 같은 것들을.
“협력하는 게 더 이득이라고 판단했고 그렇게 해서 맺어진 거야. 나라와 나라 간의 일에 감정적으로 굴지 마. 그냥…… 흔한 거야. 흔한 정략결혼 같은 거라고.”
“치, 말만 그럴듯하지. 그래 봤자 어차피 넌 맨날 저놈 편이었잖아.”
그러나 별 효과가 없었던 건지 아니면 반박할 수 없도록 조목조목 설명한 게 더 속상했던 건지 토라진 브리짓이 식탁을 밀치고 일어나 버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리는 게 단단히 삐친 것 같아서 따라 일어서려는데 이즈가 가로막듯이 끼어들었다.
“그 말은 정략이 흔하다는 거냐. 아니면 결혼이 흔하다는 거냐?”
무감각하게 들리지만 입가에 조소가 짙다. 말속에 뼈도 있었다. 단순 투정에 불과했던 브리짓의 것보다 더 날카로워서 클로드도 비슷하게 날 선 눈으로 노려보았다.
“보통 공주가 결혼하면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가 흔하긴 한데. 정략은 또 모르겠네.”
“내가 말한 뜻은.”
“너 얘 좋아해?”
이즈는 나이프를 든 채로 클로드를 똑바로 가리킨다. 내려놓고 말할 수 있는데도 꽉 쥐고 겨냥한 건 다분히 의도적으로 느껴졌다.
좋아해? 그건 이즈가 클로드에게는 자주 물었던 질문이지만 태리에게는 단 한 번도 던진 적이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질문을 내어놓자마자 그는 그녀가 뭐라고 얘기하기도 전에 바로 거둬들였다.
“아니다. 됐다. 대답하지 마.”
조금만 기다렸다면 필시 무언가를 답했을 것이다. 저 공주는 누굴 상처 주는 걸 즐기진 않아도 회피하는 성격은 아니란 걸 아니까. 그리고 들었으면 좀 화가 났을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솔직한 공주는 녀석을 좋아한다고 했을 것 같았다.
“왜, 듣지.”
햄 조각을 썰어서 입 안으로 가져가는 기사 놈은 ‘어떻게, 내 마음이라도 대신 말해 줘?’ 하는 승리자의 못된 미소로 화를 돋운다.
저 열받는 새끼. 이즈는 본인이 여전히 나이프를 놓지 않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그 앞으로 손을 거들먹거렸다.
“입 다물어. 내가 오늘만큼은 이 식탁을 뒤집어엎고 싶진 않거든. 맛이란 게 뭔지 모르는 주방장이 오랜만에 정상에 가깝게 차려 놓은 식사잖아. 이럴 때 많이 먹여 둬야 돼. 무슨 소린지 알 거라고 생각한다.”
다른 식당에 가면 보통에 그치는 수준이지만 이 호텔에서 이 정도면 그의 기준에선 수준급이다. 그러니 맛이란 게 있을 때 든든히 먹여 둬야 했다. 그가 아니라 이 공주 말이다. 저 마른 어깨가 제발 좀 토실토실하게 살찌길 바랐다.
총독 녀석은 당연히 알아들었다. 그가 공주의 커피 잔을 치우고 유리컵을 가져와 우유를 따라 넣는 것을 보았다.
명확히 설명할 순 없는데 어쩐지 뭔가를 빼앗긴 기분이 들어서 이즈는 아직 칼질 한 번 하지 않은 소시지를 태리의 접시 위로 통째로 넘겼다.
고기 킬러의 고기 양보에 태리는 놀라서 우유를 마시던 도중에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왜…… 난 내 거 다 먹었어.”
“그럼 또 먹으면 될 거 아냐.”
“너 고기 좋아하잖아.”
“내가 고기만 좋아하는 줄 아냐. 고기보다 더 좋아하는 것도 있거든?”
고기보다 너를 좀 더 좋아한다고 그런 멋대가리 없는 설명을 꼭 해 줘야 하나.
