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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엔 사고를 좀 많이 쳤는데.”
“왜요?”
“처음 여기 왔을 땐 불만이 좀 많았어서 말썽을 안 피울 수가 없었거든요. 반항기가 뭐, 한 여기까지 차 있었던가.”
손을 자기 머리 위까지 올려 보이는 게, 확실한 농담이다. 하긴 이런 순둥이가 그럴 리가 없지. 진지한 목소리로 예배 시간에 짝다리 짚고 침을 뱉었다고 해도 허풍일 텐데.
하지만 그 딴에는 정말로 질풍노도의 시기가 맞았던 듯했다.
“하루도 안 빠지고 혼났습니다. 그런데도 저에 대한 얘기가 다른 곳으로 퍼져 나가지 않게 원장님이 입단속을 잘하셨죠. 안 그랬으면 더 빨리 소문났을걸요. 신동인 것 말고도 전 축도술에 완전 엉망이었거든요. 소질이 통 없어서.”
축도술이란 신관이나 성기사와 같은 성직자들이 몸에 지닌 신성력을 매개로 신의 힘을 발현시키는 모든 기적의 통칭이다. 수행이나 기도 수련, 성서 필사와 같은 훈련을 통해 꾸준히 능력을 키우게 되지만 클로드는 아무리 익히고 배워도 되지 않았다.
일반인도 그 정도 가르쳤으면 작은 기적이라도 일으킬 만한데, 어떻게 된 건지 귀한 피를 타고난 이 몸뚱어리는 한 줄의 기도문조차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많이 혼났어요?”
“응, 엄청.”
“어떻게?”
“이것저것 벌 받으면서. 여기 바닥도 쓸고, 예배 끝나면 제기도 광나게 닦고, 새벽마다 물도 길어 오고, 시간 되면 탑에 올라가서 종도 치고. 그러다가 낮잠 자느라 몇 번 놓치기도 하고.”
새록새록 떠오른 기억에 본인이 개구쟁이처럼 키득거리는 걸 보니, 종 치는 타이밍을 놓친 게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다.
종탑에서 낮잠을 자다가 후다닥 깨선 엉뚱한 시간에 종을 두들기고 있을 소년의 뒤처리를 생각하니, 왠지 즐거운 장면이 상상되어서 태리는 그를 따라 같이 웃었다.
“그러다가 걸리면 저기서 어깨 찜질을 당하는 겁니다.”
중앙제단 아래, 교탁처럼 생긴 독서대의 의자를 그가 턱으로 가리켰다.
“원래는 저기 앉아서 성서를 읽게 시켰거든요. 틀리면 나무 막대기로 뒤에서 어깨를 한 대씩 맞았는데, 종 치는 시간을 놓치면 그날은 두 대씩입니다.”
“아팠겠네.”
“영감탱이가 쓸데없이 손이 매워서. 근데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전 정말 신성력을 잘 다루지 못했거든요.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었어요.”
어린 시절의 소년은 저 자리에 꿇어앉아서 참 많이도 맞았던 건지. 기억 속에 벌 받는 자리로 남아 있는 의자를 살짝 깊어진 눈빛이 스치고 지나간다.
곁에선 듣던 태리의 표정은 대번에 흐려지고 말았다.
잘 다루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아예 다루지를 못했겠지.
그 결함을 능숙하게 숨길 수 있는 어른이 될 때까지 그는 내내 저 자리에 묶여 있던 것일까. 아니, 지금도 몸만 떠났을 뿐 마음은 아직도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일까.
속눈썹을 내려뜨린 수려한 남자의 옆모습에서 그의 삶을 옴짝달싹 못 하도록 감고 있는 두꺼운 족쇄가 보였다.
그런 게 아닌데. 솟아오른 울컥함에 소매가 주먹 안으로 꽉 말려 들어갔다.
“그렇다고…… 때려요?”
“내가 못하니까.”
“당신은 못하는 게 아니야.”
태리의 단호한 부정에 클로드는 알아들을 수 없다는 듯이 응? 하고 눈썹을 올렸지만 그녀만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는 못하는 게 아니란 걸. 그의 인생은 결코 가짜가 아니란 걸. 다만 그것을 증명하려면 반드시 이 이야기의 엔딩을 봐야만 한다는 조건이 있을 뿐.
