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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시선이 닿는다. 들이켠 독배가 식도와 내장을 태우는 것처럼 이오리아의 미안함에서 고통이 엿보였다.
“넌 강했다, 클로드. 그렇게 강한데도 힘을 함부로 쓰지 않았어. 탐욕스럽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보낸 거였다. 그저 강하지만 한 자라면 총독으로 갈 사람은 너 말고도 많았어. 하지만 난 그곳이 지켜지길 원했다. 실리의 흔적이 지워지길 원하지 않았어.”
첫사랑이자 일생에 유일했던 사랑에 대한 후회와 속죄를 그렇게 하는 여자.
태리는 한 번도 무심한 가면이 깨져 본 적 없었던 여자의 서투른 흐느낌을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도저히 어떻게 시간을 되돌려야 할지를 몰라서 손을 벌벌 떤다.
자기가 잘못한 거면서 클로드를 희생해서 되갚으려 했다. 끝까지 이기적인 것 아니냐는 말이 목까지 치달으면서도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점이 황제에게 감사해야 할 유일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참 다행이었지, 당신이 고른 사람이 클로드라서.’
다른 사람이 왔었다면 이자리스는 그나마 남아 있는 것마저도 갈가리 찢겼을 게 분명했다. 욕심에 눈먼 자들에 의해 조국의 자존심도, 명예도, 정신도 갈가리 찢겨서 진작에 분해되었을 결말이었다.
정 없이 독하고 이기적인 여자는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만은 축복으로 지니고 태어났다.
클로드도, 실리안도.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가 절망과 슬픔으로 뒤덮이니 태리는 도리어 차갑게 가라앉을 수 있었다.
“그럼, 빌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 한마디에 황제의 비참했던 얼굴이 웅크리고 있던 어둠 속에서 일어나듯 단숨에 태리에게로 향했다. 갸름하다고 여겼던 턱이 앙상하게 말라붙었다.
“모르오. 하지만 사람은 아닐 것 같더군. 마법 이외의 것에 낯설었던 실리는 몰랐지만 나는 바로 깨달을 수 있었소. 그건 인간이 아니야. 그런데 계속해서 그 이름을 캐묻는 걸 보니…… 그래, 그 빌이 내가 죽이러 가야 할 범인인가?”
시선만 향했던 것에서 상체가 뒤틀어지듯 넘어오고 급기야 주변 공기마저 곤두서게 만드는 것은 이오리아가 가진 원한과 복수심 때문이었다. 여기서 태리가 그렇다고 말하면 그녀는 당장이라도 빌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든 이들을 끌어내서 처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빌은 드래곤이에요.”
황제도, 클로드도 동시에 놀란다.
클로드는 그 이름을 이자리스의 어디에서 접한 적이 있는지를 머릿속으로 더듬었고, 이오리아는 불투명한 장막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처럼 자조를 내비쳤다.
“드래곤이라. 정체만 들어도 몹시 외로운 존재였을 게 느껴지는군. 내 장담 하나 할까?”
“무엇을요?”
“인간이 아닌 그것은 아주 긴 시간 고독한 존재였을 거요. 그러니 실리를 떠나지 못했겠지. 실리는 누구에게라도 애정을 채워 주는 사람이었거든. 그러니 외로운 존재들이 그 곁에 서면 어떻겠소. 죽어도 놓고 싶지 않아지지. 영원히 같이 살고 싶어져. 평생 꿈꾸며 살듯이. 나도 실리에게 그런 부류였으니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소.”
진실을 농담처럼 우스꽝스럽게 다루고 있었지만 태리는 그 장단에 맞춰 웃고 싶은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어째서 빌과 이오리아가 실리안과 함께하며 쌓은 추억에 그리도 목매어 살게 되는지를 더 선명하게 알게 될 뿐이었다.
