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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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어떤 날인지, 공주님이 어디에 가는 건지 알음알음 모두 알고들 있어서 걸어가면서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그녀에게 조심히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유독 많이 해 주었다. 

태리는 일일이 끄덕이면서도 누군가를 찾듯이 두리번거렸다. 그것을 알아챈 클로드가 어깨 너머에서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먼저 출발하셨습니다. 궁에서 보시게 될 겁니다.”

“아.”

그렇지, 그렇겠구나. 자리가 자리인 만큼 당연히 공작도 참석하시겠지. 지켜보게 될 텐데…… 가서 잘할 수 있으려나. 딱딱해진 얼굴에 수만 가지의 근심과 우려가 뒤덮였다.

“말만 그럴싸하게 정무 회의지, 사람 바글바글한 무도회와 똑같은 일개 행사일 뿐입니다. 춤추는 대신 앉아 있는 것뿐이고. 어려워할 거 없습니다.”

“그렇지만 난 그 무도회란 것도 뭔지 모른단 말이에요.”

“데뷔탕트는 해 봤을 거 아닙니다.”

“그런 거 안 해 봤는데.”

“…….”

“갑자기 자신감이 팍팍 떨어지려고 그래요.”

“몬스터 앞에선 안 그랬잖습니까.”

“그거는 원래 잘했던 거를 계속 잘한 거니까 무효고요.”

올림픽으로 치면 주종목 같은 거였지.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마치 국가 대표 수영 선수한테 스키점프 하라고 리프트 태워서 설산 위로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란 말이다.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정문으로 나오며 태리는 양 손가락을 두 개씩 펴서 ‘ㅠㅠ’ 하고 우는 것 같은 손동작을 삐쭉거리는 입술과 함께 눈 밑에서 만들어 보였다.

두 사람이 도란도란 말하며 다가오는 발소리에 공작 대신 손님의 출타를 책임 맡은 집사가 마차 옆에 서서 미리 문을 열고 대기했다.

서로의 대화에 집중해서인지 태리와 클로드는 마차와의 거리가 가깝게 좁혀져도 전혀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집사는 새삼 감개무량한 감정에 휩싸였다.

‘우리 도련님이 정말 약혼이란 것을 하셨구나.’

얼마 지나면 곧 결혼도 하고 그러시겠지. 성욕 제거남이니, 고자이니 같은 망측한 딱지가 붙었던 게 아득히 먼 옛날 일로만 느껴져 코끝이 찡해져 왔다.

며칠 전 도련님이 공주님과의 약혼 사실을 공작 부부의 응접실로 쳐들어와서 자랑, 아니, 전했을 때만 해도 곁에서 차를 따르고 있던 집사는 ‘그것이 말이 될 수 있는 일인가? 이자리스인데? 마법사인데?’라고 의심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공작저의 식구들이 그러하듯 온전히 받아들인 상태였다.

솔직히 막내 도련님이 하시는 걸 보면 믿지 못한다는 게 더 말이 안 될 정도로 그는 공주님에게만 관심을 쏟고 있었다. 아주 잠깐씩 시선이 다른 곳으로 벗어날 때도 그녀를 위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경우뿐이다.

다만 아직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실이 아니었으므로 말이 새 나가지 않도록 단속을 해야 한다는 점이 저택 관리를 도맡은 이로서 다소 힘든 직분일 따름이었다.

일단은 세상 물정도 모르고 신난 꼬맹이들의 수다가 골치 아팠고, 그다음으로는 저 도련님의 단속이 제일 힘들었다.

“정무 회의 때 항상 고정으로 앞줄에 앉는 깐깐한 사람들은 열 명 중의 아홉이 가발입니다. 다들 공작, 후작에 직책도 재무 대신, 법무 대신 이런 사람들인데 죄다 가운데에 머리가 없단 소립니다. 아, 아버진 아니고. 나도 아니고.”

클로드가 두 손으로 자기 머리를 힘껏 밀어 이마 끝까지 보여 주었다.

