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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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신음 같은 낮은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입술이 깨물리는 통증과 함께 태리는 또다시 몸이 뒤로 눕혀진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의 키스였다. 짐승처럼 달려들어서 아랫입술을 머금었던 클로드가 몇 초도 되지 않아서 다시 황급히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물러난 그는 또다시 실수를 저질렀다는 자책 어린 얼굴이었으나, 부추기듯이 끔뻑거리는 맑은 눈 앞에선 도저히 못 버티겠는지 다시 불같이 날아와선 턱 끝을 눌러 입을 벌려 내곤 유려한 혀로 입속을 휘젓고 나갔다.

‘내가 또…….’

얼마나 글러 먹은 인내심인지, 초 단위로 이성을 잃었다가 되찾기를 반복하는 것 같다. 이러다간 기어코 큰 사고를 칠 것 같은데 문제는 본인이 그것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놀란 건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태리는 그가 밀친 자리에 여전히 누워 있었다.

커다란 몸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졌지만 널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보여 주는 늑대처럼, 클로드가 빌듯이 이야기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안 한다고 했는데 내가 지금 좀…… 몸이 이상해. 말을 잘 안 들어. 그래도 당신이 기다려, 라고 말하면 난 계속 기다릴 거야.”

피부에 비벼지는 머리칼이 부드러워서였을까. 그의 절제는 거꾸로 애정을 갈구하는 큰 짐승의 어리광처럼 느껴졌다.

태리는 손을 뻗어 시무룩해 있는 그 늑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감겨들며 약간의 서늘함을 전달하는 게 기분 좋았다. 제게 내내 열병을 옮긴 사람인데 서늘했으면 하고 바라는 부분은 이리 서늘한 것이 신기했다.

기다리는 게 허락이라면 이미 해 주었는데. 콧잔등에 찡긋거리는 주름을 만들며 그녀가 그의 머리맡에 소곤소곤하는 작은 목소리를 퍼트렸다.

“지금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어요.”

“……!”

진주가 들어 있을 것 같은 예쁜 조개를 줍고도 열어 보지 못하고 손에 쥐고만 있었던 남자는 ‘얼른, 이제 열어 봐도 돼.’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태리는 순식간에 자신을 타고 오르는 어깨를 보았다. 그것이 높이 올라갔다가 코앞까지 다가오는 과정까지도 빠짐없이. 그러는 동안 클로드는 그녀의 몸을 제 것으로 뒤덮고 복숭앗빛 뺨을 어루만지며 몇 번째인지도 모를 입맞춤을 다시 해 주었다.

그의 혀가 조심스럽게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는다. 전과 같이 격렬하게 튀는 듯한 불꽃은 없었지만 느리고 깊은 입맞춤으로도 흥분은 쉽게 차올랐다.

한참이나 서로를 간절히 머금었던 입맞춤은 찰박이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남아 있는 여운을 코끝에 톡 하고 가볍게 부딪힌 클로드가 뜨겁게 잠겨 든 목소리를 꺼냈다.

“왜…… 헤어져야 해?”

“왜냐면 혼자 남겨 두게 될 것 같으니까.”

젠장. 주저 없는 명료한 이유에 그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가녀린 어깨에 이마를 대고 무너진다.

태리는 두 팔 가득 제게로 쏟아져 내린 남자의 등을 감싸 안았다. 이전과 똑같이 헤어짐을 예고했음에도 손바닥에 닿은 넓은 등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하거나, 화가 나 있지 않았다.

다만 원망과 불만이 섞인 반박만큼은 되돌아왔다.

“앞으로의 일은 누구도 모르는 겁니다.”

“하지만 난 내 앞길에 대해 잘 아는걸요.”

“우리가 헤어지지 않을 수도 있어요. 내가 헤어져 주지 않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 점은 항상 유의할게요.”

“끝까지 말 잘 들을 거라고도 약속 못 합니다.”

“그럼 오늘만이라도 내가 시키는 대로 뭐든 다 해 줘 봐요.”

