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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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더 도망치지 말라는 듯 일정한 걸음걸이로 간격을 좁혀 오던 그녀는 중간쯤에서 멈춰 서더니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그를 응시하다가 한참 만에야 말문을 열었다. 

더 다가오지는 않은 채로.

“나 물어볼 게 있는데.”

“진짜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아니, 사실은 좀 했는데! 금방 지우고 있……”

“혹시 결혼할 사람 있어요? 아니면 약속한 사람이라도.”

제 더러운 욕심을 알아챈 것 같아서 철렁했던 그의 가슴은 차분한 말씨에 아예 쿵 하고 굴러떨어졌다.

“결혼할…… 사람이라니?”

“혹시 있으면 나 때문에 신경 쓰일까 봐.”

“없어.”

혼란한 가운데에서도 입은 뇌보다 먼저 움직여 신속한 칼 대답을 내놓았다.

왜, 왜, 왜 그런 걸 묻지? 하고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다른 사람은 없다고, 아예 없다고 빛보다 빠르게 부정한 것에 태리가 희미하게 웃는 것도 같았다.

결혼이라니, 그건 왜? 맞게 들은 건지 클로드가 허둥지둥거렸다.

“다른 사람 같은 건 없습니다. 절대로 없고…… 이, 있어도 취소해야지.”

처음에 좀 멍청하게 대답한 것 같아서 다시 제대로 보완한다고 덧붙인 말에 그녀는 더 깊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얼핏 슬픈 기색을 내보이다가 곧 청아하고 담백한 목소리로 궁륭 천장을 울렸다.

“다행이에요. 나, 당신이 너무 필요하거든요.”

무언가가 스며드는 것을 방어하듯 눈을 감았다가 뜬 그녀는 이어서 또 한 번을 물었다. 이번에는 질문이 아니라 제안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괜찮으면 우리 계약 하나 더 안 할래요?”

“계약?”

“나한테서 원하는 거 있어요? 있으면 그걸로 주려고 하는데.”

원하는 것. 그 말에 자동적으로 머릿속을 꽉 채우는 하나의 욕망이 있었지만 클로드는 흠칫하며 칼로 도려내듯이 재빨리 그 생각을 몰아냈다.

그런 쉽고 나쁜 마음. 갖지 말자고 무던히 다짐하지 않았던가.

욕심내서 바라지 않기로. 절대 그녀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기로. 부담스럽게 하거나 힘들게 하지 않기로.

클로드는 더 물러날 곳이 없는데 뒷걸음질을 치다가 제단 가장자리에 허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찍히는 소리가 크게 들려서 짜증과 자책이 절로 흘러나왔다.

완전히 엉망진창이다. 왜 맨날 나는 이런 식으로……. 못난 놈은 뭘 해도 못난 짓만 하는 것 같아서 그가 마른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고단한 한숨을 쉬었다.

“원하는 거, 그런 거 없습니다.”

“있잖아요.”

“있어도 못 줍니다, 당신은.”

“그걸로 줄게요.”

얼굴을 쓸던 손이 멈칫했다.

뭐지? 방금 그건.

등골이 쭈뼛거리는 기이함을 느낀 클로드는 즉시 손을 내리고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선 공주를 바라봤다.

절벽 끝에 선 사람처럼 그녀에게선 물러날 곳이 없는 듯한 단단함이 느껴졌다. 그가 손으로 감쌌던 작은 뺨에서조차, 창백하게 도드라지는 흰 피부와 여전히 부어 있는 붉은 입술에조차 결연함이 배어난다.

그 모든 것들이 이상하고 불길했다.

턱 밑에서 불안하게 뛰고 있는 맥박 때문인지 목소리가 모래알처럼 버석거리며 흘러나왔다.

“아니요. 난 계약할 마음이 없습니다.”

가장 처음에 했던 계약조차 후회했다. 그걸 어떻게 찢어서 파기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여기서 하나를 더 하자고?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주면 되지. 그녀와 더는 그런 사무적인 관계로 묶이고 싶지 않았다.

