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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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한 거예요……. 이용한 게 아니라 의지한 거였는데…… 미안해요.” 

“…….”

입술을 가늘게 떨면서 그대로 허물어질 것처럼 어깨를 움츠리더니 그럼에도 도망가지 않고 서서 공주는 끝끝내 미안함을 토해 냈다.

미리엘은 잠시 하려던 말을 잊고 심상한 눈빛으로 가라앉았다.

이렇게 명석하면서도 그만큼 독하진 못하니, 한 나라의 마지막 공주가 되기에는 그녀는 가여운 사람이었다.

공격하듯이 매섭게 궁지로 몰았지만 미리엘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공주와 기사는 서로 함께할 수 없는 확고한 지위가 있음을. 그녀와 클로드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파여 있었고, 그런데도 건너가 닿으려고 한다면 두 사람 모두에게 혹독한 대가가 필요했다.

이 공주님은 그것을 감당할 준비가 안 됐을 터였다. 어느 쪽으로 봐도 가여운 사람이었으니.

망국의 공주, 황폐해진 영토, 빼앗긴 주권에 성한 것 하나 없는 땅. 거기에는 무엇 하나 그녀의 잘못인 게 없었지만 후계자란 자신의 실수가 아닌 것도 제 것으로 짊어져야 하는 자리이며, 그것이 왕관이 가진 무게다.

그 자리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자리였다.

반마도주의자가 들끓는 이 제국까지 제 발로 걸어 들어와서 지금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녀는 싸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싸워야만 한다.

그런 사람이 침략국의 총독과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고 있다고 한다면 오히려 그편이 더 미친 소리로 들릴 터였다.

미리엘은 마음 깊이 동정을 가졌다. 공주가 가엽다고. 안타깝고 안쓰럽다고.

하지만 신이 그러하듯 그 역시 공평한 애정을 가지지 못했기에 그는 그녀가 자신의 조국만큼이나 제 동생을 사랑해 주길 바랐다. 낼 수 없는 용기라도 어떻게든 쥐어짜서 내고, 기어가도 좋으니 고통만 가득한 가시밭길이라도 건너가 보겠다고 결심해 주기를.

아침 내내 그녀에게 한눈팔려 있던 동생의 얼굴이 너무나 행복해 보여서. 얼마나 좋아하는 건지 가늠도 되지 않을 만큼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끝까지 냉혹하게 굴었다.

“이용한 게 아니라면 지금과 같은 행동은 그만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정당한 대가라도 제대로 지불하고 이용하도록 하세요. 전 클로드와는 다릅니다. 이자리스는 물론 공주님에 대한 일말의 애정도 없습니다. 그러니 언제라도 그 나라가 망하는 쪽으로 걸어갈 수 있지요.”

감정을 절제해서 딱딱하고 단단하게 경고하자, 공주는 바람 앞에 선 등불처럼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게 참 보기에 애처로웠다. 그건 클로드에게 그녀가 약점이 되듯이,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클로드가 약점이 된다는 뜻이었으니까.

“제가 어떻게 해야……”

“그건 당신께서 제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애한테 뭘 줄 수 있는지. 그 애가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일지 말입니다.”

* * *

따뜻한 코코아를 호로록 불어 마시며 2층 창가에 걸터앉았다. 고래 등처럼 거대한 공작저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는 저녁 해에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어제 아침, 미리엘에게 제대로 쓴소리를 듣고 난 후 태리는 미로 같은 정원에 홀로 남겨졌다. 버림받은 것은 아니고 같이 돌아가겠냐는 미리엘의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는데 그 뒤로 혼자 길을 찾으려다가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다행히 뒤늦게 달려온 클로드에 의해 무사히 구출되어선, 다시는 길을 잃지 않도록 그의 손에 잡혀서 이 넓디넓은 저택을 싹싹 훑듯이 구경했다.

― 네 공주님은 내가 벚꽃 나무에 매달아 놓고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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