속삭이듯 다독이던 공주의 눈이 가늘어지며 박꽃처럼 하얀 웃음꽃이 핀다. 그 미소는 클로드의 마음을 찢듯이 애타게 만들었다. 놀라울 정도로 이성이 또렷한데 정신이 나갔을 때보다도 더욱 광적인 욕망에 취해 가고 있었다.

두꺼운 무릎이 가느다란 종아리 사이로 파고들며 드레스의 밑단을 끌고 올라갔다.

맨살에 찍히는 입술과 치마 속을 파고드는 손길이 느껴진다. 클로드가 얼굴을 파묻고 민감한 곳들을 찾아다닐 때마다 태리는 사람의 손길을 부끄러워해 움츠리는 꽃처럼 몸을 말았다. 그러면서도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도록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그 모든 것들이 사랑스러워서 복잡했던 끈을 풀어 헤치고 마침내 끌어 내렸을 때는 클로드는 처절하게 어리석은 자가 되어 후회했다.

이걸 사랑이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었는데. 이게 사랑인지는 모르겠다고 했었는데…….

‘모르긴 뭘 몰라, 이 등신이.’

이런 주제에 사랑이 아니라고. 이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사랑이란 말인가.

“……사랑해.”

굴곡이 드러난 얇은 눈꺼풀에 입을 대며 그는 뒤늦게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바로잡았다. 눈을 감고 있던 태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자신이 분명히 그 소리를 들었음을 전달했다.

나도. 나도 그래. 매달리듯이 안겨 들며 그녀는 입 안에만 고여 맴도는 그 말을 수도 없이 되뇌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흘러 나가 그에게 닿지 못하도록 아프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사랑에는 오해의 여지가 없다. 이 밤에도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오해도 생기지 않았다.

* * *

[황제 폐하의 귀빈인 이자리스의 공주, 광신도에 의해 숲길에서 피습당하다!]라는 소식이 일간지 첫 면을 연이어 장식했던 며칠 동안 황궁은 난리 통이 되었다.

그사이에 태리는 공작저에서 푹 자고 맛있는 것들로 배를 채우며 포동포동하게 살을 찌웠지만, 민감한 사안이 도마 위에 오른 것을 본 귀족 관료들은 이 일의 사후 처리를 두고 서로 다른 입장을 고수하느라 맹렬하게 서로를 물어뜯었다.

안 그래도 서로를 못 죽여서 안달이었던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에는 하루 종일 고함이 끊이질 않았고, 각자 야단스럽게 황제의 집무실을 들락날락거리며 자신의 주장이 더 옳다고 피력했다.

“대제국의 망신입니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야만적인 무리가 되었어요! 폐하의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어찌 그런 짓을……!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신에 대해 엇나간 믿음을 가진 자들이 언제고 이런 큰 사달을 낼 줄 알았단 말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앞장서서 큰 소리를 낸 것은 광장에서 그간 성대 근육을 단단히 수련해 온 공화파의 당수 듀폰이었다.

공주 피습으로 인해 화두에 오르게 된 종교적인 문제.

그가 광장에서 그리도 목청을 높여 외쳤던 백 마디의 말보다 하나의 사고가 더 큰 파장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던 공주의 장담 그대로였다. 그리고 듀폰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도 않았다.

허물을 덮듯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는 왕당파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사건을 공개적인 수면 위로 퍼 올렸고, 더불어 본인의 전통적인 주장대로 교단의 지나친 권력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폐하의 손님에게까지 손을 댔다는 것은 현재 이 나라에서 종교가 얼마나 도를 넘어선 범위까지 와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신의 이름으로 끔찍한 일을 자행해 온 자들을 눈감아 줬던 모든 행위를 우리는 지금 당장 중지해야 합니다!”

“허참. 비약이 심합니다, 듀폰 경! 그 공주를 결국 누가 구했는지 보세요. 우리의 성기사단장 아닙니까? 신의 기사가 구했으면 신께서 도운 것이지요. 그럼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지 대체 뭐가 문제요!”

“이런 천하의 몹쓸 인간들 같으니!”