“그럼 이제 공주는 가서 확인을 해야겠군. 그 빌이 범인이 맞는지 아닌지. 그것만 확인해 온다면 나는 공주에게 무엇이든 해 주겠소. 회의장에서 내게 요구한 것 그 이상라도. 다만 범인은 내 몫이오. 그것만은 내게 넘겨야 하오.”
복수할 대상을 찾는 황제에게 여기에 복수할 범인 같은 건 없다고 말을 해야 할까도 싶었다. 하지만 악독한 음성과는 대조적으로 짙은 속눈썹 사이에 소리 없이 반짝이는 눈물을 보곤 충동을 접었다.
범인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이와 같은 애정이 바로 범인이다. 누군가를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 한 번의 외면이나 한 번의 실수를 평생토록 가슴속에 끌어안고 살도록 하는 이게 바로 범인이다.
태리는 편지를 원래의 모습으로 접어 이오리아의 무릎으로 되돌려주었다. 열어 보고 들춰 볼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이건 그녀의 물건이었다.
“폐하는 그분을 많이 좋아했어요. 지금은 그냥 그 마음을 소중히 여겨 주세요.”
과거는 이미 돌이킬 수 없어졌으니까. 당신이 한 선택도 전부 다.
“…….”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힘주던 눈물방울이 툭 구르는 것을 느끼곤 이오리아는 그것이 공주의 위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나자 더없이 마음속이 황폐해지는 것을 자각했다.
사람 힘든 건 다 똑같다고 해도 제 천성이 못됐으니 그것보단 더 잘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점령은…… 사과하오. 마법사들의 협조를 일일이 구하기엔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고 이해해 주면 고맙겠소.”
“그런가요.”
“내가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겠다는 뜻이오.”
“폐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요.”
이 녀석 정말. 사람이 사과를 하는데 모른 척은 하지 않아 주면 좀 좋나. 하지만 일부러 저런다는 것을 안다. 일부러 무시하며 용서해 주지 않는 것이다. 미우니까.
“그리고 나를 두 사람을 훼방 놓는 방해물로 오해하는 것 같던데. 다시 부른 이유는 공작 때문이오. 공작이 와서 그러더군. 자기 아들이 공주님 때문에 죽고 못 사는데 허락해 주면 어떠냐고.”
“아버지가요?”
“그래, 네가 내 허락 같은 건 지나가는 소 닭 정도로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 말이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내세운 흔하디흔한 정략 약혼이 아니라는 것쯤은 일찍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일방적인 감정이 아니라 쌍방향이라는 것까지도. 원래 그런 것들은 숨기려 해도 잘 숨겨지지 않는 법이다.
배려 어린 목소리, 자연스러운 접촉, 그 안에 담겨 있는 애정. 걱정과 근심. 드물지 않게 드러나는 질투까지도. 그런 것들을 어찌 감추겠나. 이미 한 사람에게 눈이 멀었는데. 통제할 수 있었다면 애초에 사랑에 빠지는 일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이오리아는 두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지도, 그렇다고 잘못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니 반대하지도 찬성하지도 않는다. 모두 그녀에겐 자신의 테두리 안의 사람들이었다. 태리를 타국의 공주가 아닌 자신이 보호해야 할 실리안의 딸로서 처음 각인했던 것도 그러한 발로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둘이 같이 지내겠다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아직도 낯설었다.
자그마치 발로란과 이자리스다. 기사와 마법사의 간극보다 더 크다. 두 사람에겐 함께할 수 없는 서로의 확고한 위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실리의 옆을 꿈조차 꿔 보지 못하고 탐내려 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런데 녀석들은 남들의 불만이야 알 바 아니니 알아서 해결하라는 듯 개의치 않았다. 그냥 멋대로 하겠다고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 정도로 좋은 걸 수도 있고.
아니면…… 어쩌면 그건 그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장벽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럴듯해 보이는 결혼도 끝까지 영원했던 경우는 별로 없지. 그럴듯하지 않았던 결혼이라면 더욱 그래.”