그리고 다행히도 그것은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의 이야기에 끝을 내는 것, 마침표를 찍는 것, 그리하여 그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 주는 것.
전부 다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녀는 그의 어린 시절을 매 맞는 소년으로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더는 저 자리에 마음이 묶이지 않도록 자유롭게 해 줄 것이다. 그가 성기사로서의 제 삶을 부끄러워하며 살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가져야 할 것들을 당연히 가질 수 있도록 해 주고 그렇게……. 결심이 굳어져 갈수록 금이 가는 유리처럼 아슬아슬해진 태리의 얼굴을 커다란 손이 감싸며 잡념으로부터 건져 올렸다.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는 섬세한 손길에 코끝이 찡할 뻔했는데, 뒤따른 목소리는 그보다 더 따스했다.
“왜 그래,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걱정되는데.”
안 그래도 저택에서 나올 때부터 어두웠던 그녀의 얼굴이 줄곧 신경 쓰였던 참이다. 클로드가 자그마한 두 뺨을 손아귀에 넣으며 눈을 마주쳤다.
“정무 회의 때문에 그래? 내가 같이 갈 겁니다. 혼자 안 보내잖아.”
“…….”
“뭐 해 줄까. 어떻게 해 줄까, 내가.”
입을 꽉 닫고 있던 태리는 연이은 그의 달램에 버티지 못하고 와르르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더없이 다정한 말을 들었는데도 기쁘지 않았다. 참담할 뿐.
굳어 있던 입술이 어그러져 맥 빠진 쓴웃음을 그렸다.
이 사람은 모를 것이다. 이렇게 뭐든 다 줄 것처럼 속 끓이며 말할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위선을 소름 끼치도록 깨닫게 된다는 것을.
미리엘의 훈계는 너무나도 옳았고, 당신은 한순간도 진심이 아닌 적이 없었으며, 자신은 그 마음을 늘 이용하고 있었음을.
……그렇게 다정하게 말하지 말지.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에 태리는 눈꺼풀을 깜빡이며 해바라기와도 같은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디에 두어도 돋보였을 사람이었다. 반듯한 이목구비와 다정다감한 말씨에 착하고, 진실되고, 순수하고, 자신을 얼마나 소중하게 대해 주는지 모른다.
그러니 지금처럼 잘해 주지 않았더라도 언제고 자신은 그에게 반했을 터였다.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부터 끝이 정해져 있었듯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건 그런 완벽한 운명과도 같은 거라고.
“내가 왜 좋아요?”
열이 오른 입술이 멋대로 움직였다.
“갑자기 그런 말을…….”
불쑥 나온 얘기에 클로드는 콧잔등부터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얼빠진 표정을 감추듯이 시선을 사방으로 굴리면서 횡설수설했다.
왜 좋냐니. 그런 걸 따져 본 적은 없었는데. 얼마나 많이 좋아하냐고 물으면 그건 진짜 열심히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좋아하냐는 질문은 그조차도 제대로 알 수 없을 만큼 어려웠다.
감정을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 헤매도 그저 그녀를 공주님이라고 부르다가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클로드가 망설이는 어투로 낯간지러운 얘기를 털어놓았다.
“저는 살면서 공주님 같은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예전엔 공주라고 하면 왕의 딸로 태어난 사람. 그냥 그 정도의 의미였죠.”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건 그녀를 만나고부터였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지? 왜 저렇게 말하지? 아니,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강인하면서도 나긋나긋할 수 있는데?
……근데 왜 저렇게 예쁘지?
그러다가 알게 되었다. 공주란 것이 무엇인지를. 아, 저런 사람이 공주인 거구나, 하고.
눈부실 정도로 용감하고 햇살처럼 상냥하며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
그런데 그런 사람이 옆에서 웃어 주고, 같이 싸워 주고, 뭐든 입에 넣어 주면 가리지 않고 맛있게 잘 먹고 그러는데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 리가. 그게 막을 수 있는 일이었던가. 잠시 스스로를 속이며 부정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무를 수 없다.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건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왜 좋아하냐고 물어도 이런 어리숙한 말밖에는 하지 못했다.
