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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어?”
그도 태리가 밖을 내다보고 있을 줄은 몰랐던지 달리다가 멈춰 서선 손에 든 뭔가를 급하게 허리 뒤로 감췄다.
“무슨 일이에요?”
“그냥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다가.”
“훈련장에 있는 거 다 봤는데?”
“……언제?”
“아까부터 쭉.”
“그, 그러니까 거기 갔다가 우연히 다시 이쪽으로 온 건데.”
“우연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죠?”
가늘어진 눈으로 정곡을 콕 집으니 본인도 머쓱했는지 클로드는 어설픈 거짓말을 포기했다. 그러더니 허리 뒤에 감추고 있던 것을 쭈뼛거리며 꺼내선 태리가 몸을 내밀고 있는 창 안으로 가볍게 던졌다.
“……!”
잡기 어려운 높이가 아니어서 태리는 어렵지 않게 그것을 가슴 안으로 받아 냈다. 두 팔로 끌어안은 즉시 은은한 꽃 냄새가 얼굴로 끼쳐 왔다. 정원에 있는 것들을 뽑아 만든 건지 얼기설기 엮여 있는 꽃다발이었다.
“오다가 보여서. 주…… 주운 겁니다.”
“허리 숙이고 열심히 뽑느라 수고했어요.”
“주운, 주운 거라니까.”
“그러니까 고생했어요.”
여자도 안 만나 봤다면서 이런 거 선물하는 건 어떻게 아나 몰라. 아랫입술이 잠깐 삐죽 튀어나오긴 했지만 향긋한 꽃 냄새에 금세 비실비실 풀어졌다. 이름 모를 꽃들을 두서없이 엮었는데도 한 아름 풍성한 꽃다발이 너무 예뻐서 태리는 그 속에 코를 살짝 묻곤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사레가 들린 클로드는 귀 끝이 불타올라선 벽에 등을 붙이고 숨었다.
여러 번 봤는데도 그녀가 저렇게 웃어 주는 것에는 면역이 생기질 않는다. 어제도 그랬다. 방 앞에서 내내 기다리다가 문이 열렸을 때 너무 예뻐서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다. 식사할 때도 가족들 눈을 피해서 가뭄에 콩 나듯 몰래 웃어 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참기 힘들었단 말이다.
진작에 데려올걸. 처음부터 망할 고모님 손에 맡기지 말고 내 집으로 데려올걸. 여기서 살아 주면 나 진짜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 수 있는데.
뺨을 착착 때리며, 진정이 될 때까지 열기를 식히다가 슬그머니 기어 나왔다. 고개를 드니 공주는 아까와 똑같은 위치에서 그의 머리통을 놀리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기 숨어서 뭐 했어요?”
“답답하면 밖에 나갈래요?”
“갑자기?”
“응, 답답해하는 거 같아서.”
“나 그런 티 안 냈는데.”
“얼굴만 봐도 알겠던데.”
그녀의 표정이야 손톱만큼 틀어져도 다 안다. 지금도 웃고는 있지만 눈가에 옅은 근심이 서려 있다는 것을 보자마자 바로 느꼈다. 말하는 사이사이 눌러 참는 듯한 한숨도 몇 번 있었고.
클로드가 받아 줄 테니 뛰어내리라는 뜻으로 팔을 벌렸다.
“다들 공주님의 움직임에 대해 감시를 하고 있겠지만 지금은 해도 졌고, 조심해서 몰래 나갔다 오면 될 겁니다. 마침 전해 줄 것도 있는데 여기서 주기는 좀 그래요. 듀폰 경이 연락을 해 왔습니다.”
어제 그를 찾아왔던 인물도 듀폰이 보낸 심부름꾼이었다. 내용을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돌아가는 낌새로 짐작컨대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풀린 것 같았다.
그런데 바라던 소식이 도착했음에도 태리는 크게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당연히 반길 줄 알았는데 외려 얼굴이 샐쭉해져선 이상한 질문을 톡 하고 쏘았다.
“정말 여자 안 만나 본 거 맞아요?”
“여자?”
“너무 잘 아는 것 같아서 수상해.”
무슨 여자? 나 여자 없는데.
“거기서 딱 기다려요.”
클로드는 어리둥절해선 창문을 쌩 닫고 돌아서는 태리의 뒷모습에 당황했다.
“왜 화가 났지?”
뭘 잘 안다는 건지. 그는 여자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냥 한눈팔지 않고 매일 주구장창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 사람에 대해서만 잘 아는 거지. 순진한 남자의 눈이 닫힌 창문을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 * *
해질녘의 노을을 짊어지고 말이 비탈길을 올라간다. 안장에는 후드가 달린 망토를 코까지 깊이 눌러쓴 남녀가 함께 올라타 있었다.
혹여 알아보는 이가 있을까 태리를 제 품 안으로 숨겨 넣은 클로드는 고삐를 쥐지 않은 한 손으로 갑갑함을 느낄 그녀에게 연신 손부채질을 해 주고 있고, 반면 옆으로 돌아앉아 한쪽 귀를 그의 가슴에 붙이고 가는 태리는 구부러진 눈썹으로 손안에 든 편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발신인은 일전에 광장에서 억지로 빚을 지워 둔 적이 있는 공화파의 당수 듀폰. 클로드를 통해 은밀하게 전달되어 온 그의 메시지는 매운 고추 같았던 그의 심정을 꼭 닮아 정확히 할 말만을 적은 간결한 내용이었다.
공주님의 피습 건으로 인해 이달 첫째 주 정무 회의에 논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그 자리에 참고인으로 참석하게 되실 겁니다. 그 이상은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또한 공주님에 대한 어떠한 대변도 해 드릴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