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 (135/186)


 

135

아니, 그것보다 칙서가 출발하기도 전에 떠났다고? 어떻게 된 일이냐 묻는 태리에게 클로드는 골치가 팍팍 썩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뻔하지 않습니까. 가출 비슷한 거겠죠. 저와는 다른 의미지만 형도 평생을 교단에 묶여 살았으니 그 인간의 엉덩이가 얌전히 있었을 리 없습니다. 원래도 가출할 능력은 충분했는데 건수가 없어서 못 한 거고, 지금은 이자리스로의 외출이라는 좋은 건수가 있으니 웬 횡재냐 싶어서 날랐겠죠.”

“성실해 보였는데…….”

“잘못 본 겁니다.”

혈육에 대한 가차 없는 평가였다. 태리는 나들이에 신이 나서 전매특허인 눈웃음을 방싯거리고 있을 고귀한 성직자를 떠올려 보았고 그게 또 너무 잘 어울려서 한숨을 쉬었다. 그럼에도 클로드는 너무 염려는 말라고 다독였다.

“딴 길로 새지는 않았을 겁니다. 결사단이 호위하고 있을 테니 위험한 것도 아니고요.”

클로드의 신성 기사단이 양지에서 활동하는 교단의 얼굴마담이라면, 결사단은 교단의 수장인 성하의 그림자에 숨어서 그를 보호하는 친위대였다. 덩치 큰 교단이니 당연히 있을 만한 집단이었다.

“결사단은 제 기사단보다 훨씬 더 은밀하고 빠릅니다. 사람 하나당 말을 세 마리씩 끌고 다니거든요.”

“우와, 엄청 부유한 부대네요.”

그러나 태리의 귀에는 그렇게 들릴 뿐이다. 이곳에서 말은 아주 비쌌다. 전투에 쓰이는 길들여진 전마는 정말로 비싸다.

그리고 또.

“그렇게 가출까지 해서 나와야 할 정도였다면 폐하의 설득이 반만 먹혔나 봐요.”

무려 교단의 성하가 이동하는 데에 음지의 그림자 부대가 동원되었다는 것은 많은 군사를 이자리스로 배치하는 데에 난관이 있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제국에는 근위대도 있고, 수도방위군도 있고 보낼 병사가 쌔고 쌨다. 그런데도 미리엘은 가출하듯이 홀로 나와 이동했다.

황제가 신하들의 동의를 얻어 정식 군사를 보낼 때까지 기다렸다간 한 세월이 가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알아차린 것이다.

“그 부분까진 말 안 했는데.”

“말 안 해 줘도 결국엔 알았을 텐데. 괜찮아요, 큰 기대는 안 했으니까.”

당장에 미리엘이 와 주는 것만도 어디인가. 천 명의 정예 병사보다 그 한 명이 더 귀했다.

클로드는 태리의 통찰력에 감탄하면서도 어쨌거나 지금 당장 중요한 건 이것이었는지 완전한 확답을 요구해 왔다.

“그럼 나 자도 가도 되는 겁니까?”

으이그, 정말. 맘대로 하라고 태리는 이번엔 아예 팔꿈치로 세게 밀어 버렸다. 밀려나도 좋은지. 클로드의 입가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 * *

밤이라서 어두운데 비까지 와서 다행이다. 클로드는 발코니의 난간을 넘어가며 발소리를 잡아먹어 주는 빗소리에 감사했다.

구시가지의 유일한 호텔인 이 건물은 세 개의 스위트룸이 있는 2층이 로얄층이다.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 해도 아무나 머물 수 없고, 공주가 돌아온 뒤로는 오직 공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용 층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공주의 약혼자임에도 그를 경계하는 호텔 직원들에 의해 언제나 그곳과는 한참이나 먼 꼭대기 층으로 방을 배정받곤 했다.

하지만 뇌 근육만을 쓰는 마법사들이 보통 그러하듯 호텔 직원들은 몸이 건장한 기사라면 세 층 정도 되는 높이쯤은 벽을 타고 충분히 오르내릴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클로드는 가볍게, 정말 가볍게 툭툭 벽을 차고 내려와 단숨에 221호의 창가로 떨어져 내렸다. 빗물이 튀는 침실 쪽의 창문을 손바닥으로 쓱쓱 문지르자 침대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태리의 옆모습이 보였다.

늦게까지 일을 하다가 곯아떨어졌는지 침대 옆에 붙어 있는 협탁에는 등불이 켜져 있는 채였다. 침실 쪽의 창문을 그녀가 잘 잠그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밖에서부터 우비를 벗고, 신속하지만 조용하게 그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살금살금 걸어서 불이 켜진 등을 끄고, 태리가 발로 찬 이불을 다시 턱 끝까지 덮어 주었다.

‘예쁘다.’

이 세상에 있는 남자 여자를 다 합친 그중에서 제일 예쁘다. 발등에 턱을 얹는 강아지처럼 침대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잠든 모습을 구경하며 웃던 그는 한참 후에나 부리나케 정신을 차렸다.

왜냐.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으니까. 빨리 해치우고 나가야 한다. 헤프게 풀어지려는 입가를 단단히 고정시킨 그는 소리를 죽여 돌아선 뒤 정확하게 중앙에 있는 탁상에서 도자기 꽃병을 들었다.

모양을 잘 살려 말린 해바라기 한 다발이 꽂혀 있었는데, 해체라도 하듯이 꽃대를 전부 밖으로 빼 버린 뒤 꽃병을 거꾸로 뒤집어서 탈탈 털듯이 흔들었다.

마른 꽃이 담겨 있어서 한 방울의 물도 들어가 있지 않았던 병은 그가 흔드는 대로 덜그럭거리는 감각을 전하더니, 놀랍게도 4등분으로 접혀 있는 종이를 금세 토해 냈다.

‘찾았다.’

드디어 찾았다. 역시 여기에 있었구나.

흐릿한 달빛에 ‘계약서’라는 세 글자가 보인다. 정신 나간 실수의 잔재임을 증명하듯 종이는 한 유명 와인 바의 달력을 찢어서 그 뒷장에 내용을 적고 서명을 휘갈겼을 만큼 사소한 성의조차도 없었다.

계약서

첫째, 숲을 청소하는 데에 전력을 다할 것.

둘째, 드래곤을 사냥에 무슨 일이 있어도 동참할 것.

셋째, 이자리스를 정상으로 복귀시킬 것. 위의 세 가지를 모두 완료할 시 태리 소네티 본인은 이자리스의 왕위를 클로드 데본셔에게 양도하도록 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