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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말이 사실이냐. 아니지 않느냐. 제발 그렇다고 해 달라. 그에게 매달리는 눈동자들은 마치 그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는 듯한 꼴이었다.
그러나 클로드는 일말의 자비도 없이 모두 홱 내쳐 버리더니, 무슨 까닭 때문인지 열이 부글부글 끓는 음성으로 딱 잘라 대답했다.
“마법의 사용은 없었다.”
“이럴 수가.”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다시 잘 생각해 보시오, 기사단장!”
“뭘 다시 생각해. 내가 그때만 떠올리면 아직도 자다가도 화가 나서 벌떡벌떡 일어나는데.”
그러면서 탁자 위의 주먹을 꽉 쥐며 ‘진짜 하나도 없었어! 정말 하나도 없었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떠올릴 때마다 화나, 젠장!’ 하고 성질을 부렸는데 그보다 더 확고한 증명은 있을 수 없었기에 귀족들은 하나같이 낭패감에 사로잡혔다.
특히나 그가 잘생긴 이목구비를 구기며, 속 썩어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을 때가 가장 정점이었다.
본래의 내막은 태리가 마법을 안 쓰면서까지 위험을 무릅썼던 이유가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서였다는 걸 뒤늦게 알아챈 남자의 불평 내지는 뒤풀이였지만 내막을 모른다면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공주의 말이 어쩔 수 없는 진실이라 속이 타는 모습 그 자체다.
태리는 코 밑을 훔치는 척 손등으로 움찔거리는 입가를 가렸다. 누구 약혼자 아니랄까 봐 어쩜 화를 내는 것조차도 도움이 되는 남자였다.
그러고도 그녀는 이어서 자신의 주장에 완벽한 쐐기를 박듯이 또 다른 근거도 제시했다.
바로 현장에 놔두고 온 마법 지팡이였다.
“괴한들은 가장 먼저 지팡이부터 빼앗아 숨겼습니다. 전 그걸 아직까지도 되찾지 못했고요. 그들을 상대하는 동안에도 당연히 어디 있는지 몰랐어요. 그게 뭘 의미하나요? 제가 마법에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때 뺏긴 지팡이가 그곳에 남아 있는지 아닌지는 현장을 수색했던 경비대가 제일 잘 알겠죠.”
사고가 있었고, 클로드가 무사히 공주를 구출해서 빠져나간 뒤 현장에는 사건을 수색하기 위한 경비대가 곧바로 출동했다.
그때 그곳에 남아 있던 물건들은 모조리 증거품으로 회수되어 보고되었으니 태리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사서에서 기록되어 있을 터. 눈앞에 놓인 보고서를 슬쩍 들춘 황제는 증거 목록을 확인하곤 쓴웃음을 지으며 덮었다.
침묵하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어째서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공주.”
“폐하의 호의에 대한 답례였죠.”
“나에 대한?”
“예, 폐하께선 마법사를 제국 땅에 초대해 준 최초의 군주이지 않으십니까.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텐데 제가 와서 사고를 칠 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여겨 줬다면 정말 고마운 일이로군.”
“하지만 후회합니다. 그냥 마법을 쓸 걸 그랬어요. 그랬다면 그게 광신도인지 뭔지도 몰랐을 테지만 어차피 범인을 잡지도 못하고 놓쳤으니까 상관없잖아요? 차라리 그들의 시신에 제 마법의 잔해를 남겼다면 모두에게 아주 큰 경고가 됐을 텐데.”
경고라는 단어에 악센트를 주는 신랄한 혓바닥, 아쉬움으로 입맛을 다시는 농담을 빙자한 진담. 마무리용 공격으로 쳐들어온 공주의 재치에 황제는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가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실리안적인 배경 위에 클로드적인 성향인가?
화가 날 만한 상황에서도 시종일관 흐르는 물처럼 조곤조곤 짚어 가기만 하는 것에 과연 실리안의 딸답다고 여겼는데, 막판에 와서 저리 작신작신 밟는 행태라. 그것은 제 조카가 잘 벌이는 짓이었다.
공주의 말을 반박할 기지도 없고, 그렇다고 자신처럼 웃어 줄 관대함도 없이 그저 어수선하게 우왕좌왕하기만 하는 귀족들을 내려다보며 황제는 상황이 이미 끝났다고 판단했다.
그나마 여기서 더 꼴사나워지지 않으려면 인정할 건 그만 인정하고 최대한 이쪽이 덜 손해 보는 쪽으로 합리적인 보상을 약속하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황제는 품격을 지키기로 했다.
“뭇 자각 없는 제국민의 실책이나 그 또한 황제인 나의 책임. 늦었지만 대신 사과하겠소.”
“폐하의 사과를 정중히 받아들이겠습니다.”
“해서 공주의 의견을 듣고 싶소. 무엇을 원하오.”
“범죄자들의 처벌을 원합니다. 발로란이 정말로 기사도를 숭상하는 나라라면, 그 명성에 그릇된 점이 없다면 그들을 끝까지 잡아내서 처벌해 주세요.”
당연한 상황에서 나올 만한 당연한 요구였지만 황제는 순간 그 말에 곧장 확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당연한 요구 뒤에 달려 온 막중한 수식어들이 괜히 마음을 찝찝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저렇게까지 화려하게 장식해서 말할 필요가……?
할 수도 있지만,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또 별개로 지금 당장 거기에 답을 거절할 수 있는 명분은 없었다.
“물론이오. 반드시 찾아내서 엄벌하도록 하겠소. 황제의 이름으로 약속하지.”