“계약은 더는 안 합니다.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준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말만 하면 나는 언제고 다 줄 건데. 늘 항상 그런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그러니 내게서 뭔가가 필요하다면 차라리 말을 하라고 초조함을 담아 기다리자, 그의 바람대로 침묵하고 있던 그녀가 입을 뗐다.

“당신 사실은 성기사가 아니죠? 성검을 제대로 못 쓰잖아요.”

안일하게 서 있던 그의 가슴 한복판에 정확히 그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분명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것이다. 아니면 악몽이라도 꾸고 있든가.

처음에는 전신이 경직되었고 그다음에는 거인의 손아귀에 잡혀 멀리 내던져진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져 온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정신이 박살 나 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슨…… 소리를.”

“훌륭히 감추고 산 것 알아요. 비밀을 아는 것도 가족과 황제뿐인가요? 숨겨 줄 수 있을 만한 힘 있는 사람들이 옆에 있어서 다행이었네요.”

그가 신성력이 없어 성검을 다루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한다면 태리는 이 자리에서만 수십 가지를 쉬지 않고 외울 수도 있었다. 의심하지 않는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모든 것들이 의심을 가진 순간 하나하나 모두 결정적인 단서로 돌변하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어릴 때부터 이런 외진 수도원을 전전하며 숨어 다닌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죠. 난 처음부터…….”

호텔로 날 처음 만나러 온 그 순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고, 독하게 마음먹은 태리는 어렵게 터트린 폭로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려 했다.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한 것은 백지장처럼 질려 있던 클로드가 순식간에 가까워져 와 그녀를 강하게 밀어붙인 탓이었다.

무서운 표정으로 와서 하던 말을 가로막은 그는 태리의 팔을 붙잡고 아무 의자 위로 밀었고, 그 힘에 저항하지 않고 넘어간 그녀는 예배석의 긴 의자 바닥에 등을 대고 깔렸다. 흰 셔츠로 감싸인 가슴이 순식간에 그녀를 점령하듯 이마 위까지 덮어 왔다.

“정체가 뭡니까.”

적막을 헤치는 음성이 스산하다. 깔아뭉갠 그의 눈빛이 무서웠다. 그녀로선 모두 다 처음 접하는 것들이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나 심장이 바르르 떨리며 진동하는 것만은 도리가 없어서 가늘게 숨 쉬며 침묵했더니, 분노한 눈길이 재차 다그쳤다.

“말해. 뭐냐고 물었잖아. 정말…… 알고 있었어?”

“그래요.”

“하.”

그래, 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의 치명적인 비밀 같은 건.

그럼에도 안다는 것을 티 내지 않은 것은 그것이 그녀와 그, 둘 중 누구 하나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는 것이 힘이라지만 이것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이건 모르는 척하는 것이 그나마 약이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헤어질 때까지 영원히, 평생 그 앞에서 이 이야기를 들이밀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 손으로 직접 그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리게 될 줄은 몰랐다.

‘미안해.’

떨리는 호흡을 억지로 감춰 가며 태리는 단어 하나하나에까지 힘을 줘서 발음했다.

“겁먹지 마요. 알다시피 난 이자리스의 밖에서 왔어요. 와서 공주가 되기 전엔 할 줄 아는 건 몇 가지뿐이었고, 아는 것도 몇 가지뿐이었어요. 그중에 당신의 비밀이 껴 있었을 뿐이에요. 당신에게는 내가 그걸 아는 게 하늘이 무너질 일이겠지만 나한텐 그냥 우연한 지식 중의 하나일 뿐이라고요.”

냉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것이 그나마 그녀가 답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물론 그의 귀에는 전혀 납득이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그렇기에 그다음에는 더욱 냉정한 대답을 준비해 두었다. 자신이 미치광이 대마법사의 딸이란 걸 잊었느냐고.

