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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최종 보스였던 드래곤과의 싸움에 대해 기억이 떠오르는 대로 적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비록 백 번 싸워서 백 번 다 졌지만 패배도 역시 귀중한 경험으로 써먹어야 했다.
‘곧 미리엘이 도착할 거야.’
준비하라는 황제의 칙서를 미리 받았다.
약혼 승인에 교단의 성하라는 지원군까지. 큰 건이 두 개나 얽혀 있어서 적어도 몇 개월은 걸릴 거라 예상했던 일이 두 달 반가량으로 줄어들었다.
일정이 이만큼이나 단축되기까지 이오리아가 꼬장꼬장한 신하들을 상대로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지가 짐작이 갔다.
어렵게 생긴 기회이니 허투루 날릴 수는 없었다. 뭐라도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한다.
태리가 끙, 하고 잉크병에 깃펜을 담그자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자그마한 티스푼이 입 앞으로 다가왔다. 그것을 받아먹고 놓자 클로드가 빈 유리그릇을 흔들어 보였다.
“이제 끝.”
“벌써?”
몇 번 안 먹은 것 같은데.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클로드의 손에서 빈 그릇을 뺏어서 남아 있는 찌꺼기를 야무지게 긁어모아 진짜 마지막 한 입을 앙 하고 입에 물었다.
옆에서 팔에 얼굴을 괴고 그 모습을 응시하던 클로드는 눈이 마주치자, 입술 사이에 물려 있던 작은 숟가락을 휙 빼서 던져 버리더니 그 자리에 곧장 제 입술을 밀어 넣었다.
얼린 복숭아의 달고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는 자리에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진다. 그 자리를 음미하듯이 혀로 쓸던 남자는 고개를 꺾고 더 깊이 들어와서 차갑게 식은 입 속을 부드럽게 데워 갔다.
턱을 받치고 있던 커다란 손이 뺨과 귀를 부드럽게 쓸고 올라가 뒷머리로 파고든다. 제게로 더 강하게 당기고자 하는 열망이 손 마디마디에까지 모조리 느껴졌다.
이따끔 억누르듯 거칠게 흘러나오는 신음에는 목덜미마저 달아올라서 얼굴이 후끈후끈했다.
촉촉한 마찰음을 내며 그가 떨어져 나갔을 땐 이마를 마주 댄 채로 코끝이 비벼지는 거리에서 마주 보고 있는 상태였다.
보는 눈빛이 지나치게 나른하고 관능적이라 부끄럼을 타는 얼굴을 숨길 수가 없다.
숨소리만 난잡하게 오르내리고 세상은 고요해지는 기분이었다. 밖에선 어느새 굵게 변한 빗줄기가 세차게 유리창을 두드리는데도 시끄러운 줄 모르겠다.
또 다 잊히기도 했다. 뭘 하고 있었는지, 내가 왜 여기로 왔는지, 돌아가려고 했던 건지 아닌 건지조차. 그저 설레는 감정들만 남았다.
“저렇게 아무 데나 던지면 어떡해.”
“내가 주워 올게.”
“안시가 뭐라고 할 거야.”
“내가 대신 혼날게.”
부끄러워서 아무 말이나 하는 말에 일일이 정성스럽게 답변하는 클로드의 눈 밑도 열기로 가득했다.
귓가에 닿는 소곤거림이 간지러워서, 제게 향하는 부끄러운 시선이 귀여워서, 맑은 목덜미가 탐스러워서…… 그녀의 온갖 것들로 인해 그의 속은 이미 뜨거워진 지가 한참이다.
사랑스러운 색으로 물든 저 뺨에 입을 대고 식히고 싶었다.
얼마 참지도 못하고 홍조가 어린 살결에 달궈진 입술을 비비며, 그는 한 팔로 그녀의 몸 전체를 감싸 안았다.
그에게 꼭 맞춘 듯한 몸이 품속으로 빨려들어 왔다. 동그란 어깨와 부드럽게 눌리는 가슴이 제게 닿는 걸 느낄 때마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기쁨에 대해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누리고 있는 자신이 아주 행복하다는 사실도.
