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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황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믿지 않겠지만 짐은 이자리스에 최선을 다했소. 가장 뛰어난 군대와 그보다 더 뛰어난 조카를 보냈고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소. 그럼에도 숲은 정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여전히 마수의 소굴이오. 아무리 좋은 약을 구해다 먹이고 밤낮으로 간병해도 결국엔 죽을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갓난아이를 돌보는 것과 같지.”
“…….”
“그런데 공주가 혼자만의 힘으로 그곳을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소? 짐도 하지 못할 일을, 무패의 기사단조차 고전하고 있는 저주를 어린 공주가 해결할 수 있다고? 아니, 못 하지.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것에 태리는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도의에 대함이 아니라고. 손익을 계산하듯이 들먹였었던 그 도의적인 얘기가 아니었다.
‘이건…… 나한테 호소하는 것 같은데. 제발 그곳에 있게 해 달라고.’
쓸쓸하고 서글퍼서 먹먹해지기까지 하는 감정이 느껴졌다. 만일 이곳에 모두가 있지 않았다면 황제는 입술을 깨물었을 것 같고, 비참함으로 젖은 눈을 감싸기라도 했을 것 같았다. 마주 보는 얼굴 그 어디에도 물기 한 점 없이 건조했으나 틀림없이 그렇게 느껴진다.
동화처럼 아름다웠던 땅에 대한 그리움과 그것을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괴로움이.
그렇다면 나를 이렇게 애 취급하지 못해서 안달인 건 그 일을 해결할 능력이 제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걸까?
물론 황제의 평가대로 제국의 군대 없이 이자리스에 달리 뾰족한 수는 없었다.
전보다 살 만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건 클로드의 성기사단이 검은숲으로부터 방어를 해 주고 있기 때문인데, 그들을 돌려보내면 그때부턴 마법사들끼리 그 일을 해내야만 한다.
할 수 있냐고 하면 어떻게든 해 내기야 하겠지만 삶이 고단해지고 피폐해지는 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당연히 저주를 깨트리려 하는 시도도 하기 힘들어질 테니 ‘넌 할 수 없다’라는 황제의 자문자답이 틀렸다고 할 수 없긴 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진짜 공주일 때의 얘기고.’
진짜가 아니기에 이 세계의 결말을 알고 있는 태리에겐 적용될 수 없는 얘기였다.
“맞아요, 못 하겠죠.”
“그런데 왜 고집을 부리지.”
“그러니까 서로 협상하는 게 어때요?”
순순히 능력 부족을 인정한 태리가 대담한 요구에 이어 또 다른 조건을 내걸자 황제는 코웃음을 치며 반문했다.
“이런 식으로 판을 망치고 협상을 논하자는 거요. 나와 협상을 하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군대를 물리라는 요구는 하지 말았어야지.”
협상을 해야 될 상대의 기분을 이런 식으로 망쳐 놓고 조율을 하자는 게 가당키나 하냐는 힐난이었지만 태리는 아랑곳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었다.
그러곤 웃고 있는 얼굴 속으로 몇 번이나 한결같은 문장을 되뇌었다.
나는 진짜 공주가 아니다. 나는 공주가 아니다. 나는 진짜가 아니야.
그러니까 왕의 자리를 지키려는 순진한 정론을 고집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이 게임이 이기도록 하기만 하면 된다.
이야기의 맨 첫 장에서 클로드를 찾아가 왕좌를 주겠다고 선뜻 약속했던 그때의 그 마음가짐처럼.
그녀가 원하는 건 저주를 풀고 한 나라를 구하고 싶은 것이지 그 나라의 왕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폐하의 입으로도 말씀하셨죠. 네, 그 땅은 저주를 해결하지 못하면 누구도 주인이 되지 못해요. 군대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고, 후계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다르지 않죠.”
한마디로 저주 해결 없이는 못 먹는 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너나 나나 해결하지 못한 건 매한가지고.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나눠 먹기라도 하려면 양쪽의 힘이 모두 필요했다.
여전히 냉소적으로 물러나 있는 황제를 향해 태리가 꽁꽁 감쳐 두었던 본심을 마침내 활짝 꺼내 풀었다.
이 자리에 선 진짜 이유. 오늘의 최종적인 목표를.
“그래서 말인데요, 폐하께서 이자리스에서 하셨다는 최선. 그 막강한 군대, 아니, 그 막강한 사람을 저한테 주시면 어때요?”
“……!”
“그 사람을 주세요. 그러면 그를 데리고 저주를 끝내는 게 가능하다는 것부터 보여 드리겠습니다.”
천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아도 모두가 다 알았다.
고래의 배 속에 들어온 것처럼 사방의 소리가 죽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입만 벌어질 뿐 아무도 소리 낼 수 없는 그런 자리였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 똑같이 옮겨 붙어 귀족들의 얼굴은 모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교환의 대상으로 지목된 클로드조차도 자기가 헛꿈을 꾸는 게 아닌지 볼을 꽉 꼬집어 보고 있었다.
그나마 신속히 제정신으로 돌아온 건 황제였지만 달라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아니면 부정하고 싶었던 건지 그녀가 목소리를 삐끗거리며 애써 다른 방향으로 의미를 해석하려 했다.
“내 조카를 공주의 밑으로 편입하면 명령의 지휘 체계가―”
“아니요, 밑이 아니라 옆이요. 전 제 옆자리를 말한 거였어요.”
하지만 공주는 맹랑하다.
