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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끝난 지 이제 한 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안경이 없는 맨눈으로 그녀는 제일 먼저 벽에 걸린 시계부터 확인했다.
많은 여유가 있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서둘러야 한다. 한 시간이면 이미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소문은 발이 달리지 않아서 이 두 사람보다 훨씬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눈치챘겠지만 이 만남은 비공식적인 것이고 어느 한 군데에도 기록되지 않을 시간이오. 내가 이 자리에서 무엇을 약속한다 해도 그건 황명으로서의 효력을 가지지 않소.”
그러므로 지금부터의 이야기들은 전부 ‘조언’으로 낮춰 부르는 것이 적절할 터였다. 듣고 스스로 알아서 헤쳐 나가야 한다.
“두 사람은 이 길로 나가서 곧장 제국을 떠나도록 하시오. 오늘 일로 수도는 한바탕 쑥대밭이 될 거요. 가장 위험해지는 건 공주가 되겠지. 광신도들의 습격 정도는 어린애 장난같이 우스워질 정도로 신변을 장담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어. 그러니 소문이 완전히 퍼져 나가기 전에 사라지는 게 나을 거요.”
조언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비공식적인 명령에 더 가까웠다.
일국의 공주가 야반도주하듯 떠나야 하는 그림이라니. 불쾌해진 클로드가 거부하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태리는 그게 좋겠다고 선선히 동의했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나면 그다음은 내가 야단법석을 떨 귀족들에게 시달릴 운명이오. 쉽진 않겠지만 최대한 어르고 달래 보겠소.”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글쎄, 공주는 마법사이긴 하지만 귀여우니까 넘어가자고 해 볼까 하는데.”
“네……?”
“어차피 시키게 되는 결혼이라면 그래도 귀여운 공주가 제일 좋지 않느냐고도 우겨 볼 참이고.”
“그런 게 통할까요?”
“안 통하는 줄 알면 서둘러서 성과를 내 오면 될 일이오. 왜, 자신 있는 것 같더니?”
아까는 모두의 앞에서 클로드만 주면 망해 가는 세상이라도 알아서 척척 구해 올 것처럼 거들먹거리지 않았느냐. 하늘을 찌를 듯한 호방함을 보였으면 가서 구름이라도 쪼개 와야 한다. 말싸움은 끝났으니 이제부터 실전이라고 황제가 단단히 이르는 말에 태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뜩 기합이 넣었다.
“제가 반드시 해낼게요.”
“마음에 드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같은 애매모호한 표현을 쓰지 않고 반드시 해내겠다고 확실하게 말하는군. 공주라면 그렇게 분명한 태도를 가질 줄 알아야지. 믿어 보겠소. 그리고 클로드.”
“왜요.”
“이런 버릇없는 녀석. 네, 라고 대답하거라.”
“네, 왜요.”
“네게 내린 명령을 수정하마. 이 길로 떠나서 이자리스에 도착하면 그 순간부터 총독부의 기사단은 더는 침략군이 아니다.”
언제나 황제 앞에서는 사춘기 소년처럼 늘 토라져 있던 클로드는 난생처음 받아 보는 명령에 눈썹이 단번에 치켜 올라갔다. 그 말이 이제까지 들은 것 중에 제일 반가웠던 것처럼. 그와 그의 기사단이 어딘가에서 침략군이 아니었던 적이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그럼…… 허락하시는 겁니까? 저랑 공주님이랑……”
“내가 반대해도 어차피 네 마음대로 할 거였으면서.”
“그거야 그렇죠.”
“하지만 그래도 형식상의 애원 정도는 있는 게 좋겠다. 이래 봬도 난 황제고, 황실의 제일 높은 어른이자 결정권자나 다름없어. 그런데 한참이나 어린 조카 놈이 멋대로 구는 걸 봐줘야 한다니. 그건 부당하지. 그렇지 않니?”
“무슨 애원을……”
“꿇거라.”
“예?!”
