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그런 걸로 조용히 시킬 수나 있을지 어처구니가 없는데, 성난 산양처럼 뿔을 들이대던 녀석은 놀랍게도 몇 번의 억울한 손동작을 하다가 잠시 후에 얌전해졌다.
“참으로 대단할 걸 할 수 있군, 공주.”
“노려보면서 씩씩대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이조차도 아무도 못 하는 일이오.”
“따로 부르시면서까지 하려 하시는 말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지만, 아까 제시한 그 조건이 아니라면 이자리스의 흙 한 줌도 내어 드리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군대도 물리셔야 할 거고요.”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할 텐데. 이미 스스로 인정한 바 아닌가?”
“그렇죠. 그러니 차라리 자폭하겠습니다. 땅을 망가뜨리는 끔찍한 흑마법 정도는 차고 넘치게 많이 알고 있거든요. 우리가 지키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도 가질 수 없습니다. 이자리스라는 나라를 지도에서 말끔히 지우겠습니다.”
“뭐……?”
“그런데 그건 정말 원하지 않으시겠죠. 미련이 많아 보이시던데. 그러니 협조하세요. 이자리스를 구하는 쪽에. 망가져서 다시는 그 땅을 보지 못하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
네가 소중히 여기는 것쯤이야 내가 당장 돌아가서 망가트릴 수 있다는 협박에 이오리아는 기가 차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다가 곧 괴기한 웃음보를 터트린다.
이 맹랑한 아이는 자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을 정확하게 꼬집는다.
이자리스를 세상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것. 그것이 조카를 데려간다는 것보다 더 무서운 말이란 걸.
사실 클로드야 주니 마니 할 것도 없이 제 소유라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황실의 큰 어른이고, 명백한 군신 관계에 있지만 클로드가 제 허락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본인의 약혼을 스스로 결정한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간섭할 권한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까지 괴롭히고 싶지는 않은 사이. 자신과 이 나라를 위해 많은 것들을 해 주었지만 때가 되면 제 손에서 보내 줘야 할 녀석.
하지만 이자리스에 관해서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정말이지 그곳만은 조금도 잃고 싶지 않았다. 아직 이오리아는 그곳에서 원하는 복수를 이루지도 못했고, 실리안의 무덤가에도 한 번 가 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떠나보낼 수 없었다. 자신의 군대로 산천을 다 뒤덮어서라도 실리의 고향을 대신 지켜 내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나는 특별히 뭔가를 말한 적이 없는데 공주는 나에 대해 뭔가를 많이 알고 있는 듯하오.”
“네, 그런 편이죠.”
“기운이 빠져서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고 싶지도 않군. 그래, 나라가 기울었다고 주저앉아 울어 버리는 성격이 아닌 것에는 감명받았소. 조금이지만 상황이 안 좋다고 판단될 정도로 위기감을 느꼈거든.”
“폐하께서 이자리스를 위하고 있다는 건 이제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와는 구하고자 하는 목적과 방식이 아주 다른 거죠.”
“내가 내 조국도 아닌 곳을 위하고 있다? 나에 대한 평판이 그리 긍정적으로 나 있지 않을 텐데.”
형제 열셋을 죽이고 황녀의 난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발로란의 제왕, 중앙대륙의 지배자. 이자리스에는 점령군을 파견했다. 그런데 공주는 무엇 하나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착한 사람,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 그것까진 가능하다고 믿으니까요.”
“그래서 이자리스에는 좋은 사람이 되어 보라 그 뜻이오? 그걸 위해 이 난동을 부리고 내 조카를 거래 조건으로 삼으면서?”
“그것보단 절 좀 봐 달라는 발악이었죠. 폐하의 눈에 저는 어린애잖아요. 그런데 전 애가 아니에요. 오늘 실컷 당하셨으니 이제 좀 실감이 나셨을 테죠. 그만 동등한 적수로 인정해 주세요. 전 폐하의 적이 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고, 알고 계신 것보다 훨씬 강하죠. 조금만 도와주시면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해결해 낼 만큼요.”
힘이 실린 목소리와 달리 태리는 지친 눈길로 이오리아를 바라보았다. 이제 자신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고, 남은 것은 당신의 선택뿐이니 그만 마음의 빗장을 풀고 들려주었으면 한다는 뜻이었다. 아무도 모르고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집무실에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듯한 적막이 흘렀다. 불편한 시간을 인내심 있게 기다린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떠한 이야기조차 나올 기미가 없는 것에 피로감이 몰려들 즈음 창백한 입술이 열렸다.
“질문을 바꾸시오.”
“……바꾸라니요?”
“공주의 말대로요. 어른의 싸움을 하고 온 아이에게 전과 똑같은 아이 대접을 할 수는 없으니. 원하는 답이 있다면 질문을 바꾸란 소리였소.”
먼저 정답을 고백할 생각은 없지만 기회와 여지를 넘기는 의미심장한 발언에 태리는 마침내 탁 트인 바다 앞에 선 듯한 환각을 겪었다. 시원하고 굵은 물결들이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어딘가로 나아갈 수 있었다.
