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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키의 나무들이 열주처럼 늘어선 일직선의 포장길을 고요히 걷는다. 단순한 집 구경이 아니란 건 불러낸 순간부터 느꼈지만 이렇게까지 아무 말이 없으니 덩달아 침묵하게 됐다.
태리는 미리엘이라는 남자에 대해 곰곰이 뜯어보았다.
황실 일원의 대다수가 사제나 성기사가 될 정도로 이 나라에서 황족이 신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그들의 의사와는 무관한 당연한 전통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이번 세대의 데본셔 형제들은 유난히도 독보적이라고 했다.
한 사람은 성하, 다른 한 사람은 성기사단장이니.
특히나 옆에서 걷고 있는 이 남자, 미리엘 데본셔.
태어난 순간 성하의 자리에 내정될 정도로 막강한 신성력을 보유했다는 그는 말 그대로 신의 선택을 받은 인물이었다. 기적이라고 일컫는 축도를 사용할 수 있음은 물론 두 눈으로 확인했듯이 공격력도 어마무시하다.
클로드에게 어부바나 부탁하는 허술한 겉모습을 보이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리 상냥하게 웃어 준들 자신을 향한 그의 태도는 우호적이지 않았다. 전에는 그러한 느낌만 있었는데 공작 부부가 주는 환대와 친절을 받고 나니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실눈으로 그어진 저 가면 너머에 비딱한 적의가 숨어 있다는 게.
혹시 따로 불러내서 날 어찌하려는 심산은 아닐지 머리털을 쭈뼛 세우니, 비슷한 낌새를 읽은 듯 미리엘이 비슷한 말을 골라 했다.
“광신도 무리에게 잡혀 큰일을 당할 뻔한 분치고는 태연하시군요. 이 집은 신의 사도가 둘씩이나 되는 집안이랍니다.”
변성기를 전혀 겪지 않은 듯한 미성의 목소리가 참 얄밉게 들렸다.
“전 괜찮은데. 혹시 성하께선 마법사인 제가 무서우세요?”
“공주님은 신관인 제가 두려우신가요?”
“아니요?”
“그럼 서로 비슷한 셈 치지요.”
“하지만 신기하다고는 느껴요. 신이란 건 상상 속에서나 있는 허구의 존재라고 생각했거든요.”
당황하지 않고 날아오는 족족 돌려보내자 의외라고 여겼는지 그가 싱긋 웃으며 진지하게 설명했다.
“신은 허구의 존재가 아닙니다. 다만 어떤 이들에게는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는 하죠. 신들의 총애란 공평하지 않거든요. 특별히 아끼는 대상이 있고 반대로 홀대하는 대상도 있습니다. 그래서 왜 이런 말이 있죠. 신은 있어. 단지 너를 사랑하지 않을 뿐.”
쓰읍, 방금 그거 살짝 기분 나빴는데. 나한테 하는 말인가?
태리가 빼쭉 올라간 눈썹으로 찌릿찌릿 째려보자 미리엘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니 만약 누군가가 신으로부터 더없이 사랑받는 존재라면 그자는 자신이 믿는 만큼 신의 힘을 빌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부터 기원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이지요.”
“마법도 자신이 깨달은 만큼 힘을 얻게 돼요. 이론상으로는.”
“이론상이라. 인외의 영역을 넘나들면서도 이론을 짚는 점이 역시 마법사다우시군요.”
“이론은 의심의 증명을 거친 것이니까요. 신관은 뭐든 믿는 게 최우선이겠지만 마법사는 뭐든 의심하는 게 최우선이라서요.”
서로의 입장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은 하지 않지만 교묘한 흠집 내기는 허용하는 것. 미리엘과는 정확히 그 간격을 유지하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마치 눈치 싸움 하듯 벌이는 작은 공방전과도 같았다.
“공주님과는 대화를 꼭 나눠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을 기점으로 그의 태도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겉핥기하듯 주변을 맴돌던 말들이 보다 직접적이고 명확한 표현들을 구사해 가며 날아들었다.
“어떤 사람일까 몹시 궁금했거든요.”
“그건 제가 마법사라서 그런 건가요?”
“아니요. 소네티라서 그런 거였지요.”
“……그게 무슨 뜻이죠.”
“대륙 하나를 통째로 발아래에 둔 황제가 반평생 가까이 집착한 자그마한 왕국이 있다면, 누구라도 그 왕국의 핏줄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겠습니까?”
이자리스의 소네티 왕가. 그 왕가에 남은 유일한 혈손. 도대체 당신들에게 어떠한 매력이 있는 겁니까? 태리를 바라보는 미리엘의 시선에는 그런 호기심과 궁금증이 가득했다.
“제 동생도 공주님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너무 티가 나서 안쓰러울 정도로 좋아하더군요. 고모님이라면 짜증부터 내는 녀석이 고모님과 똑같은 전철을 밟는다는 게……. 이만하면 확실히 소네티에게 대단한 매력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래서였구나. 나한테 묘하게 부정적이었던 태도.
클로드와 자신의 관계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그의 가족으로부터 날아온 화살에 태리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함께 있는 모습을 몇 번 보여 주지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함께 식사할 때도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숨길 없는 감정이란 게 있는 걸까.
미리엘은 아주 초반부터 알아차린 것 같았다. 게다가 그가 눈치채고 있는 것은 그 하나도 아니다. 소네티에 관해 운을 띄우며 그는 분명히 ‘황제가 반평생 가까이 집착한 자그마한 왕국’이라고 표현했으니까.