이대로 평생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루 온종일 매달려 결혼해 달라는 말만 종알대고도 싶었지만 기사답게, 신사답게 충동을 꾹 참곤 오늘도 잘 준비해 온 말을 대신 꺼냈다.
“오늘 자고 가도 됩니까?”
“……또요?”
여러 번이나 겪은 일을 또다시 맞닥뜨리는 의문스러움이 태리의 눈가로 번진다.
영락없이 ‘재워 줘’라고 조르는 듯한 클로드의 행동이 요즘 들어 상당히 잦아지고 있었으니까.
기회를 엿보다가 틈만 보이면 바로 자고 가겠다고 버티는 것 같은데, 물론 숙박업을 하는 곳이고 그가 같은 방에서 자겠다고 음흉을 떠는 것도 아니니 문제가 되는 건 아니긴 했다.
거기에다가 그가 이곳에 와 있으면 소란스러운 자들이 근처에 얼씬도 못 하기 때문에, 그가 머무는 날에는 조용하게 쉴 수 있어서 좋다며 안시도 애써서 쫓아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뭔가가 이상한걸.
요리조리 고개를 갸웃대며 관찰해 보지만 자기가 새신랑인 줄 알고 사는 약혼자의 얼굴은 그저 싱글벙글할 뿐이었다.
여기 있는 게 그렇게 좋은가. 물론 같이 있으면 그녀도 좋기는 했다.
그녀가 손을 꼬물거리며 망설이고 있다는 걸 알자 클로드는 얼른 가여운 척을 했다.
“밖에 비도 오고.”
“우산 없어요?”
“엄청 늦었는데.”
“지금 8시…….”
“제 방이 아주 엉망입니다.”
그럼 치우면 되지 않나. 치우고 자면 될 것이다. 하지만 머리와 따로 노는 고개는 이미 끄덕거리며 남자의 엉터리 수법에 항복했다.
그게 예쁜지 등을 쓸어 만지느라 잠시 내려갔던 팔이 다시금 머리를 감싸 안아 당기며, 그가 잔머리를 걷어 내고 그녀의 관자놀이에 쪼는 듯한 가벼운 키스를 여러 번 해 주었다.
거부할 수 없는 접촉들이 귓불과 목덜미, 턱 끝에서 맴돌다가 다시 슬그머니 제 입술로 기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태리는 눈을 감았다. 동시에 이 남자를 이곳에서 재우는 날이 늘어 갈수록 생겨나는 곤란함들도 떠올랐다.
제집처럼 드나들면서 그는 호텔의 어디든 편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숙박하는 손님들을 빼면 온 천지에 그를 죽이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렸던 마법사들로 득실득실한 공간임에도 무방비하게 웃고 떠들다가 태연하게 잠을 잔다. 뿐만 아니라 근처에서 맴도는 게 자연스러워지면서 그녀의 생활 반경 안으로 침입하는 경우도 빈번해졌다.
지금도 언제 왔는지 모르게 옆에 앉아 있지 않았나. 곁에 앉아서 뭘 열심히 떠먹이고, 끌어안고 입 맞추더니, 지금은 자신이 헝클어뜨린 머리를 정성스레 빗질해 주고 있었다.
‘거기에 빗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지?’
심지어 그는 이제 그녀의 방 안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조차도 전부 익히고 있기까지 했다.
검술로 단련된 강인한 팔에 들려 있는 저 작은 은빗이 좀 웃긴데, 정작 하는 사람은 진지하고 열심이니 그만두라는 소리도 못 한다. 살짝 엉킨 부분에서 그녀의 고개가 딸려 갈 때면 얼굴을 들여다보며 ‘아파? 아팠어?’ 하고 물어보는 것도 웃겼다.
아니, 상식적으로 그 정도로 아프겠냐고.
하지만 그는 정말 자신을 공주님 다루듯이 하고 있었다.
물론 공주가 맞긴 했지만.