한쪽이 상처를 받든, 둘 다 상처를 받든 좋지 않게 마무리될 수도 있다고. 다소 부정적으로 서두를 열었다.
그랬더니 클로드가 지금 장난하냐며 쌍심지를 켜는 게 보였고, 공주는 그보다는 덜했지만 썩은 눈동자가 유쾌하지 못한 방식으로 굴러갔다.
왠지 ‘저 편지 구겨서 돌려줄걸’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같았기에 이오리아는 저도 모르게 편지 더미를 두 손으로 덮어 보호했다.
“끝까지 듣고 판단하면 안 되겠니.”
“다 다른 사람들의 다 다른 결혼입니다. 비교되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낙관이 싫단다, 클로드. 우리는 괜찮을 거야. 그 말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무책임한지는 괜찮지 않게 되고 나서야 뼈저리게 느끼게 되지. 하지만 내가 틀렸기를 바란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지내거라.”
그래서 자신이 죽기 전에 둘이 나란히 보러 와선 ‘어라? 당신이 틀렸죠?’ 하고 잘난 체해 준다면 죽기 전 최고의 모욕으로 치켜세워 주며 웃으며 눈감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투덜거리듯이 클로드가 뚜하게 튀어나온 입술로 중얼거렸다.
“잘 못 지내면 어때. 내가 잘 보이면 되지.”
그 말이 꼭 ‘잘될 때까지 어련히 알아서 다 노력할 건데 뭐가 문제냐. 신경 좀 꺼라. 도중에 깨지라고 고사를 지내도 절대로 헤어지지 않겠다.’ 그런 필사의 각오 같아서 피식거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불쑥 드는 생각이란 이거, 공주가 감당이 되려나 싶은 약간의 걱정이었다.
제 조카는 조금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겉이 속을 따라가지 못한다. 툴툴거리듯이 사람을 대하는데 실은 되게 다정하고, 쓸데없이 수다 떠는 걸 싫어한다고 하면서도 누가 옆에 와서 계속 말을 시키면 짜증 내면서 일일이 다 대꾸를 해 주는 성격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에게 너무 시달린 탓인지 뭐든 다 누릴 수 있는 위치로 태어나서도 실제로는 뭔가를 제 것으로 삼는 일도 드물었다. 욕심이나 야망이라면 지긋지긋해했고, 힘들게 얻은 것도 남들에게 쉽게 쉽게 잘 줘 버렸다.
그런데 그런 애에게 지금 지독히도 갖고 싶은 사람이 생긴 것이다. 이게 괜찮을 건지 모를 일이었다.
심각해진 이오리아의 목소리가 태리에게 닿았다.
“근데 이 녀석 어디가 마음에 들어서 골랐소?”
“그렇게 갑자기 물어보시면 바로 떠오르지는 않는데…….”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태리는 무척이나 난처해했고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에 클로드는 본인의 어딘가, 예를 들면 외적 매력 따위를 광고하려 했으나 그녀는 여전히 우물쭈물했다. 그러더니 고민 끝에 가장 무난한 이유들을 내놓았다.
“성실해요.”
“성실? 귀찮다고 예배를 밥 먹듯이 빠지던데.”
“제게 잘해 주고요.”
“여자의 환심을 사려면 그건 당연한 요건이오. 당연한 것은 장점이 될 수 없고.”
“항상 절 기다려 줬어요.”
“공주, 녀석이 이미 그대에게 심하게 치댄다는 것을 아오.”
“그…… 약간일 뿐이에요.”
“약간은 무슨. 이놈 인생이 날아간 것 같던데.”
총알이 모두 동이 난 탄창을 보듯이 태리는 미안한 눈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클로드는 당연히 다시 치켜든 뿔로 당장이라도 제 고모를 들이받을 것처럼 씩씩거렸고 이오리아는 혀를 차며 ‘걱정되는구만, 걱정돼.’ 하곤 안경을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