“지금 나한테 삿대질했소?!”

그리고 그것을 보수적인 왕당파가 받아치면서 논쟁은 늘 그랬듯이 당과 당의 전쟁터가 되었다.

얼마나 끝도 없이 치고 박고 싸웠으면 몸싸움으로까지 번져 대회의장의 문짝이 하나 부서졌는데, 그로 인해 고매하신 귀족들의 언쟁은 발이 달리고 날개가 돋친 듯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누가 어떻게 구했고, 그래서 둘이 어떻게 됐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황궁의 높은 담벼락을 타고 넘어가 민가의 굴뚝으로 흘러 들어가고 신문 깨나 읽은 부모가 아이에게, 그런 부모의 젠체하는 말투를 흉내 내는 아이가 저보다 더 어린 동생들에게로 들려주어 그만 아주 인기 있는 구연동화가 되어 버렸다.

공작저의 식탁을 책임지는 주방장의 아들 소년 제티도 동생들에게 그렇게 하고 있었다. 아저씨들이 몰래 카드놀이를 하러 나오는 마구간의 뒤편 비밀 공간에 어린 동생들을 모아 두고 열띠게 이야기했다.

“나는 지금까지 공주가 나오는 동화책을 산더미만큼 읽어서 공주들이 어떻게 되는지 다 알아! 공주들은 말이야, 계모와 새언니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꼬부랑 할머니가 준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사람 다리를 얻은 다음에 바다에 빠져서 목소리를 잃어!”

물 밖으로 나온 생선처럼 생동감이 펄떡이는 말투에 어린 동생들은 저마다 두 손으로 경악한 얼굴을 감싸고, 머리를 쥐고, 조막만 한 발을 동동 구르면서 ‘꺄아! 어떡해! 공주님이 너무 불쌍해!’를 연발했다.

관객들의 훌륭한 호응에 제티는 더욱 신이 나서 떠벌렸다.

“자자, 하지만 해결할 방법은 있어! 바로 왕자가 찾아와서 청혼을 하면 돼! 아니면 뽀뽀를 하든가!”

동화책을 산더미처럼 읽고 자칭 공주 전문가가 된 1번가의 성의 소년 제티가 본인의 통통한 입술을 쭈욱 앞으로 내밀었다. 곱슬곱슬한 진저 머리의 동생 벨라가 주근깨 뺨을 물들이며 물었다.

“왜 공주님한테 뽀뽀를 해, 오빠?”

“왜긴. 원래 저주 같은 걸 풀 때는 다 그렇게 하는 거야. 그거를 뭐라고 하더라. 아! 털보 아저씨가 바게트 반죽을 할 때 항상 소금을 두 꼬집씩 넣으면서 하는 잘난 척 있잖아. 엣헴! 이게 바로 우리 집의 전통이지!”

전통.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제티의 이야기에서 그 어휘 하나만은 어른들의 말솜씨보다도 더 완벽하게 지금의 상황을 적중한 표현이었다.

위기에 빠진 공주, 공주를 위기로부터 구출한 기사. 공주의 저주를 푸는 기사의 키스.

떼려야 뗄 수 없는 그 단어들은 너무나도 유구하게 이어져 온 전통적인 조합이라 아무도 거기에 위화감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제티가 동화책에서는 다들 그렇게 하더라고 자랑했듯이 공주를 구출한 성기사가 그녀에게 키스를 했을 것이라고 엉겁결에 진실을 때려 맞힌 소문까지 함께 훨훨 창공을 날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걱정할 필요 없어. 우리 1번가 성에 놀러 와 계신 공주님은 기사님이 달려가서 벌써 구해 줬으니까! 이제 공주님은 행복하게 잘 살게 되실 거야. 왜냐면 기사가 구하러 와선 찐하게 뽀뽀해 버렸거든!”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그 기사는 덕분에 하루 종일 귀가 시뻘게져서 돌아다녔다는 후문이 있었지만, 황궁 안에서는 그러한 기류를 좋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시급하게 움직이며 더욱 열심히 싸워 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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