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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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번뇌로 망설이던 클로드가 다시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남들 앞에서 손을 잡으면서까지 내가 옆을 지키는 게 도움이 되겠느냐는 뜻이었다. 누구도 축복하지 않는 관계인 건 별반 다르지 않았어도 이곳은 발로란이기에 더 많은 흉과 수군거림을 듣게 되는 쪽은 태리가 될 것이다.

이자리스에 가면 상황이 반대가 되겠지만 지금 두 사람은 궁으로 가고 있었다. 발로란의 심장 속으로. 발로란의 황제 앞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

“이미 엄청 도움 돼요. 사실은 한순간도 도움이 안 된 적이 없었어. 처음 이자리스에 왔을 때, 난 그곳에 당신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를 찾아와 줘서 기뻤어요.”

말해 놓곤,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속마음에 부끄러워졌는지 태리가 발그레하게 웃으며 구름 속으로 숨는 햇살처럼 그의 어깨 뒤로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이런 얘기 한 거는 안시한테는 절대 비밀이에요, 하고 속삭이며 다시 꾸물꾸물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는 그녀와 달리 전혀 웃지 못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코앞에 와 있었다.

쪽.

“……뭐예요, 또 갑자기.”

“유혹이었잖아.”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여기서 그 말 듣고 참을 수 있는 사람 나와 보라고 해.”

“많겠지.”

“많아? 누구. 그놈이 누군데.”

“있어. 하여튼 많아.”

티격태격하던 대화가 몇 번쯤 오가다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렇게나 조심스러웠던 클로드가 어디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저돌적으로 변해선 그녀의 입술을 깨물겠다고 몸부림쳤기 때문이다.

반쯤 장난으로 시작했던 것 같은데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을 벌려 주고, 섞이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어느덧 그만둘 수도 없게 되었다.

“수색하지 않아도 된다. 데본셔가의 마차다. 통과시켜라.”

정신없이 엉켜 있던 그들을 깨운 건 성문 개방을 명령하는 수문장의 뚜렷한 외침 때문이었다. 네 개의 바퀴가 성문의 높은 문턱을 넘어갈 때 마차가 덩달아서 크게 덜컹거렸다.

놀란 태리가 먼저 가슴팍을 밀었고, 클로드가 그 직후 낮은 신음을 흘리며 구석 끝까지 물러났다. 스스로 자제하지 못하고 또 짐승 같은 놈이 될 뻔했던 것에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어떻게 변한 건지 머릿속까지도 열기로 후끈후끈했다.

정신이 나갔나. 제대로 돌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아직은, 아직은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정도다. 자기 암시를 걸듯 중얼거리던 그가 괴로움 속에서 얼굴을 떼며 마찬가지로 가쁜 숨을 고르고 있는 태리에게 당부하듯이 애원했다.

“앞으로 이런 곳에서는 나한테 그렇게 웃어 주지 마. 진짜 큰일 날 것 같으니까.”

“내가 웃은 게 뭐가 잘못이라고…….”

“말 좀 들어.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알겠어?”

“안 해!”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번번이 반복될 때마다 이 관계가 더욱 진실되게 느껴진다고 하면 그건 너무 모순적이려나.

살짝살짝 조금씩만 할걸. 엉뚱한 후회를 하던 태리는 순간 퍼뜩 스치는 생각에 꺄! 하고 소리를 지르며 클로드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 들여다보았다가 얼굴이 낭패감으로 물들었다.

“이럴 줄 알았어. 다 번졌잖아!”

애써 칠해 놓고 나온 짙은 색의 립스틱이 그의 입술 위로 다 묻어 버렸다. 그것도 가지런히 번진 것도 아니고 마구마구 번져 버려서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둘이 안에서 무슨 짓을 한 건지 다 알 정도였다.

“일부러 진하게 바르고 나온 건데 어떡해.”

“나한테 묻었어? 어디.”

그제야 클로드도 손등으로 입 주변을 쓱쓱 닦아 보곤 상황을 파악했다. 태리는 투덜거리며 손수건을 뽑아내서 건넸다.

“엄청 묻었어. 주변까지 다. 빨랑 지워.”

그런데 힐끗 손수건을 내려다보곤 눈길을 묘하게 피하면서 받지 않는다. 뭐 하는 거야. 태리가 손수건을 든 손으로 그를 쿵 때렸다.

“지워요, 얼른!”

“꼭…… 그래야 되나?”

뭐라고? 경악해서 노려보니 슬금슬금 눈치를 보면서 자기 손으로 지우는 듯한 시늉을 한다. 물론 연기다. 그런 척만 했지 립스틱 자국은 조금도 지워지지 않았다.

지금 본인 얼굴이 얼마나 야해 보이는지 자각이나 하고 피우는 고집인지. 태리는 당장 지우라고 소리를 빽 지르며 손톱을 세운 고양이처럼 손수건을 쥐고 달려들었다.

힘줘서 박박 문지르려고 할 때마다 클로드가 발버둥을 치면서 저항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격렬한 몸싸움으로 인해 마차가 끼익거리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외부에서 보면 좌우로 묘하게 요동을 치는 것 같은 형국이라서, 수상한 시선을 받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당황해서 몇 번이나 마차의 벽면을 두드렸던 안시는 움직임이 좀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뼈를 깎는 고통으로 마차의 외형에 환술을 걸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푸른 마차는 다시 호수 위를 달리는 것처럼 고요해졌다.

‘네놈을 반드시 죽이겠다!’

그리고 안시는 클로드의 살해를 결심했다.

