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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을 만남은 더 미적거리는 법 없이 그 길로 빠르게 각자의 길로 흩어지기로 했다.
지금 헤어지면 언제 또 만나느냐고 매달리는 형과 인상을 박박 쓰며 버티는 동생 간의 우여곡절이 벌어지는 옆으로 이오리아가 가볍게 태리의 팔을 안으며 말했다.
“다시 보게 될 날을 기다리오, 공주. 해낸다 장담했으니 이 다음이 없으리라곤 생각도 하지 않겠소.”
돌아서서 마주 안았을 때 태리의 손바닥이 황제의 등 쪽 어깨뼈에 살며시 얹어졌다. 두껍고 화려한 옷 속에 가려져 있던 윤곽은 실제로는 무척이나 야위고 말라서 태리는 ‘물론이에요.’라고 쉽게 대답하려던 거짓말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그때가 되면 난 이곳 어디에도 없을 텐데.
자신을 통해 그녀가 얼핏 실리안을 추억하고 있었단 걸 느꼈기에 그 말을 도저히 할 자신이 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당신의 또 하나의 추억이 사라질 거라는 얘기. 비쩍 마른 등뼈만큼이나 그녀가 가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사라져 버릴 것 대신 남겨 줄 수 있는 것. 반드시 내가 지킬 수 있는 것. 태리는 그것을 대신으로 삼아 화답했다.
“전 약속을 지킬 거예요. 클로드에게 분명히 이자리스에 대한 권한이 생길 겁니다. 그때가 되면 깨끗해진 숲을 건너 언젠가 이자리스로 다시 오실 수도 있겠죠.”
그건 태리의 입장에선 게임의 엔딩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이오리아의 입장에선 약혼에 대한 조건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녀는 믿지 않는 건지 농담 말라는 식으로 입으로만 웃었다.
“같은 지배자로서 충고 하나 하자면 권력은 나누는 게 아니라오. 약혼자라고 해도 냉정해야지. 그냥 얼굴 좋고 몸 튼튼한 예쁜 왕비로 삼아서 데리고 사는 편이 나을걸.”
그랬으면 좋을까. 하지만 태리는 이오리아처럼 웃지 못하고 고개를 슬쩍 내려 우연처럼 시선을 회피했다.
그건 나름 괜찮게 마무리가 되어 가는 이 자리의 분위기보다 어두운 것이었고, 예민한 이오리아가 의아하게 들여다보려 하는 순간 등에 살짝 얹혀만 있었던 태리의 손바닥이 온전히 닿아 그녀를 껴안았다.
“조카는 돌려보내 드릴게요. 그것도 약속해요.”
“……!”
힘없는 목소리가 귀 밑을 스치는 가벼운 바람처럼 지나갔다.
무슨 말이냐고 묻거나 혹은 붙잡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놀라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오리아는 그대로 공주를 놓쳐 버렸다.
서두르라고 했던 명령에 의해 그녀는 작별 인사 후 곧장 떠났고, 그녀가 가면 더 있을 이유가 없는 클로드가 그다음으로 방을 나가고, 클로드가 나가면 역시나 머무를 이유가 없었던 미리엘이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사라졌다.
홀로 남아서 사방이 쥐 죽은 듯이 적막해지니 오히려 시끄러웠던 회의 내내 또랑또랑했던 공주의 음성이 귓가에 오래도록 남아서 맴돌았다.
도박이나 다름없는 도전을 하면서도 신탁이라 선언하며 전혀 흔들림이 없었던 모습들. 대체 무엇을 확신했기에 그리도 분명하고 겁이 없었던 건지. 꼭 가야 할 길이 정해진 것처럼.
불현듯 한 번도 가정해 보지 않았던 의문이 머릿속에서 일어섰다.
그녀에게 제 조카는 어딘가로 가기 위해 남겨 둬야 하는 존재인 건가?
* * *
발로란에서 이자리스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태리는 유난히 악몽을 많이 꾸었다.
한 사람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는 편지를 직접 손으로 만졌기 때문일 수도. 아니면 그냥 단순히 쉴 새 없이 몰려오는 일들과 빡빡한 일정에 몸이 피로해져서였을 수도 있다.