클로드가 앞에서 거의 죽일 듯이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그런 와중에도 태리가 도로 소시지를 넘겨주려고 해서 그는 이씨, 신경질을 부리며 그녀의 손목을 제자리에 꽉 붙들었다.
“고기보다 너 살찌는 게 더 좋으니까. 그냥 먹어.”
이까짓 고기 같은 게 지금 비할 바가 되겠냐고. 그런데도 이게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낯간지럽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아오, 꼴사나워! 쪽팔리고 간지러워서 죽을 자리가 있다면 바로 여기일 거라고 속으로 얼굴을 박박 긁으면서도 이즈는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다 했다.
“나한테도 뭔가를 양보해도 되는 사람이란 게 있어. 받고 기뻐해 줬으면 하는 상대가 있다고. 내가 배불러서 주는 줄 알아?”
하지만 공주는 손대지 않고 도리어 포크를 내려놓으며 미안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그락거렸다. 그가 방금 전, 듣기도 전에 취소해 버린 그 대답이었다.
“저기. 난 약혼했어.”
그 공손함에, 그 정갈한 선 긋기에, 여지도 주지 않는 거절에 하마터면 마음을 베일 뻔했다.
너무하네. 너무해. 그런 곡소리가 절로 나왔다.
난 방금 너한테 막 뭔가를 줬을 뿐이었다. 이제 막 시작했단 말이다.
“내가 몰라서 이러는 것 같냐. 나도 아니까 대답하지 말라고 했잖아.”
“미안해.”
“됐어. 먹기 싫으면 버리든가.”
대놓고 상처받았다고 티를 내자, 더 어쩔 줄 몰라 하기에 딱 한마디를 더 했다. 먹기 싫으면 차라리 버리든가 하라고. 도로 돌려주지 말고.
망설이던 태리가 포크로 조심스럽게 긴 소시지의 끝을 잘라 냈을 때였다.
별안간 바람이 시원하게 몰아치더니 양옆으로 개방된 로비 입구에서부터 식당을 향해 기사들이 허둥지둥 달려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호텔 주변을 지키며 경비를 서는 기사들이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뒤에는 그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뛰어오는 기사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절박해 보이는 남자들은 성기사와 똑같은 성스러운 문장을 목깃에 달았으나, 기사보다는 옷차림이 간결하고 떠돌이 용병보다는 통일성을 갖춘 인상착의를 두르고 있었다.
“결사단?”
단번에 그 정체를 알아본 클로드가 중얼거리며 일어서자 세상 끝에서 겨우 찾은 구호의 빛인 것처럼 남자들이 울부짖으며 달려와 그의 다리 밑에서 무너졌다.
“단장님!”
“뭐냐. 어째서 너희들만 왔나.”
“저희가 당했습니다!”
“당해?”
쾌청한 날씨와는 대조적인 그을린 소매와 바짓단이 유독 눈에 띈다. 현장의 처참함을 드러내듯 엉망으로 찢어지고 구른 듯한 그들의 옷차림에서 태리는 남자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짐작했다.
이들은 숲을 건너왔다. 저 검은숲을.
검은숲을 지나는 사람들은 누구든 그곳을 빠져나오면 한두 가지씩 소식을 가져온다. 그곳에서 겪은 일이 너무나도 비상식적이고 황당하고 경악스러워서 아무리 과묵한 사람이라도 일단 그곳을 지나오면 누구라도 붙잡고 숨 가쁘게 떠들 수밖에 없다.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숨이 끊어질 것처럼 무언가를 전하고 있었다.
그것이 길조인지, 흉조인지는 아직 몰랐지만.
“분명히 두 분대로 나누어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앞서서 길을 살피고 그 뒤에 성하께서 계셨는데…… 그런데…….”
혼이 절반쯤 나간 것처럼 제대로 말을 잇지를 못하는 남자의 멱살을 클로드가 강하게 쥐어 올렸다.
“제대로 말해라. 성하는 어떻게 됐나.”
“뒤, 뒤, 뒤에 있던 분대 전체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
“죄송합니다, 단장님. 어떡하면 좋습니까……. 서, 서, 성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미리엘이 사라졌다. 너무도 끔찍한 흉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