“꿇고 여태껏 내 앞에서 삐뚤어지게 반항했던 것들 모두 죄송했다고 한마디라도 하거라.”
“뭘 잘못한 게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그럼 혹시 또 아니. 내가 귀족들을 대충 구워삶지 않고 앞뒤 양옆으로 고루고루 돌려 가며 구워삶는 데 성공할지. 그러면 이자리스에 더 풍부한 지원을 보낼 수도 있지.”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폐하.”
자긴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더니? 클로드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바닥에 꿇어 앉아 있었다. 그 무릎이 그렇게 가벼운 줄은 몰랐다. 거기에 철심을 박은 것처럼 언제나 꼿꼿하던 고개도 갈대처럼 픽 잘도 꺾였다.
“잘못한 만큼 그대로 있어 보든지.”
“그건 안 됩니다. 그러면 저더러 여기서 하루 종일 이러고 있으라는 뜻 아닙니까. 전 가야 됩니다. 바쁩니다.”
“너는 양심도…… 아니, 그렇다고 벌써 일어나?”
반성이나 좀 했는지 모르겠다. 좀 더 예의 바르게 있어도 될 텐데 녀석의 사죄는 시작만큼이나 끝도 짧고 굵었다.
뭐 하러 꿇었느냐는 날다람쥐 같은 재빠른 입 모양과 이만하면 싸게 먹혔다고 무릎을 시원스럽게 터는 동작을 이오리아는 번갈아 본다.
이놈들 꿀밤을 먹여도 시원찮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때맞춰 울린 노크 소리로 인해 자연스럽게 흐름이 끊겼다.
“아, 그래, 어서 들어오렴.”
나타난 인물은 흠 하나 없이 새하얗고 고귀한 예복을 갖춰 입고 등장한 미리엘이었다.
버릇없는 누군가와는 다르게 황제에게 미소 띤 얼굴로 완벽한 예의부터 갖추고 태리에게 그 다음으로 인사를 올린 뒤 클로드에게는 예뻐 죽겠다는 눈웃음을 솔솔 보낸 그는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두 사람이 먼저 가 있으면 여기 있는 미리엘을 최대한 빨리 그곳으로 보내 주도록 하마.”
“형을요?”
예상치도 못한 말이었다. 미리엘은 무늬만 성하인 사람이 아니었다. 제국의 최고위 신관. 권능에 가까운 막강한 신성력을 사용하는 성직자. 아군으로 합류해 준다면 전력은 차원이 달라질 게 분명했다.
“저주를 풀 수 있다는 것. 공주는 내게 그것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 주겠다고 했다. 또 반드시 해내겠다고 약속했고. 그러니 나는 나의 최선에 또 다른 이의 최선을 보태는 것뿐이야. 고마워할 것 없다. 미리엘이 스스로 자원한 거나 다를 바 없으니.”
“자원이요?”
그러니까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선 거라고?
솔직히 그 말이 가장 소스라치게 되는 부분이었다.
왜? 그쪽은 나를 싫어하잖아? 태리의 놀란 눈이 스치자 미리엘은 본인의 상징과도 같은 실웃음을 지었다.
“공주님의 부친께서 폐하께 편지로 도움을 요청했었다는 얘기를 저도 오늘 알게 되었거든요. 무엇에 쓰여야 했던 도움인지를 자세히 조사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아마도 성직자로서의 힘이 필요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폐하보단 제가 더 적합하지요.”
이미 한참이나 시기를 놓친 도움이고 가도 건질 게 없을 확률이 더 크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늦었더라도, 뒤늦게라도 가 보는 것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마무리가 될 때도 있을 거라고 그가 말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별것 아니라며 산뜻하게 고개를 까닥이며 말하지만 태리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너무 고마워서 의문이 들 정도다. 이렇게까지 해 준다고? 정말 기대도 못 했었다.
“절 싫어하시는 줄 알았어요.”