“이걸 사……랑이라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분명히 당신이 좋습니다. 다른 사람은 싫고. 다른 사람한테는 이런 생각 해 본 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데…… 그냥 당신은 너무 좋아서 처음 본 날부터 아무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게 사랑인지는 몰라. 하지만 너를 좋아해. 진짜 네가 너무 좋아.
내뱉고도 그는 본인의 투박한 표현을 아쉬워했지만 태리는 반대로 그 서투름에 여지없는 진심을 느껴 버렸다. 사랑인지 알 수 없다는 그 말이 거꾸로 사랑임을 완벽히 확신시켜 주는 것 같았다.
울컥해서 숨이라도 헐떡일 것 같아 그녀는 애꿎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진솔한 감정 같은 건 여기서 새어 나오지 말라고.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그의 시선을 잡은 듯 뜨거운 눈길이 달라붙었다.
“왜……”
입술은 왜 그리 못살게 구느냐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입을 뗐던 클로드는 도톰하게 부어오른 부위를 보곤 그 한 글자에서 벙어리가 된 것처럼 뒷말을 삼켰다.
왜. 그 말은 스스로가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왜냐면 갑자기 정신이 나갈 정도로 거기에 입을 맞추고 싶었으니까. 머릿속에 누가 들어와서 양동이째로 빨간 물감을 흠뻑 끼얹은 것처럼 충동이 강렬해진다.
한 번 맛봤었던 지난날의 경험이 더 자극적으로 충동을 부추겼다. 얼마나 황홀했었는지를 끊임없이 되새기게 만든다.
부어오른 그 자리에 제 것을 갖다 대고 축축한 사이를 파고들었을 때……
욕구가 치솟았다가 그가 턱에 힘을 주고 참아 냈다.
참아야지.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짐승도 아닌데 여기서 미쳐 날뛰면 그게 사람인가.
아직은 괜찮다고. 참을 수 있다고, 그는 안간힘을 다해 애쓰고 있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잠깐 딴 곳을 보고 있으면 뜨거움이 가라앉는 것도 같았다. 숨이 좀 거칠어지긴 했는데 천천히 호흡을 쉬면 되니 이 정도면 버틸 만하다.
그래서 다시 천천히 태리를 향해 돌아봤는데, 이번에는 부은 입술과 함께 그 아래로 움푹 파인 쇄골이 눈에 들어와서 벌에 쏘인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다고 했는데 바로 괜찮지 않아졌다. 스스로의 인내심에 뭔가를 기대하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위험. 위험. 정말 위험. 매우 위험.
경고등을 킨 클로드는 즉시 태리의 옆에서 떨어져 가운데 복도로 나와서는 제단을 향해 급하게 걸었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미리 도망치는 거였다. 더 있다간 어디라도 손을 댈지 모르니까.
제단 위의 저울과 칼을 든 아가사의 여신상이 어서 이리로 피신하라고 손짓하는 것 같기도 해서 신속한 걸음으로 얼른 그 앞에 붙어 섰다.
‘제발.’
내가 이곳에서 당신께 올린 기도가 몇 천 번인데, 그만큼 외면했으면 이번 한 번만은 불쌍해서라도 들어줄 수 있지 않나. 큰 걸 바라지도 않는다. 그녀에게 허튼짓하지 않도록, 그래서 멍청한 남자가 되지 않도록 단 한 번만 지금의 충동을 잡아 주면 된다.
‘진짜 제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은 뒤 성냥을 그어 경건한 자세로 촛대의 향초에 불을 붙였다.
심연처럼 타오르는 작은 불씨를 보고 있자니 조금씩 진정이 되는 것도 같아서 크게 가슴을 들썩였다가 내리길 반복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안정되면 그만 그녀에게 돌아가도 되겠다 싶어서 열심히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 뒤에서 의자 다리가 마룻바닥을 긁으며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랑비처럼 차박차박, 태리의 발소리가 그가 돌아가기도 전에 먼저 그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