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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완전히 얼이 나간 눈으로 저보다 높아진 눈동자를 좇는다. 그러는 동안 클로드는 처음부터 맡아 놓은 자리였던 것처럼 태리의 옆으로 자연스럽게 섰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도 내 편을 들어 줘야 한다던 태리와의 약속을 끝내 지키러 온 그였다. 고모님의 뒤가 아닌 약혼녀의 옆에 섬으로써 그는 자신이 누구를 지지하고 있는지를 공개적으로 표출했다.
“사실은 이미 했습니다. 폐하께 허락받을 필요까진 못 느꼈었는데.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군요. 공주님과의 약혼에 폐하의 윤허를 청합니다.”
둘 사이에선 이미 치러진 약혼이었다는 담백한 통보에 내부에는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적인 파란이 일었다.
오직 놀람과 탄식으로 가득 찬 소란뿐. 누군가는 마법사와 절대 그럴 수는 없다며 분개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얻는 게 있다면 해 볼 만한 시도라고 흥분하기도 했다.
그 혼란스러운 군중 속에서 충격 이외의 다른 감정을 품고 있는 사람은 듀폰 하나였다. 머리부터 발끝부터 찌릿하게 울리는 전율감에 그는 아예 다른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다.
배신은 당신의 몫이 아니에요.
빗속을 뚫고 자신을 찾아왔을 때 공주는 마치 미래를 보는 사람처럼 그렇게 자신 있게 예고했었다. 그 순간에도 그렇다면 누구의? 누구를 향한 배신인가?라는 의문이 스쳐 지나갔지 않던가.
‘설마 그것이 기사단장을 말하는 것이었을 줄은……!’
신의 기사이자 제국의 영웅, 황제의 조카이고, 황실의 푸른 피를 가진 남자가 눈앞에서 오랫동안 섬겨 온 자신의 주군을 배신하고 있었다.
그 스스로 운명을 결정함으로써. 원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스스로 택함으로써 완벽하게 황제를 배신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무심코 빚졌던 그 하루의 사고가 눈덩이처럼 굴러 여기까지 왔음에 듀폰은 소름이 돋아 까무러쳤다.
클로드는 출생부터가 완벽하게 황제의 우군으로 태어나, 오랫동안 그녀의 힘과 기반이 되어 온 인물이었기에 그의 선택은 더욱더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그럴 리가 없어. 함께할 수 있을 리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어? 지탱해 주던 어딘가가 부러진 것처럼 황제는 팔걸이를 짚고 쏟아지려는 몸을 가까스로 묶어 두고 있었다. 입 속에서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잔물결처럼 같은 물음이 반복해서 맴돌았다.
그녀가 잃어버린 위엄을 대신 주워 들고 무장한 건 클로드의 지지를 등에 업은 태리였다. 질서 없는 황망함과 혼돈으로 시끄러운 한복판에서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만약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이 자리에서 이것을 신탁이라고 외쳤을 겁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귀족들은 쉽게 압도되었다. 당연했다. 공주가 또다시 꺼내 든 건 제국의 고유 무기였으니.
신탁이라는 건 미래를 예고하는 신의 계시였다.
“약혼을 허락하시면 소망하시는 것들도 모두 그대로 이루어질 겁니다. 저주도, 땅도.”
저주를 풀길 원했다면 풀릴 것이고, 땅을 갖길 원했다면 갖게 될 것이다. 신의 계시를 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것은 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태리는 확신했다. 오늘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이 나는지 그녀만이 유일히 알고 있었다.
* * *
회의가 어떻게 폐장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약혼을 해 버렸다니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건지 아니면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안 된다는 완강한 반대의 표시였는지, 노려보며 침묵하던 황제가 말없이 자리를 뜨고 귀족들은 하나둘 얼빠진 정신으로 스르륵 자리에서 일어나 뿔뿔이 흩어졌다.
모두가 떠나갈 때까지도 끝까지 자리에 남아 있었던 태리와 클로드는 둘만 남고도 그곳을 나가지 않고 남았다.
수십 명으로 가득 찼던 대회의장에 덩그러니 둘이서만 앉아 있자니 꼭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바닷가에 뗏목만 겨우 잡고 동동 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 주듯 말없이 어깨를 대고 있던 둘 사이에서 먼저 얘기를 꺼낸 건 태리였다. 그녀는 제일 먼저 그를 달라고 했던 뻔뻔한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상의도 없이 그런 말 해서 미안해요.”
“무슨 말? 아아.”
붙어 앉아 있어서 좋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던 클로드는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갸우뚱했다가 뒤늦게야 이해했다. 그런 다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당황한 눈만 끔뻑거렸다.
왜냐면 그는 괜찮았기 때문에. 아니, 솔직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기분이 좋아서 날아갈 것 같았는데 연신 미안해하는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능숙하게 본심을 감추며 대화를 맞추기엔 그의 말주변이 너무나 부족했다.
붉어진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그가 시선으로 먼 곳으로 빼며 말했다.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런 사이가 된 거, 사실인데.”
“그래도 나 때문에 많이 놀랐잖아요.”
“놀라긴 놀랐지만.”
“놀라게 한 게 난 미안해서.”
미안하다고 눈알을 굴리며 손을 꼼지락대는 모습에 끌어안고 싶은 걸 참느라 혼났다. 들썩거리는 팔을 못 움직이게 하려고 상체를 묶듯이 양팔을 십자 모양으로 감싸고 있자 그걸 이상하게 생각한 태리가 눈앞에서 알짱대는 병아리처럼 고개를 이쪽저쪽 갸웃하길래 결국 못 참고 안아 버렸다.