그런데 들썩이는 숨결에 묻어 나온 말은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당신 눈에도 내가 쓸모없는 놈으로 보였던 겁니까.”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태리는 눈썹을 찌푸렸지만 순간 뇌리를 스쳐 지나간 것은 능력이 없어 매 맞아야 했던 어린 시절을 들려주던 그의 자책 어린 옆모습이었다.

제국의 황족이라면 당연히 신성력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황가의 일원이 신성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 수치이자 죄악이며 쓸모없는 자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음에도 이곳에선 그렇게 취급했다. 그러니까 너의 눈에도…….

제 살을 파먹는 듯한 우울한 음성이 눈으로 읽힌다. 아,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태리는 다급하게 그를 잡았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지 클로드는 차갑게 끊어 냈다.

“그래서 내게 뭘 원합니까. 아, 그렇죠. 두 번째 계약. 그게 목적이었죠. 알겠습니다, 하죠. 당신이 이겼습니다.”

너의 협박은 훌륭하게도 성공했으니 축하한다고. 약점이 잡힌 나는 선택지 없이 무릎을 꿇는다고. 시리고 허탈한 웃음을 보이는 그의 앞에 태리는 그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주저앉고 싶어졌다.

그의 얼굴은 어느 한 군데 상처받지 않은 곳이 없는 것 같았다. 눈빛은 쓰리고, 숨은 고달프며, 입술은 끌어 올렸는데도 흐느낄 것처럼 슬프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런 내가 밉겠지. 끔찍하겠지. 가득 차올랐던 애정도 이쯤이면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받는 상처란 채찍으로 뺨을 맞는 것보다 더 포학한 것이니까.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달달 떨리는 입술을 악착같이 움직이려고 노력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니까. 그가 자신을 미워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지금 빨리 말해야 했다. 단숨에.

원하는 조건을 말해 보라는 상처받은 눈빛 앞에 태리는 칼로 서걱거리는 듯한 쉰 목소리를 아프게 끌어냈다.

“내가 원하는 계약은 약혼이에요.”

“……!”

“나랑 약혼해 줘요. 그리고 내가 원할 때 파혼해 주세요.”

단숨에 뱉는다고 했던 말은 떨림이 혀끝까지 달라붙어 있어서 살얼음판 위를 맨발로 걷는 듯하다.

그제야 원하는 걸로 준다고 했던 그녀의 맨 처음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은 클로드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화가 난 듯했다.

어깨를 파고든 손가락이 너무 아팠다. 태리가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꾸역꾸역 참고 있자니 울화가 맺힌 음성이 쏟아져 내렸다.

“당신이 필요할 때까지만 만나다가 헤어지자고. 지금 그런 잔인한 계약을 나랑 하잔 말입니까?”

“그래야 나중에라도 다른 사람하고 만날 수 있잖아요.”

모든 게 끝나면 이 남자는 주인공다운, 승리자다운 인생을 살게 될 텐데. 자신이 제때에 끝내 주지 않으면 그는 혼자 남아 오랫동안 자신을 기다리며 괴로워하게 될 것 같았다.

제게 다정함만을 가르쳐 준 남자를 태리는 그렇게 외롭게 남겨 둘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나를 그냥 갖고 놀지. 그게 더 나았을 텐데.”

정해진 기간만 만나다가 결혼은 다른 사람이랑 하라고 헤어져 준다니. 클로드는 목구멍으로 치받치는 울분에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우습게도 하지 못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는데도 이 빌어먹을 두 눈에는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아프게 꾹꾹 참고 있는 공주의 얼굴만이 들어온다.

상처받은 그보다 상처를 주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한없이 더 슬퍼 보였다.

“그런 미친 계약을 해서 내가 얻는 건 뭡니까.”

“성검을 쓸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게요.”

하, 그가 크게 비웃었다.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닙니까.”

“나한테는 쉬운 게 맞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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