그 말은 즉, 황제가 숨기고 있는 과거에 대해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태리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고민 끝에 결국 질문하기로 결심했다. 지푸라기도 잡을 수 있다면 당장은 그것이라도 건져야 했다.
“혹시 황제께서 이자리스에 따로 관심을 두는 연유에 대해 알고 계신 게 있으신가요?”
그러나 상대는 말하는 이의 심중을 파악하는 데 능한 사람이었다. 그 한순간에서조차 미리엘의 예리함에는 날이 서 있었다.
“아아, 그걸 알아내려고 하는 게 목적이셨습니까? 스스로를 위기에 처하게 할 만큼?”
무슨 말이냐, 따져 묻고 싶었지만 순간적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간 것은 고의적으로 자신을 위기에 빠트려 미끼로 삼았던 일이었다.
거기서 화형을 당할 뻔했다. 떠오르지 않는다고 발뺌하기엔 너무나도 최근의 일이었다. 습격이 있었던 지 고작 하룻밤만이 지났을 뿐이었다.
‘어떻게 알얐냐고는 물을 필요도 없어. 이 사람은 시위가 있었던 그날 내 진짜 알리바이에 대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이야.’
예배당에 자신과 클로드를 숨겨 주고, 또 몰래 궁 밖을 나가게끔 도와 준 장본인.
그러니 광장에서 일어났던 추격 소동의 용의자가 자신이란 것도 그는 확실히 알고 있을 터였다.
물론 그것만 가지고 지난밤의 습격이 의도적인 노림수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남자의 천성과도 같은 의뭉스러움을 감안한다면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태리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자 미리엘은 긍정으로 받아들이며 칭찬했다.
“괜찮은 수법이었습니다. 황제의 이목을 끌 정도로 세상의 주목을 받는 방법은 두 가지죠. 끔찍한 사건의 가해자가 되거나 아니면 피해자가 되거나. 가해자로서 이득을 얻기엔 공주님의 입지가 좁았으니 그럴 경우엔 피해자가 더 효과적이었을 겁니다. 현명한 전략이었습니다.”
“…….”
“저런, 칭찬해 드리는 겁니다. 일국의 후계자라면 그 정도의 교묘함을 갖추는 건 필요한 덕목이죠. 하지만 그런 사람이 제 동생 곁에 있는 건 별로 달갑지 않거든요.”
애초에 클로드가 그 일에 껴 있지 않았다면 미리엘은 잴 것도 없이 바로 궁으로 가서 진실을 밀고할 작정이었다. 광신도의 짓이든 아니든 그는 교단의 수장이었고, 어떤 식으로든 교단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으니.
하지만 비밀을 지킨 이유는 오직 단 하나, 클로드가 연루되어 있으므로 그는 입을 닫아 잠갔다.
그리고 소네티가의 이 공주님은 그것까지도 예상을 했으리라. 제 동생이 엮여 있으므로 그가 발설하지 못할 것이란 것.
말로만 하는 칭찬이 아니라, 그녀는 정말로 상당히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제 동생은 공주님처럼 약삭빠르지 못합니다. 이미 들으셨죠. 그 애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얼마나 순진해 빠졌는지. 어찌나 맹탕이면 본인이 원하지도 않는 걸 남들이 안기는 대로 모조리 떠맡으며 살았죠.”
“…….”
“쓸데없이 신성력만 강한 형 때문에 원치도 않는 가문을 이어받아 소공작이 되었고, 괜한 재주를 가져 고모님의 장난감으로 내내 전쟁터에서 시달렸습니다. 그 아이의 주변 사람들은 의도했든 아니든 늘 그렇게 그 애를 이용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런 사람이 한 명 더 있는 것 같아서 제가 아주 불쾌합니다.”
정교한 그림처럼 친절을 가장했던 미소는 곧 예리함으로, 예리함은 눈 깜짝할 새에 오싹한 적의가 되어 돌아왔다. 마주 선 눈빛이 싸늘했다. 보이지 않는 밧줄로 숨통을 조르는 듯하던 미리엘은 두 번째 포탄을 쏘아 올리듯 또 한 번의 명료한 단어를 저울 위에 올렸다.
“이용하셨죠? 클로드를.”
졸아들어 침묵만 쌓아 가던 태리가 고개를 번쩍 들고 큰 목소리로 외친 건 그때였다.
“아니요……! 아니,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었어요…….”
그러나 외친 것은 그 한 번뿐. 단호하던 목소리는 금세 울먹임으로 얼룩진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럼에도 이용한 것은,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고. 태리는 눈물이 고인 얼굴로 쉴 새 없이 도리질을 쳤다.
엔딩으로 도달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패하고, 실패하면 수정하고, 부족한 부분은 채우고, 불필요한 것들은 제외해 나가며 그녀는 여기까지 왔다.
클로드는…… 그 계획마다 항상 그녀의 곁에 있어 줬을 뿐이었다.
계획의 밖이 아닌 계획의 안에서. 늘, 언제나 함께.
그래서 그것을 한 번도 이용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용이라고 생각하지를 못했었다. 곁에 있어 주는 게 당연한 것처럼 매일 그에게 기대고, 믿고, 의지하고…….
너무 다정해서…… 그래, 너무 다정했으니까.
그런데 난생처음 그 당연함을 당연함이 아닌 것으로 냉혹하게 평가받으니 뒤늦게 몰려오는 이기심과 부끄러움 앞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