“……안 웃깁니까? 아무리 잘난 척해 봤자 다들 대머리란 소리였는데. 들으면…… 웃지 않을까 했는데.”

저렇게 체면과 웃음을 자꾸만 교환하려고 하니까. 지금도 저러실 줄 알았으면 ‘제발! 아니 되오!’ 하면서 말렸을 텐데 이미 그의 도련님은 공주님의 웃음을 위해 소공작이라는 체면을 쉽게 내다 버렸다.

그리고 정적이 흐른 3초 뒤에 공주님은 도련님의 소원대로 웃었다. 활짝.

웃겨서 터진 웃음이 아니라 기분이 좋아져서 움푹 파인 볼우물이었다. 몸 안을 가득 채웠던 긴장도 경계도 그 순간에는 날아간 것처럼 보였다.

“머리가 없다고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되는데.”

“하지만 당신한테 뭐라고 할 때마다 그 가발이 단체로 흔들릴 거라고 생각해 보면 무섭지도 않지.”

“그건 맞아.”

태리는 전보다 더 크게 웃으며 마차에 올라탔고 클로드가 냉큼 따라서 들어갔다.

처음 이 나라에 들어올 때, 그는 마차 밖에 서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위치가 달라졌다. 동석을 해도 괜찮은 관계가 되었다.

덕분에 밖으로 밀려나게 된 안시는 문이 닫히기 직전까지도 ‘으! 저런 걸로 공주님을 웃기려 해?! 하지만 성공했잖아!’ 하는 환멸의 표정을 지었고, 집사는 앞으로 이 한 몸이 닳을 때까지 더 철저히 입단속에 힘쓰겠노라 다짐한다.

진짜로 웃긴 내용이었으면 그러지 좀 마시라 울부짖었을 텐데, 안 웃기니까 더욱 웃기려 했던 도련님의 진심이 느껴져서 차마 임무를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 * *

정무 회의가 열리는 첫째 주임을 광고라도 하듯이 수도 거리에는 아침 일찍부터 귀족들의 문장이 그려진 마차가 빈번히 굴러다녔다.

그래서인지 공작가의 푸른 문장이 그려진 마차가 지나가는데도 보행자들은 당연히 그것도 궁으로 가겠거니 알고 그 방향으로 길을 비워 준다.

어쩐지 그 일률적인 모습들이 흥미로워서 태리는 불투명한 커튼이 쳐진 창문 밖으로 길거리를 구경하며 창가에 팔꿈치를 기댔다.

맞은편에 있던 클로드가 불쑥 옆자리로 옮겨 앉더니 자길 좀 보라는 듯 툭툭 두드려 왔다.

“왜요…… 읍.”

따뜻한 무언가가 입술 끝에 와락 덮치듯 닿았다가 가벼운 마찰음을 내고 떨어졌다.

수도원에서 돌아온 이후로 꽤 자주 당하는 수법이라 태리는 눈을 흘겼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 눈과 코끝에 차례대로 짧은 입맞춤이 찍히고 지나갔다.

앗, 뭐야, 정말. 태리가 클로도의 팔뚝을 크게 꼬집었다.

“자꾸 장난치지 마요.”

“난 장난 아닌데.”

“또 그런다, 또.”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닿고 싶어 하는 건지. 더 세게, 더 아프게 꼬집었는데도 클로드는 아랑곳없이 고개를 내려선 실크 드레스의 끈이 걸쳐져 있는 동그란 어깨 위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깜짝 놀란 토끼처럼 움찔했더니 곧바로 고개를 꺾어서 목과 귓불이 맞닿는 연약한 부위에 대고도 쪽 하는 입맞춤이 붙었다.

턱 밑에 쓸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간지럽고, 살갗에 붙었다가 떨어질 때 나는 소리도 부끄럽다. 태리는 맥박이 콩닥거리는 손으로 클로드의 등을 움켜잡았다.

“나 할 말이 있단 말이에요.”