이대로 맡겨 두면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만들어서 언제 나갈지 몰랐기에 태리는 큰마음을 먹고 자꾸만 들러붙으려는 클로드의 가슴을 밀어 냈다.
미는 순간에도 손바닥에 느껴지는 단단한 근골이 지나간 열정을 되새기게 해 심장이 두근거렸다. 역시 빨리 내보내야 한다.
냉정하게 손안에 든 빗도 빼앗자 그는 귀가 축 늘어진 강아지처럼 순식간에 우울한 눈이 되었다.
“나 쫓아내려고.”
“졸려서 잘 거예요.”
“자는 것까지만 보고 가면 안 됩니까.”
“이보세요, 기사님. 떼쓰지 말고 얼른 가요. 웬만하면 여기 말고 공관으로 돌아가서 자면 더 어른스럽겠고요.”
표현하진 않았지만 태리는 은근히 사람들의 눈을 신경 쓰고 있었다. 호텔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그녀도 다 알고 있었으니까. 제국의 의사당에서 그를 달라고 요구한 순간부터 각오는 했지만 현실은 그보다 더 버거웠다.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다, 우리 둘의 관계 같은 건.
헤어지면 평화로운데 맺어지려고 하니 온갖 풍파를 다 일으킨다.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좋으면서도 마음 편히 누리지는 못하는 이유였다. 한 번이라도 더 입맞춤을 받고 싶었지만 달콤함 뒤에는 쓴맛도 있었다.
“가요, 얼른.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졌잖아요. 제드 경이 혼자서 도맡아 하느라 힘들어하는 거 알아요.”
“아, 그거.”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클로드도 금방 눈치챘다.
“내일 오전 중으로 폐하의 칙서를 공개하라고 했으니 당장은 소란스러워도 곧 잠잠해질 겁니다.”
두 사람의 약혼에 대한 황제의 분명한 동의가 담겨 있는 그 칙서는 일종의 교통 정리 카드 같은 거였다. 그거 하나면 일단 와글대는 신시가지의 귀족들의 입은 다물게 할 수 있었다. 이쪽으로 최종 결론이 났으니까 더는 왈가왈부하지 마, 라는.
“완전히 잠재울 수는 없겠지만 눈치들은 볼 겁니다. 그 정도면 제가 정리할 수 있습니다.”
나불거리는 인간들의 주둥이를 반드시 꿰매 주겠다는 각오가 불탄다. 그동안 내색하지 않고 쌓아 놓은 원한이 많았는지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는 음성이 서리처럼 싸늘해졌다.
“내가 내 아내 고르겠다는데 자기들이 뭔데 참견입니까. 솔직히 일렬로 세워 놓고 머리통 한 대씩 쥐어박아도 시원찮은데 더 큰 소란 만들기 싫어서 그동안 참아 준 겁니다.”
죽어도 결혼하기 싫은 여자는 세상천지에 널렸고, 죽어서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지금 눈앞에 하나밖에 없는데 남들이 나서서 그걸 찬성하고 반대할 때마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기분인지는 당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클로드는 그딴 인간들의 헛소리가 떠오를 때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베개를 주먹으로 터트릴 만큼 분통이 터졌다.
그 미친 것들이 남의 인생을 망치려고 작당들을 했나.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지금!
반면에 분노의 화풀이 중에 자연스럽게 돋아난 아내라는 말에 태리의 볼은 연하게 물들었다. 언젠가 헤어진다는 단서 같은 건 그의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진 것 같았다. 아니면 외면하고 있거나.
태리도 그런 말 같은 건 좀체 꺼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확실히 총독이 그랬다더라 하는 말보단 황제가 그랬다더라 하는 말이 더 무섭긴 하겠네요. 그런데 이렇게 빨리 공개하나요? 성하께서 도착하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요, 형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신속하게 도착할 겁니다.”
“얼마나요?”
“칙서가 출발하기도 전에 떠났을 테니 정말 빠르면 내일 오전. 그보다 늦어져도 모레쯤은 와서 손을 흔들겠죠.”
“……그건 빠른 게 아니라 거의 날아오는 수준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