그냥 개꿈이야. 계속 잠만 자서 그래. 나도 내려서 좀 걸을까 봐.
걱정하는 클로드와 안시에게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눈만 감으면 속수무책으로 하품이 나고 잠에 빠지며, 같은 장면이 반복되는 수상한 꿈을 마차를 타고 달려오는 이틀 내내 꾸고 있다고 솔직하게 고백할 수가 없었으니까.
꿈속에서 그녀는 매번 가시덩굴과 이끼로 뒤덮인 마법사의 폐성으로 들어갔다. 살아 있는 것이라곤 하나 없는 으스스한 앞뜰의 장미원을 지나, 재앙이 지나간 그 시간에 그대로 정지되어 버린 왕성을 거닌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탑으로 통하는 문을 지났다.
탑 전체를 고스란히 사용하고 있는 그곳은 마법서가 천장 끝까지 닿아 있는 듯한 끔찍한 높이의 대서고였다. 고개를 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았다.
그러나 태리의 시선이 잡아먹힌 곳은 그보다 낮은 곳이었다.
대서고의 한가운데에 마치 무엇을 위한 제단처럼 넓고 정갈한 왕의 책상이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었다.
본래라면 성의 주인들이 대대로 물려받으며 그곳에 앉아 마법서를 읽고 지식을 쌓아 갔을 자리다. 하지만 그 위에 올라앉아 왕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역삼각형 모양의 감긴 눈이었다.
눈.
오직 눈뿐이었다. 그럼에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생명체로 각인된다. 고요히 내려앉은 눈꺼풀이 지금은 잠에 빠진 것 같기도 했다.
몇 발자국을 걸어 다가가자, 신비로운 발음의 낯선 소리가 들릴 듯 말 듯하다.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하지만 발이 더 나아가길 주저하는 것에서부터 자각할 수 있었다.
그 언어는 저주를 담고 있다는 것을. 오로지 파괴라는 일념만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길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염불처럼 외는 소리가 넘쳐흐른 잔의 물처럼 아래로 떨어져서 숲으로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지금…… 없앨 수 있나?’
발치에서 부서진 나뭇조각을 주워 들었다. 그 끝이 예리해서 던진다면 창처럼 눈 한가운데를 찌를 수 있을 것 같았으니.
하지만 그것은 아주 예민했고, 제 근처까지 다가와 있는 마법사의 존재를 깨달은 즉시 위아래로 눈꺼풀을 찢어 벌려 감긴 눈을 번쩍하고 떴다.
‘……!’
태리는 재빨리 책장 뒤로 숨었지만 그것은 이글거리는 눈알을 사방으로 굴려 가며 그녀를 찾았다. 책장 뒤에서 달달 떨고 있는 치맛자락을 발견한 그것이 먹잇감을 삼키려는 것처럼 눈구멍을 최대로 팽창시켰을 때였다.
갑자기 머리 위로 풍랑 같은 거대한 바람이 일었다. 바람에 휩쓸린 옷자락이 더 많이 책장 밖으로 노출됐지만 그것으로부터 태리가 해를 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디선가 활강해서 날아온 드래곤이 크기를 키운 역삼각형의 눈동자를 자신의 날개로 감싸서 막았기 때문이다.
태리는 비명이 터지는 입을 두 손으로 막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날개 속으로 눈동자를 꽁꽁 싸맨 드래곤의 몸에 비늘이 벗겨지고 긁혀 가며 상처가 났다. 그렇게 수년 동안 쌓여 온 비슷한 상처들로 인해 드래곤의 온몸은 흉터 천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족했다.
그 대단한 존재가 그것의 몸부림을 가로막아도, 상처투성이가 되도록 날개로 힘껏 감싸 안아도 간신히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곧 그마저도 감당하지 못하는 순간이 머지않았다.
태리는 책장 뒤에서 기어 나와 피가 흐르는 날개로 손을 뻗었다.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막 생겨난 생채기의 우둘투둘함과 고여 드는 피의 온기가 느껴졌다.
‘빌.’
거대한 블랙 드래곤의 모습임에도 그것이 빌인 줄 알았듯이 빌 역시 꿈속의 그녀를 알아보는 것처럼 목을 돌려 쳐다보았다.