“그리고 한 가지 더요.”
한 가지가 더 있다니!
고작 당연한 것 하나를 내줬을 뿐인 주제에 귀족들은 두 번째 요구 사항이 있다는 말에 단숨에 목소리를 높여서 항변했다. 그러나 태리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손을 들어 그들을 중지시킨 순간 한꺼번에 찌그러지듯이 움찔하고 조용해진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어떠한 위화감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완벽해서, 그 행동이 이제까지 황제만이 가능했던 일임을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지배자로서 가진 태생적인 압도다.
느낀 것은 오로지 황제뿐이었고 그녀마저도 아름다운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똑바로 꽂혀 들었을 때는 손 하나 까닥이지 못했다.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실은 이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무엇이오.”
“이자리스에 집어넣은 군대를 이만 물려 주시죠.”
“……!”
“황제의 이름으로 약속하신 그 사과에 진정성이 있다면 제가 그 정도는 받아 가야 할 것 같은데요.”
* * *
대담한 도전을 정면에서 들이받힌 직후에 말없이 눈만 깜박였던 것은 그때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속았다기보다는 다 끝난 상황이 눈앞에서 꼴까닥 뒤집어지는 걸 보고 기가 막힌 기분이 느껴졌던 걸 수도 있고.
‘너, 이게 목적이었구나.’
왜 이 자리에서 나왔을까. 왜 화를 내지 않고 참을까. 왜 마법을 쓰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이걸 위해서였던 것이지. 이 도발적인 승부를 위해서.
황제가 발칙한 웃음기가 저민 눈매로 태리를 노려보는 사이, 파도처럼 다시 일어난 건 귀족들이었다. 아우성이 빗발친다. 군대를 모조리 물리라니? 습격이고 뭐고 간에 이젠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사전에 논의도 없이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공주께선 독단적인 행동을 벌이지 마십시오!”
“거긴 제국의 보호령 안으로 이미 들어간 곳이 아닙니까?”
“기사단의 도움 없이는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건 이미 증명이 된 일입니다!”
어떻게든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으려고 허겁지겁 던져 대는 고함들 사이로 태리는 화들짝 놀란 듯하다가, 이내 부스러진 웃음을 흘려 냈다.
“많이들 놀라셨나 본데 빈집을 털다가 집주인이 돌아오면 그때부터 그 행동은 약탈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시고 천천히 말씀하세요. 너무 많은 분들이 한꺼번에 말씀하시면 제가 알아듣질 못한답니다.”
약탈이라는 노골적이고 서슴없는 단어 선택은 그녀가 가진 상냥함만큼이나 인정사정이 없었다.
귀족들은 그 조롱을 버티지 못하고 또다시 두서없는 말들을 쏟아 냈지만 말했듯이 여러 명이 동시에 소리를 내면 뭐라고 하는지 잘 분간이 가질 않는다. 태리는 도저히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것들을 무시했다.
하지만 황제는 달랐다. 불분명한 여러 마디의 말보다 강력한 한마디로 공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자리스의 공주여, 그대는 자신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오?”
그 한마디에는 태리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는 모든 비난이 다 들어 있었다.
네 역할을 내팽개치고 달아난 주제에. 스스로 지킬 힘도 없어서 내게 의지해야만 하는 주제에.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가.
과연 정복자다운 차원이 다른 독설이랄까.
태리는 차분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전 소네티 왕가의 직계 혈손이고 적법한 후계자입니다. 그 나라의 모든 권리를 독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다른 자격이 필요한지는 모르겠는데요.”
가진 건 이름뿐이지만 지금은 그게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정통성.
“도의상 맞는 얘기인지도 고려해 보았소?”
“아, 도와주신 것 말인가요?”
“그걸 단순히 ‘도왔다’로 넘어갈 수 있겠는지 모르겠군. 나는 공주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자리스의 많은 것들을 ‘구했소’.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을지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군.”
“그렇게 해 달라고―”
“요청한 적 없다?”
실망인데. 그런 철부지 같은 말은. 황제는 처음으로 날 것의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며 형형한 눈매를 치켜올렸다. 심약한 사람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허리가 곱아들었을 터였다.
하지만 태리는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황제가 자신을 나무라고 있다고 생각했다.
“왕의 자릴 포기해서라도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누구에게든 구해 달라고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 예상이 맞는 것 같았다, 꾸짖음.
‘역시 당신은 뭔가가 참 이상하단 말이지. 수상하고. 미심쩍고.’
태리가 반박하지 않고 의심하듯 묘하게 바라보자 황제도 본인이 뭔가를 실수했다 여겼는지, 삽시간에 무표정으로 얼굴색을 지우며 처음의 자세로 되돌아왔다.
“분명히 밝히오, 공주. 이미 오랜 시간 주둔한 병력을 그리 쉽게 물릴 수는 없소.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는 하지 못하겠다는 뜻이오.”
“맨몸으로 나가란 건 너무 예의가 없었다. 그 말인가요?”
황제의 주장대로 도의를 따져 든다면 그 부분이 필경 문제가 될 것이다.
이자리스는 불의의 사고로 넘어졌고 부탁한 적 없었지만 발로란의 황제는 그런 이자리스에 목발을 만들어 빌려주었다. 그 손길에 사심이 있었건 없었건을 떠나, 목발이 없었다면 그때 그 자리에서 무너져 영영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재활을 해 볼 기회조차도 없이.
그러니 인정하기 싫어도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 이제 와 그들을 내보내려 한다면 확실히 적당한 답례가 있는 것이 보기 좋은 그림이기는 했다. 정확히 도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