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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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황제는 별다른 타박 없이 둘을 맞이해 주었다. 

“어서 오시오, 공주.”

“다시 뵙습니다, 폐하. 강녕하셨는지요.”

“내가 강녕하지 못할 일이 있나. 큰일은 공주가 당했지.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해서 미안함이 크오. 그러고도 공작의 손에 맡기게 되어 면목이 없고.”

“아닙니다. 덕분에 그곳에서 편안히 잘 지냈습니다. 모두 친절히 대해 주셔서.”

“그래, 그 집 식구들은 모두 다정이 병인 이들이라.”

천성이 마음씨 고운 이들밖에 없으니 큰일을 당한 공주를 공작가의 사람들이 잘 보살폈을 것이다. 그래서 황제도 그 뒤에 따로 공주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인다거나 하지 않았다. 믿고 그곳에 맡겼다.

황제의 눈길이 클로드에게로 넘어갔다.

“네가 나 대신 수고가 많았겠구나.”

“좋아서 한 거라서 괜찮습니다.”

“그런데 입술은 왜 그러니. 다친 거니?”

지운다고 지워 놓았음에도 클로드의 입술은 여전히 울긋불긋했기에 멀리서 보면 다치거나 부은 것처럼 보일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멀리서 보면. 절대 가까이에서 보게 하면 안 된다.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눈을 좁히는 황제의 행동에 태리는 저도 모르게 클로드의 등 쪽 옷을 구겨 잡아 뒤로 확 잡아당기고 말았다.

“아하하, 별거 아닙니다.”

그러고는 빛보다 빠르게 대답을 가로챘다. 그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클로드가 도로 그 대답을 뒤집으면서 두 사람의 말소리가 몇 번이나 간발의 차로 비껴 나왔다.

“아니, 이건 대단한 겁니다.”

“아니에요, 정말 별거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 대단한 게 맞습니다.”

“아니라니까 그러네요.”

“그 아니가 아니겠죠.”

옥신각신하는 줄다리기에 엄숙함을 유지하던 기사들마저 희한하게 쳐다볼 정도였다.

하지만 태리는 기를 쓰고 우겨서 클로드를 말싸움에서 이겨 냈다. 그가 뾰로통해진 게 느껴졌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야만 했다. 무슨 오해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황제는 전처럼 또 의아해하는 기색이면서도 이번에도 역시 아무런 말도 묻지 않았다. 구태여 파내려 하지 않고 덮어 주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공주,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 나서게 되는 건 이곳에 온 뒤로 처음 아니오?”

“네. 안 그래도 저리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서 나왔는가 했습니다.”

이자리스에서조차 태리는 저만한 숫자의 인원을 한꺼번에 상대한 적이 없었다. 폐허의 마법사들에게 둘러싸였을 때도 저것보단 적었고.

그런데 여긴 귀족만 모였는데도 저토록 득실득실하다니. 과연 제국다운 규모였다.

대수로울 것도 없다며 황제가 가벼운 농담을 건넸다.

“자기들끼리 저리 모이기가 흔치 않은 일이라서 그렇소. 내가 통 무도회를 열어 주질 않거든. 난 그런 촌스러운 자리는 안 좋아하오. 젊은이들이야 만나서 정분이 날 수도 있겠지만 알 게 뭔가. 나는 젊은이가 아닌걸.”

공주는 어떠하냐는 질문에 태리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춤을 출 줄 몰라요.”

“의외인데. 그대의 아비는 춤을 무척이나 잘 췄소. 백학처럼 우아하게 추는 편이었지.”

“그렇군요.”

“아무튼 여기까지 오기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나와 주어서 고맙소.”

“아닙니다.”

“음? 아닐 리가 있나. 필시 어려운 결심이었을 텐데.”

물어야 할 만한 것은 눈감고 넘어가면서도 이런 것은 또 재차 꼬집고 가는 것에 황제의 은근한 예리함이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태리는 재차 확고히 부정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당연히 이해는 한다. 사방 천지가 적으로 깔린 자리에 나서려 하는 게 남들 눈에는 무모하게 비칠 수 있다는 것.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딱히 손해 보는 것도 아닌데 이것은 불필요한 용기로 느껴질 수도 있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그냥 조용히 지내면 황제의 귀빈이라는 자리와 공작가의 비호로 둘러싸여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태리는 그 위치를 벗어나면서까지 제 발로 야생의 우리로 걸어 들어왔다.

그만큼 커다란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자리, 정치적이고 공식적인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파급력 있는 무대. 그런 장소들이 지금의 그녀에겐 어느 때보다도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이라면 결코 올라가지 않을 무대겠지만, 가진 게 없어서 잃을 것도 없는 입장에서는 출연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언제나 보아도 참 씩씩하군. 긴장되지는 않소, 공주.”

“긴장됩니다. 심장도 빨리 뛰고요. 하지만 꼭 불안할 때만 맥박이 빨라지는 건 아니니까요.”

“그럼?”

“기대감이 커져도 전 그렇던데요.”

“……!”

연거푸 캐물었음에도 한결같은 태도로 아니라며 흔들리지 않더니, 도리어 역습하듯이 기대된다고 받아치는 공주를 어찌해야 할지. 황제의 눈동자가 흥미롭다는 감정으로 일렁였다.

“기왕 여기까지 온 거 함께 들어가도록 하오.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신료들 덕에 늘 회의장에 제일 먼저 입장하는 황제라오. 그럼 갑시다. 부디 기대할 만한 발언을 부탁하오.”

곧 문인지도 몰랐던 벽이 좌우로 밀리면서 커다란 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장내에 울려 퍼졌다.