그런데 보고 있는 것이 그녀가 아닌, 그녀를 통한 다른 누군가인 듯 쓰다듬는 손길을 밀어 내며 고집을 부리듯이 날개 안으로 머리를 움츠리며 피했다.
“시, 싫어. 아무리 그래도 난 그만두지 않을 거야……. 나도 내가 정말 잘못하고 있다는 거 알아. 나만 포기하면 된다는 것도 알아. 그렇지만…… 싫어. 못해. 그러면 널 영영 잊어버리게 된단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가 하는 변명을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는 태리는 찢어지고 상처 입은 날개만을 연신 안타깝게 쓰다듬었다. 너를 어떻게 하면 좋으니. 가엽고 불쌍한 너를. 그러면 빌은 더욱 구슬프게 울며 눈물을 쏟아 냈다.
“나도 알아……. 나도, 나도 다 안단 말이야. 나도 알아…….”
그렇게 한참을 다독이고 나면 드래곤의 붉은 눈동자에서부터 불씨를 닮은 눈물이 투둑 떨어져 태리의 손등에 화상을 입혔다.
으윽. 살이 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와 신음을 참는다. 더불어 그녀는 이제 곧 자신이 이 꿈에서부터 깨어날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아, 하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매끈한 손등을 확인하며 그녀는 마차 안의 더운 공기를 급하게 들이마셨다.
매번 이 시점에서 정신이 들었고 눈을 감으면 기어코 다시 같은 꿈의 첫 시작점으로 돌아가 되풀이된다. 버텨도 소용없었으나 그 지긋지긋한 악몽은 그녀가 이자리스에 도착한 순간 거짓말처럼 꼬리를 말고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 나니 이제 태리에게는 한 가지 의문만이 남게 되었다.
너는…… 뭘 안다는 거야?
* * *
공주와 기사의 약혼 소동에 대한 이야기가 이자리스에 전염병처럼 파다하게 퍼져 나가기 시작한 건 태리가 호텔로 돌아오고 나서도 몇 주가 더 지난, 가을의 문턱에서였다.
이야기의 근원지는 신시가지 사교계의 중심인 와인 바로, 저마다 수도에 둔 늦깎이 소식통을 통해 ‘약혼 파동 사건’에 대해 접했다.
야단이 날 만한 이야깃거리였으므로 소문은 소란 속에 금세 길 건너의 찻집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이러쿵저러쿵하는 옷을 덧씌워 입고 몸집을 불린 다음 커다란 갈등의 씨앗으로 자라났다.
공주를 편들든, 기사를 편들든 서로 자기 쪽이 훨씬 아깝다는 투로 맞섰기에 다툼은 양측 모두를 기분 나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잠잠했던 두 세력은 다시금 서로를 향해 날을 세웠고 서로에게 폭도이니, 침략자이니 하는 비난도 서슴없이 하다가 주먹다짐으로 변질되는 날도 더러 생겨났다.
마법사들은 성가신 마법을 부려 번번이 귀족들을 골렸고, 귀족들은 이자리스에 머무는 수많은 용병들을 고용해 폐허에 숨어 사는 그들에게 보복했다.
그렇게 며칠이나 뒹굴고 나니 여론은 그 누구에게도 좋지 못한 상태로 악화되어 있었다.
어느새 사람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공주와 기사의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할 테고, 갈라서는 일은 합쳐질 때보다 더 쉽고 빠르게 이루어질 거라고.
어디 한번 지켜보자고.
하지만 지켜보자는 그 말이 이런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면 그리 쉽게들 호언장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밖에서는 다들 편 갈라서 째려보고 싸우느라 난리인데 마법사 공주가 머무는 호텔만은 철갑을 두른 기사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 늘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가을비가 토독토독 떨어지기 시작하는 어느 밤, 호텔에서 제일 좋은 스위트룸 221호의 램프는 오늘도 늦게까지 밝혀져 있었다.
“자.”
“음.”
옆에서 클로드가 떠먹이는 얼린 복숭아 셔벗 한 입을 냠 받아먹고 태리는 넓은 종이 위에 깃펜을 열심히 끄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