황제가 잠깐이라도 자신의 말뜻을 잘못 해석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분명히 제시했다.
“이자리스의 총독이자 제국의 성기사단장인 클로드 데본셔 경을 저에게 주세요. 그러면 모든 일이 끝난 뒤에도 그 사람을 그 자리에 두겠습니다. 당연히 그 자리가 가진 권리도 계속 인정할 거고요.”
옆자리.
그 한 단어가 가져다주는 현기증에 황제는 눈꺼풀을 힘주어 밀어 올렸다. 그녀는 이 아귀판 같은 황궁 안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이었다. 이런 황당한 장난 정도야 간지러울 정도로 단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 자꾸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속이 모래를 쏟은 것처럼 텁텁해질까.
공주의 말에 정신 줄을 잡고 어떻게든 대꾸를 하고 있는 스스로가 용할 지경이었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란 건 알고 말하는 거겠지?”
“아직 제가 드릴 조건에 대해서는 자세히 들어 보지도 않으셨잖아요.”
그에 반해 태리는 얄미울 정도로 태평했다. 상대가 충격에서 벗어날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고 몇 날 며칠을 준비해 온 말들을 쏟아 냈다.
“너무 과분한 인재를 요구한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죄송하게도 지금 이자리스는 가난해서 가진 게 없어요. 나라의 빈 곳간을 채워 넣으려면 일부는 어디선가 소매치기로 메꿔야만 하죠. 그런데 발로란은 이 의사당에조차 금칠을 할 수 있는 나라잖아요.”
물론 너희가 그렇게 부자니까 당연히 내놓아야 한다는 그런 양심 없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부자니까 조금 비싼 걸로 빌려줄 수는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미래에 갚을 수 있을 테니까.
“데본셔 경을 제게 주시면 약속드릴 수 있는 건 하나입니다. 제가 가진 권리를 그와 공유하겠습니다. 그게 조건입니다.”
장내는 다시 한번 혼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공주가 가진 권리.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껏 그녀를 이 자리에서 설 수 있게 하고, 가진 게 없는 그녀가 정통성을 앞세워 제국의 황제와 떳떳이 대적할 수 있게 한 유일무이한 자격. 바로 왕위 계승권이었다.
그것을 제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도 공유하겠다는 건 클로드에게도 이자리스의 왕이 될 수 있는 권리를 절반만큼 나누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가능해지려면 적어도 클로드가 공주의 배우자 정도는 되어야만 했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두 나라 간의 밑그림이 바뀌는 것이다.
“지금 공주는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인지는 하고 있는 거요. 한 마디, 한 마디 신중을 기해서 내뱉으시오.”
“신중히 생각했고. 오기 전에 이미 여러 번 검토해 보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황제의 거듭된 확인에도 태리의 의사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 또한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황당하게 느껴질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원수 지간에 애매한 혼인을 통해 권리를 절반으로 나누자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해야 한다. 말도 안 되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제가 가진 건 그것뿐이에요. 결국엔 죽을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갓난아이를 돌보는 것과 같다 말씀하셨죠.”
“내가 그리 말했던 건.”
“제게도 소중한 곳이에요. 그렇게 죽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힘이 필요하고 그래서 나라를 파는 대신 제 권리의 절반을 팔겠다고 제안드린 겁니다. 멸망을 받아들일 바에야 자존심을 내려놓는 게 낫습니다. 전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살려서…… 계속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어야만 해요.”
사실상 제국에서 황자나 다름없는 위치의 클로드에게 이자리스의 왕권을 나눠 주게 되면 발로란은 그를 통해 이자리스를 간접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두 나라 간에 힘의 불균형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이것을 좋지 않은 혼인 외교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태리는 이 방법을 진엔딩으로 생각했다. 애초에 클로드에게 넘어갈 자리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결말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기까지 도달하는 길을 강탈이 아닌 협상으로 마무리 지어 놓고자 하는 것뿐.
클로드가 좋은 사람이라서 다행이었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서.
“데본셔 경과의 약혼을 허락해 주세요.”
종내 공주의 입에서 떨어진 견고한 목소리에 황제는 심장에 매달려 있던 추가 쿵 떨어지며 비로소 그녀의 목적을 깨달았다.
……진짜는 이거였구나. 이 말을 하려고 왔구나.
습격받은 김에 빼앗긴 땅도 모조리 되찾아 가겠다는 게 애초에 가당키나 한 도전이었던가. 앞에 늘어놓았던 그 장황한 연기는 모두 이것을 위한 쇼에 지나지 않았다.
무려 두 번이나 의도를 잘못 짚은 것은 공주가 가면을 두 개나 썼을 것이라곤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정도로 수를 쓸 만한 재주가 있을 거라곤 고려 자체를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과소평가한 것이다. 왜냐하면 공주는 어린애니까. 자신이 보호해야 할 실리의 어린 딸이라고만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자신을 궁지로 몰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그 어린애가 아닌가. 황제는 좀처럼 느껴 본 적 없는 생경한 기분을 겪고 있었다.
“유감이지만 내 조카가 그 약혼을 받아들일 리 없소.”
“아니요, 전 기쁘게 받아들일 겁니다.”
“……!”
애써 침착하게 부정하고 나선 게 부질없어질 정도로 의견은 한순간에 또 다른 벽에 부딪혔다. 복병은 한 곳에만 숨어 있었던 게 아닌 듯, 클로드가 사람들 틈에서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