멈추게 하려고 잡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자세가 겹쳐 있다 보니 도리어 그에게 더 안기는 것처럼 되었다. 그 점을 느낀 클로드의 목울대가 툭 불거져서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먼저 쏜살같이 말해 버렸다.

“가서 놀라면 안 돼요.”

“무엇을?”

“경우에 따라서 내가 좀 되바라지게 굴 수도 있으니까. 내가 거기서 어떤 민감한 말을 해도 나서지 말라고요.”

“거들려고 그랬는데?”

“아니.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클로드는 특별히 사람들에게 불친절하다거나 이유 없이 누군가를 괴롭히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단 하나, 싫어하는 인간만큼은 확실히 구분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런 인간이 제 앞에 나타나면 곧바로 성격이 삐뚤어져선 자그마한 인정도 베풀려 하지 않는다.

마치 올곧게 엇나가는 혁명가처럼 하고 싶은 말을 다 퍼붓고, 본인이 얼마나 팔자대로 살 수 있는지를 성심성의껏 보여 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가 거들어 주었다간 여러 명의 혈압을 올려 쓰러지게 만들겠지. 그것보단 다른 걸 도와 달라며 태리가 새끼손가락을 세워 내밀었다.

“대신 이거 하나는 꼭 약속. 무슨 말을 해도 내 편 들어 주기.”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해서일까. 손가락을 걸 필요도 없다는 듯이 클로드는 이제는 완전히 입버릇이 되어 버린 한 문장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난 약혼자입니다.”

“그렇게 뻐기면서 말할 때마다 엄청 웃긴 거 알죠?”

“가문에 속한 일원들을 모두 끌어모아서 공주님 의견에 표를 던지라고 협박해 놓겠습니다.”

“누가 들으면 당신이 집안의 제일 큰 어른인 줄 알겠어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다 큰 남자를 귀엽게 바라봤더니, 본인에게는 절대적인 진심이었는지 새끼손가락이 아닌 그녀의 손 전체를 손바닥 안으로 감싸 잡으며 약속했다.

“그곳에 있는 누구도 공주님을 상처 입히지 못하도록 할 겁니다.”

이렇게 주저 없는 목소리를 들으면 태리는 종종 까닭도 없이 펑펑 울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지금도 눈이 시큰해져서 스스로를 달래고자 잡혀 있는 손을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근데 손을 왜 잡아요?”

“허전해 보여서. 늘 여기 무기가 있었잖습니까. 총이라든가, 도끼라든가. 지금은 없으니까 내가 대신 다 하려고.”

그러면서 은근슬쩍 깍지 모양으로 바꾸면서 짐짓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면을 바라보는데, 살갗을 데우는 따뜻한 체온과 매만져 주는 단단한 손가락의 느낌이 좋아서 태리 또한 끝까지 제 손을 밀어 넣어 잡았다.

나란히 앉아서 서로 손을 꼭 잡고 있으면 커다란 어깨에 머리를 기대기에도 편안했다. 옆머리를 툭 클로드의 어깨에 떨어트린 태리는 마차의 흔들림을 느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의 셔츠에서는 노릇노릇하게 익은 오후의 향기가 났다.

반면에 정면을 응시한 채로 그 자리, 그 자세로 굳어 있는 클로드의 입 속은 갈증이 난 사람처럼 바짝 마른다.

게다가 떨려서 그러는 건지 손바닥 사이로 자꾸만 땀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와 닿는 게 좋았지만 만지고 나면 늘 이렇게 후덥지근해지는 통에 이젠 이게 체질인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얼굴이라도 비벼지지 않으면 그나마 낫겠는데, 태리는 맞잡은 손을 흔들거리면서 작은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댄 채로 놀고 있었다.

내가 지금 체온 조절이 잘 안 돼서 그런데 그런 건 하지 않아 주면 안 될까 싶다가도, 막상 이보다 조금이라도 떨어지게 될 것을 생각하면 못 견딜 것 같아서 곤혹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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