황제의 입장이 선포되자마자 계단 위에서 씨름하던 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경주마처럼 후다닥 뛰어 속히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회의장 내부는 좌우로 나뉘어져 있던 계단과 똑같이 정치색에 따라 좌우로 구분되어 있었고, 황제가 자리한 연단을 중심으로 안테나 모양으로 좌석이 퍼져 나가는 모양이었다.

태리가 안내받은 자리는 측면의 자리로, 눈에 잘 띄는 자리는 아니었으나 비교적 황제에게 훨씬 가까웠다.

시종은 이후에 차례가 되면 중앙으로 나설 수 있도록 안내해 드리겠다는 말과 함께 모른 척 그녀의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클로드를 다른 기사들과 함께 힘으로 들어서 끌어내 갔다.

금종이 땡 하고 울리면서 회의 전의 짧은 예식 기도가 시작된다.

마법사였으나 태리는 더욱 철저히 상대방의 문화를 예우하듯 다른 이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아 의식에 참여했다.

경건한 기도가 끝나고 여신상의 한 팔에 걸쳐진 저울 위에 금종과 막대기가 올라가 균형을 맞추었다.

그것이 그 자체로 공정과 정의의 상징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모두는 저울이 제 쪽으로 기울어지길 바랐다.

회의는 월마다 정기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사안들을 우선순위로 삼아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그동안 태리는 제 순번이 올 때까지 있는 듯 없는 듯 가만히 숨죽여서 제국의 운영 방식에 대해 보고 익혔다.

소문대로 황제는 유능했고 신하들은 그보다는 덜 유능했지만 어쨌거나 제국의 방식은 상당히 현대에 가까운 형태였다.

현대로부터의 멀고 가까움이 발전의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만일 이자리스가 무사히 살아남아 재건에 성공한다면 이들의 시스템을 일부분 배워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에는 아마 내가 이곳에 없겠지.’

흐름이 순리대로 흘러간다면 이자리스의 부흥은 그녀가 사라지고 난 미래에 벌어지게 될 일. 그럼에도 태리는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흰 손수건 위에 재빨리 깃펜으로 갈겨 메모했다.

군데군데 묻어 있던 붉은 립스틱 자국과 새롭게 끼적인 푸른 잉크의 나열이 서로 무늬처럼 어울려져 갔다.

“자, 그러면 이제 한 가지 문제만이 남았는가.”

그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양만 많고 시시했던 이야기들이 모두 마무리되고 어느덧 회의는 단 한 가지의 논쟁만을 목전에 남겨 두고 있었다.

도둑 공부를 하며 컨닝 노트를 만들기에 여념이 없던 태리의 자유 시간도 끝이 났다. 마침내 그녀의 차례였다.

“문제가 되었던 그 피습 사건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오. 경들의 과한 의견 충돌로 당사자인 공주를 어렵게 자리로 불렀으니, 모쪼록 현명한 결론을 함께 내 보도록 합시다.”

앞으로 나서도 좋다는 허가에 태리는 제자리에서 일어나 증인석과도 비슷한 회의장의 중앙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바닥을 흘러가는 드레스의 물결과 맨얼굴을 드러내며 넘어가는 모자의 베일은 등장을 한껏 극적인 풍경으로 꾸며 주는 장치다. 그래서인지 중앙에서부터 쏟아지는 샹들리에의 빛이 공주에게로 집중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녀가 방금 막 그림 속에서부터 걸어 나왔다고 잠깐 혼돈하게 되었다.

그만큼 비현실적인 미모였다. 시선을 장악해 버리는 그 아름다움에 모두가 놀랐다.

귀족들의 대다수가 공주를 이 자리에서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반향은 더욱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어떻게 저것이 이단의 마법사란 말인가.

저주받은 숲속에 숨어서 사는 마법사 일족들은 하나같이 흉악한 외모라고 했는데? 밤마다 솥단지를 펄펄 끓이며 끔찍한 목소리로 낄낄댄다고 했는데?

그러나 그들 앞에 서 있는 것은 진주로 빚어낸 것처럼 전신에서 은은한 빛을 발산하고 있는 미녀였다. 결점 하나 없는 피부 위에 눈을 깜빡일 때면 촘촘한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나풀거렸다.

정녕 우리가 알던 그 마법사가 맞다고?

지금까지 무엇을 알아 왔는가. 감탄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고루한 편견은 스스로 바스락거리며 귀퉁이부터 부서졌다. 모두가 할 말을 잃은 가운데에 간혹 이런 목소리도 스쳤다.

“맙소사. 전혀 음침하지도 않잖아!”

음침? 내가 왜 음침? 태리의 입에서 작은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은 음침하지 않다. 비록 납치극을 꾀하고 범죄자 네 명을 도끼로 찍고 발로 차고 계단에서 밀고 총질을 할 뻔도 했지만 그렇게 음침한 사람은 아니었다.

“공주여.”

“예, 폐하.”

“그대는 궁으로 돌아오던 밤중에 피습을 당했소.”

“그렇습니다.”

“그것이 정말 광신도에 의한 짓이라고 생각합니까.”

“습격한 사내들이 저에게 스스로 그렇게 밝혔습니다.”

“그들은 어찌 된 것이오.”

“죽었죠.”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산뜻한 어조와 그렇지 못한 내용에 좌중은 크게 술렁인다. 타인의 죽음을 기쁘게 입에 올리는 공주라니. 누군가가 따져 묻듯 외쳤다.

“지금 살인 고백을 하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제가 죽이지 않았는걸요. 처음 세어 봤을 때 괴한은 총 여덟 명이었고 그중에 넷이 도망치다가 자결을 했습니다. 제가 다소 상해를 입히긴 했지만 그런 상처로는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없잖아요.”

“어떤 상해였습니까.”

“도끼로 찍었죠. 발로 몇 번쯤 차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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