좋아서 왁 하고 매달리는 커다란 개처럼 달려드는 클로드에 태리는 그가 힘을 주는 대로 저항하지 않고 품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대로 파묻혀 있으니 차갑게 경직되어 있던 기운이 풀어지며 따뜻한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안겨 있는 그녀의 편안함이 클로드에게도 전달된 건지 힘을 주던 팔 하나를 푼 그가 동그란 뒤통수를 가만가만히 쓰다듬었다.
혼자 서서 싸우는 게 무서웠을 텐데, 이렇게나 잘 해낸 그녀가 대견한 것처럼 머리칼을 쓸더니 정수리에 아예 자기 턱을 얹어서 보자기처럼 더 꽁꽁 싸맨다.
그 느낌이 좋아서 태리는 더욱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갔다. 잘했어, 하는 다정한 속삭임이 은은하게 들려왔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도 지금은 그의 품에 아무 일 없이 안겨 있다. 태리는 이 품이 제게 주는 모든 것들이 좋았다. 귓가에서 뛰는 그의 심장 소리도, 갑갑함 없이 감싸 주는 이 넓은 가슴도.
공주님을 모셔 가기 위해 적막한 회의실로 들어오던 안시는 때마침 그 모습을 목격하곤 걸음을 도로 물려서 나갔다.
방금 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그녀도 모두 알고 있었다.
기사인 걸로도 모자라, 망할 놈의 제국 출신에, 심지어 총독이기까지 한 남자를 공주님의 약혼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하면 그게 이자리스에 이득이 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결사반대를 외치며 졸도할 것이다.
안시의 마음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언제나 공주님이 가고자 하시는 방향으로 함께 서기로 결심했지만 이 길만큼은 막고 싶었다.
함께해 봤자 축복이라곤 없는 깜깜한 앞날일 게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저렇게 같이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저렇게나 잘 어울리는 짝이 있을 리가 없는데. 저렇게나 행복해 보이는 연인이 또 있을 수가 없는데…….
깨진 문에 기대서서 갈피를 못 잡고 고민만 깊어 가던 그때였다. 불현듯 계단 아래에서부터 바람이 끼쳐 오는 듯하더니 곧이어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그 계단을 척척 밟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저 찢어 죽일 자가 여기는 또 왜.”
그 무리의 선두를 보곤 안시는 즉시 인상이 험악해졌다. 마법사들에게는 원수와도 같은 존재, 총독이라는 걸 만들어 보내서 클로드와 공주님의 관계를 초장부터 어긋나도록 만든 제일의 원흉.
눈앞으로 가시와도 같은 그 황제 이오리아가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박살 났던 이성이 급하게 수리되어 가던 길을 되돌아오기라도 한 사람처럼 이오리아는 오로지 정면만을 응시하며 직진하고 있었다.
자신을 오만불손하게 노려보는 안시의 시선조차도 안중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하나의 생각만을 하고 있는 듯 보이는 황제는 열려 있는 문을 거침없이 박차고 들어가 명령했다.
“둘 다 따라오도록.”
상대의 의사 따위는 관심에조차 두지 않은 강압적인 호출이었다.
* * *
보기 애처로울 정도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제 앞에 불려 와서도 제 약혼녀가 어찌 될까 오로지 그녀만을 지키고 있는 조카를 보며 황제는 체념하게 되는 스스로를 느꼈다. 처음부터 자신의 반대 따위는 저 녀석에게 어떠한 방해도 되지 않았으리라.
너희는 이루어질 수 있을 리가 없다. 헛수고다. 수천 년간 쌓아 온 금단의 벽을 그렇게 쉽게 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했건만…….
‘사랑에 빠졌구나.’
그래, 열병에는 이유가 없지. 열병에는 제약도 없고.
그럼 자신은 이제 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까. 아니, 무엇을 해 줘야 하는 걸까. 나는 뭘 해 줄 수 있나.
자신이야말로 힘을 가진 어른이며 이 연약하고 어린 공주를 등 뒤로 밀어 두고 보호해야 한다고 확신했던 과거의 자부심이 벌써부터 까마득하게 여겨진다.
당돌하게도 앞에서 꼬박꼬박 말대꾸하며 제 안에서 무언가를 바꾸게 만들더니, 공주는 며칠 사이에 부쩍 자라나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분명 실리의 어린 딸인 줄로만 알았는데. 언제 저렇게 컸는지 모를 일이었다.
“속임수에 능하더군.”
불의의 사고를 당한 가련한 여인으로 무대로 올라와선 공주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실력으로 다수의 귀족들을 노련하게 농락했다.
뿐인가. 영토 분쟁을 공론화하더니 결국에는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를 뺏어 가기에 이르렀다.
어쩌다가 엇 하고 흘러가게 된 전개처럼 보이겠지만 모든 것은 처음부터 준비된 교묘함이었을 것이다.
정의감은 엿보였으나 야망만큼은 조금도 없어 보였는데.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치밀함이었을까?
왕관을 벗어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이오리아는 소파 뒤로 깊숙하게 등을 기댔다.
“가깝게 지냈으면 해서 초대했더니, 공주는 내 집에 들어와서 불을 질렀소.”
“몸에 불이 붙어서 죽을 뻔한 건 공주님입니다.”
“너는 좀 조용히 해 주겠니, 클로드?”
“고모님 같은 언행을 적반하장이라고 하는 겁니다.”
원래도 잘 따져 드는 녀석이 열병에 걸려 맹목적인 보호 본능까지 얻고 나니 두 눈에 마귀처럼 불을 켰다.
이오리아가 이 녀석을 어떻게 좀 해 보라는 식으로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자 태리가 쉿 하는 동작으로 클로드에게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