“저런, 공주님. 클로드가 훤히 듣고 있는데 제게 그런 모함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콧노래를 작게 흥흥거리며 기분이 좋아 보였던 미리엘은 그녀의 진솔함에 화들짝 경기를 일으키는 것처럼 반응했다. 실제로 클로드는 ‘공주님을 싫어했어? 그래?’ 하는 부릅뜬 눈이었고 미리엘은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무척이나 신경 쓰는 눈치였다.
“큼큼,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매콤한 맛으로 골라서 자극을 준 적은 있긴 하지. 하지만 그런 걸 클로드 앞에서 노출하는 건 정정당당하지 못하단 말이다.
게다가 태리가 가진 생각은 정말 오해였다. 그녀가 공작저에서 머물러 주는 동안 미리엘은 모처럼 행복한 때를 보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동생이 그녀로 인해 가족들 앞에서 보기 드물게 유치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까. 그러한 시간들이 가족에겐 몹시 귀중한 선물이 되었다.
믿지 못하겠지만 그의 동생은 인생의 대부분이 어른스러웠다. 먹은 나이보다 한참이나 더 무거운 책임감이 어깨에 있었으니 어리광을 부리는 행동 같은 건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같은 또래의 남자애들처럼 행동할 줄 몰랐고, 막내답게 굴 줄도 몰랐다.
원치 않게 빨리 성장해 버린 막내의 성숙함은 그렇게 가족들의 가슴 한 편을 늘 안타깝게 했었다. 차라리 말썽을 피우고 사고라고 쳐 봤으면 하고 바라던 적도 있었을 정도로.
“공주님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난리 피우는 막둥이가 어찌나 귀엽던지. 막내란 건 그래야죠. 전 클로드가 그렇게 어린 게 좋아요. 머무시는 동안 덕분에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그런데 싫어하다뇨? 그런 적 없습니다. 괜한 얘기로 절 클로드에게 미움받게 만들지 마십시오.”
또한 제 동생을 그렇게 어리숙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 사이를 방해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려지게 만들었으면 또 쉽게 성숙하게 변하도록 돕기도 할 것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자극도 무한히 줄 것이다.
그것은 귀한 관계였다.
“이 정도면 힘을 보탤 이유는 총족되었지요.”
적어도 가족 모두는 그렇게 클로드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공작가는 이 약혼을 지지하는 가장 첫 줄에 이름을 적어 넣을 겁니다. 뜻을 반대하는 다른 가문들과 싸울 준비는…… 아직 안 되어 있긴 한데, 아버지가 알아서 하시겠죠. 막내가 어리게 살겠다고 결심한 이상 그걸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강 설명해야 할 만큼은 충분히 했다고 여겼는데, 정작 당사자가 되는 어린 연인들에게 형의 말은 어렵고 또 의외의 소리였는지 실감하지 못한 표정으로 둘이서 ‘이거 진짜? 믿어도 되는 거? 신뢰할 만함?’ 하면서 속닥거린다.
둘 다 새끼 강아지같이 구는 게 영락없는 단짝인 것 같기도 했다.
유일하게 알아들은 이오리아는 눈꺼풀을 내리며 낮게 숨으로만 조용히 웃었다.
사랑받는 데에 재주가 있는 것이, 실리의 딸답다고 해야 할지. 공주는 이곳에 와서 이미 많은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삼은 것 같았다.
애초에 저 깜찍한 외양을 보면 누구라도 미워하기는 좀 힘들지 않겠나 싶기도 했지만.
“그럼 나중에 이자리스에서 뵙죠. 저는 두 사람처럼 원한다고 아무 때나 사라져 버릴 수가 없는 몸이라 바로 합류하지는 못합니다. 한 번 움직이는 데에도 복잡한 단계가 필요하더군요.”
당연히 저만한 위치의 인물이 나라 밖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거쳐야 하는 승인과 절차가 한두 개가 아닐 것이다.
태리와 클로드에게 내려진 떠나라는 황명은 조언으로 치부되어야 할 만큼 비공식적이었으나, 미리엘이 올 때의 그 행렬은 결코 비공식적이지 않을 테니. 차원이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