“제 아버지에 관해서 여쭙고 싶어요. 실리안 소네티. 저주를 불러온 광란의 대마법사.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궁금한 게 결국 그였나. 황제는 찌푸리듯이 웃었다.
“참 이상하오. 죽은 지 10년이나 더 지났는데 아직도 그가 여러 사람의 가슴속에서 산다는 게. 어째서 다들 그를 잊지 못하는 건지. 대체 그에게 무슨 가치가 있어서?”
그만한 가치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왜 놓지를 못하는지. 그것은 대답이라기보단 자기 자신한테 던지는 회한과 집착 같았다.
“폐하의 생각을 여쭸어요.”
“……별로. 난 괜찮소.”
괜찮다. 그건 대답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슨 마음인지는 읽을 수 있다. 괜찮다는 말에는 아주 많은 의미가 있으니까. 정말 괜찮을 걸 수도 있고, 아니면 괜찮기를 바란다는 소망이기도 하고, 가장 안 좋게는 괜찮지 않지만 그것을 들키고 싶진 않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에는 역시 제일 좋지 않은 쪽이겠지. 끝까지 버티는 황제의 몸부림을 고려해 태리는 더 간결하게 묻는 쪽으로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혼자 힘으로는 솔직해지기 어려우신 것 같으니까 다시 질문을 바꿀게요. 쉽게 가죠. 전 그저 추측할 테니 그게 맞는지 아닌지 O, X로만 구분해 주세요. 이건 할 만하죠? 그럼 시작할게요. 아버지는 미친 게 아니었을 거예요.”
“그렇소.”
“미친 것처럼 보일 만한 어떤 힘을 가지게 됐던 거죠.”
“그러하오.”
“누군가로부터 그것에 대해 배웠고. 아마도 그 누군가를 친구라고 불렀을 거예요.”
“그래.”
“그럼 그 친구의 이름이 빌인가요?”
“……!”
세 번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확고한 긍정을 드러냈던 이오리아는 마지막 질문에는 입 끝을 한 번 꿈틀하곤 소리 내지 못했다. 배 속에 감춰 두었던 칼이 가슴을 파고든 것처럼 무시무시한 눈동자가 되었을 뿐.
“죽기 직전에 사귄 친구의 이름이 빌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지배자의 공포스러운 묵언에 겁도 없이 같은 질문을 다시 하는 공주의 담력도 물론 만만치는 않았다.
“그건 내가 답할 수 없는 질문인 듯한데.”
담대함에 탄복하듯 한참의 침묵 후에 대답이 돌아왔다. 된서리가 내린 것처럼 서늘했고 억눌린 분노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어째서죠.”
“공주가 O, X로만 답하라 하지 않았소. 그렇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니 할 수 없다고 한 거요. 나도 그놈이 빌인지 아닌지 제때에 확인을 못 해서. 뒤늦게라도 밝혀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소만.”
그러더니 소파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돌아간 이오리아는 목에 걸고 있던 열쇠를 빼서 상판의 밑바닥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되돌아왔다.
오래된 문서 다발을 묶어 놓은 것처럼 보였지만 먼지가 쌓이지는 않은 수십 장의 편지들이었다. 자주 열어 본 것처럼 봉투의 입구는 해져 있고, 묶어 놓은 노끈은 닳아서 끊어질 듯 말 듯 위태로운 상태인.
태리는 수명이 다해 보이는 그 끈이 이자리스에서 흔히 기생하는 식물의 줄기임을 바로 알아보았다.
이오리아가 서랍에서 안경을 꺼내 쓰자 회색 까마귀의 깃털 같았던 눈동자가 유리알에 겹쳐져 또렷해졌다. 그리고 그 눈길 그대로 이미 수천 번이나 더 살펴봤을 편지의 한 문장을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빌. 나는 내 어린 친구를 빌이라고 부르기로 했어. 이것이 옳은 이름이었는지 네가 확인을 해 줬으면 해.’……라고 쓰여 있는 구절이 있군.”
“그게 뭐죠?”
“내게 보낸 편지. 실리가 그렇게 되기 전에 몇 번, 편지를 받았거든.”
실리안과 알던 사이라더니 편지까지 받았다고? 클로드는 그 사실을 지금껏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황제의 감쪽같음에 경악을 했고 태리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요구했다. 직접 봐야겠으니.
이오리아는 망설이는 것 같더니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결국엔 넘겼다. 태리는 그것들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받아 허겁지겁 눈으로 빨아들이듯이 읽어 나갔다. 그녀의 어깨 옆으로 클로드도 바짝 붙어서 함께 훑어 나갔다.
여러 장에 달하는 편지는 시간 순서대로 겹쳐져 있었고 날짜를 보면 몇 년에 걸쳐서 보낸 편지란 걸 알 수 있었다.
쥬노가 네가 숲 경계로 나가는 걸 봤다는 얘길 들었는데도 믿지 못해서 며칠을 그 근처에서 잤어. 그러다가 감기도 들었어. 말도 없이 떠난 게 미워서 며칠간은 네 나무에 물도 주지 않았는데 다시 푸릇하게 되살려 놨으니 걱정은 마. 물론 네가 들으면 유치하다고 비웃을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