* * *

클로드가 손을 붙잡아서 마차에서 내려 준 뒤, 그 손은 떨어지지 않고 자연스러운 팔짱으로 변했다. 신사의 리드에 따라 왈츠를 추는 아가씨처럼 태리는 잘 모르는 길을 그의 팔에 의지해서 천천히 걸었다.

방패병들이 경례를 올려붙이는 출입구를 지나쳐 마침내 오늘의 무대가 있을 의사당 안으로 출입한다.

촌스럽게 이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들어가자마자 쏟아지는 크리스탈 조명과 금박으로 도배된 천장에 태리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눈알을 절제할 수가 없었다.

층고가 까마득하게 높아서 공기가 서늘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내부였다.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1층은 맹수의 갈비뼈 형태를 따다 만든 듯한 골조가 떠받치고 있어서 맹수의 입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공간적으로 깨닫도록 해 준다.

여기가 제국 정치계의 집결지. 알고는 있었지만 태리는 그 속을 두 발로 헤쳐 나아가며 자신이 진정으로 권력과 특권의 자리에 불려 나왔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돈이 아주 많구나. 넘쳐흐르네.’

이중에 일부만 떼어 줘도 이자리스의 구시가지의 채 복원하지 못한 가정집을 몇 개는 더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지나가는 조각상을 보고도, 그 조각상의 눈에 박힌 보석을 볼 때는 더더욱 아쉬운 입맛을 다시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좌우 양측에서 올라갈 수 있는 거대한 그랜드 계단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위에 바로 대회의장의 입구가 있었는데, 부서진 한쪽 문을 아직 고치지 않아서 옥에 티처럼 볼썽사나웠다.

“저 사람들, 일부러 안 들어가는 거죠?”

“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잘 차려 입은 귀족들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선 그 양측의 계단 위에 바글바글 몰려 있는 중이었다. 반이나 깨져 있는 문을 열지 못해서 서 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변명일 테니, 행동은 고의적인 미적거림으로 해석되었다.

양측에서 살벌하게 튀는 눈싸움 때문에 미적거림의 이유가 무엇인지도 태리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왕당파는 우측, 공화파는 좌측에 서는 것이 불문율이다.

그렇게 보면 오른쪽 계단에는 교단을 신봉하는 봉건 귀족들이, 왼쪽 계단에는 그보다는 자유로운 신흥 귀족들이 서 있다고 봐야 했다. 광장에서 만났던 듀폰처럼.

“시작 전의 기 싸움이 대단하네요.”

“원래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즐거운 겁니다. 폐하께서 도착하실 때까지 저기서 죽치고 있을 겁니다. 먼저 가면 지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못난 놈들다운 발상이죠. 우린 이쪽으로 갑니다.”

장담하는데 저딴 짓거리는 몇백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말에 태리는 천 년이 지나도 영원하더라는 화답을 해 줬다.

다정하게 팔짱을 낀 남녀는 그랜드 계단을 지나쳐서 다른 복도로 돌아갔다. 카펫이 깔려 있긴 했으나 인적 하나 없는 그 조용한 길을 끝까지 걸어간 뒤 작은 문을 열어, 건너편에 숨어 있던 비좁은 통로를 통해 위로 올라간다.

되게 은밀해 보이는데 여긴 어딜까. 이렇게 맘대로 누비고 다녀도 되는 건가?

태리는 의사당 안에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 더 자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벽이나 천장에 금칠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님에도 그러했던 것은 이런 식의 비밀 루트 느낌이 나는 통로가 대게 ‘누군가의 전용’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이쪽으로 와도 되는……”

말이 끝나기 전에 촘촘히 나 있던 계단이 먼저 끝이 났다. 거기서부터 공간은 다시금 넓어졌고 태리는 제일 먼저 눈으로 들어온 번쩍번쩍하는 빛에 이마를 찌푸리며 손바닥으로 눈을 살짝 가렸다.

환한 빛에 적당히 시야가 익숙해졌을 무렵에는 그 빛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충분한 거리까지 도달해 있었다.

눈을 부시게 했던 그것은 다름 아닌 등불에 반사된 수십 개의 예식용 투구였다. 그것을 머리에 쓴 장엄한 근위 기사들이 둥글게 모여 서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누군가를 호위하듯이.

아니나 다를까, 그들 가운데에는 입장을 준비하고 있는 황제가 홀로 솟아 있었다.

열두 개의 보석이 박힌 신성한 왕관을 쓰고, 한 손에는 보주가 달린 긴 홀을 잡고, 어깨 위에는 금실로 수놓인 붉은 망토를 걸친 채.

다가오는 인기척을 감지한 기사들이 장식용인 줄 알았던 검을 일제히 뽑아 태리와 클로드의 방향으로 겨누는 동시에 황제의 고개가 의아하게 돌아갔다.

클로드를 보았을 때는 그런가 보다, 했던 그녀의 평온한 눈썹은 태리를 알아본 즉시 묘하게 구부러져 올라갔다.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태리는 빠르게 사태를 파악했다.

이 길은 기사들이 황제를 본궁에서부터 의사당으로 호위할 때 이용하는 황제의 전용 통로이며, 클로드도 한때 했었던 일이고 원래대로라면 오늘의 그도 저곳에 섞여 있어야 했다는 것을.

어쩐지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길이 아닌 것 같아 보였는데 헷갈리지도 않고 거침없이 막 들어오더라니.

내가 이쪽으로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는, 결백함을 눈동자에 한껏 덧씌운 상태로 태리는 황제의 앞으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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