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186)

112

식사는 어느 한 군데 모자람이 없었다. 

부담스럽지 않도록 얇게 썰어 구운 고기가 싱싱한 채소와 함께 샐러드로 제공되었고,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호밀빵이 물방울 모양의 잼 플레이트와 나란히 섰다.

각자의 앞에는 단호박을 쪄 끓여 낸 맑은 수프와 탱글탱글한 깐 달걀이 유리그릇에 가지런히 담아져 나왔다.

식기를 들고 식사를 하는 동안에는 또 취향대로, 입맛대로 마실 것을 골랐다.

공작과 공작 부인은 진하게 우린 홍차에 그보다 더 진한 시럽을 부어 서로의 찻잔을 채웠고, 미리엘은 갓 짜 낸 생우유 한 잔을, 클로드는 얼음을 띄운 찬물, 그리고 태리는 사과 주스 몇 모금과 코코아 한 잔을 더 부탁해 마셨다.

“너무 맛있어요.”

“입맛에 맞으셔서 다행입니다.”

“진짜 최고로 맛있어요!”

인사치레가 아니라 입에 들어오는 족족 맛있는 것들뿐이라 태리는 엄지를 척 세웠다. 호텔에서는 결코 맛보지 못했던 진짜 주방장의 요리들이다. 그녀의 가식 없는 평가에 다들 기분이 좋아졌는지 초반의 어색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어졌다.

얼마나 열심히 꼭꼭 씹어 가면서 잘 먹는지 공주가 마음껏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한두 마디씩 붙였던 말들도 다들 삼가하며 배려하게 되자, 어느새 공작저의 아침 식탁에는 수다는 사라지고 달그락거리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만이 남았다.

조용하고도 이름 모를 평온함이었다. 오후의 햇살같이 편안하고 부담스럽지 않다.

다만 클로드만이 음식이 맛있는지 없는지 관심도 없고 냠냠거리는 태리만을 힐끗거리며 꾸준히 관찰했다.

포도알은 왜 두 개씩 뜯는 거지? 가져갈 건가? 포크를 잘 안 쓰네. 근데 소매에 수프가 좀 튀었는데…… 같은 갖가지 생각들을 하면서. 물론 그러면서도 손은 착실히 움직여서 그녀의 앞에 냅킨을 밀어 두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에 빠져 멍청해진 남자의 정석이라 미리엘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공주가 만약 여기서 저 분홍빛 복숭아를 깨물어 입술에 과즙이라도 묻혔다간 난리가 날 것이다. 저리도 순수하고 뭘 몰라서야 큰일이었다.

그가 식탁 밑에서 클로드의 정강이를 톡 찼다.

제발 요령 좀 부리라고.

만족스러웠던 아침 식사 후에 자리는 간단한 다과상으로 이어졌다.

식탁에서와 달리 정원의 티 테이블에선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네 식구가 도란도란 모인 가운데에 끼어 들어가 있었지만 태리는 전과 달리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럴 짬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얘깃거리가 떨어지지 않았는데 대부분이 클로드의 어릴 적 이야기라 자연스럽게 집중력이 올라갔다.

“우리 애는 말이죠. 작고 포동포동한 손일 때부터 장난감 칼을 갖고 놀았던 장군감이었죠. 도둑이 우리 집에 들어오면 자기가 다 무찔러 줄 거라고 꼬리 세우는 애기 고양이처럼 쫄쫄 뛰어다니더니, 이제는 제법 덩치가 커서 발톱까지 세울 수 있는 아주 큰 아기 고양이가 됐지 뭐예요. 호호호!”

“어머니, 이제 그만…….”

“아직도 못 잊어요. 제가 아파서 며칠 앓았던 날, 매일같이 침대맡에 따뜻한 수프 그릇을 놓고 갔는데, 자기가 한 게 아니라고 우기느라 목이 쉰 적도 있었답니다. 덴 손에 붕대를 칭칭 두르고는 아니라고 하는데, 그걸 모르는 척하고 먹느라 아주 혼났답니다. 호호호!”

클로드가 얼굴을 붉히고 상을 뒤엎으며 그만하라고 사소한 행패를 좀 부리긴 했지만 가족들 간의 화기애애한 대화는 그렇게 끊길 줄을 몰랐다.

고깔 모양의 바나나 과자를 입 안으로 넣으며 태리는 그들을 따라 즐겁게 웃었다.

이런 집에서 크고 자랐구나.

혀 위로 퍼지는 달콤함만큼이나 나긋나긋한 감정이 스며든다.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클로드의 성장 과정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화목한 가정에서 유년기를 맞았는지, 가족들이 그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있어 덩달아 까닭도 없이 행복해졌다.

“조금 더 큰 다음에 얘기도 들려주세요.”

그래서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하던 것에서 직접 질문하기까지 이르렀다. 공주님까지 왜 그러냐며 클로드는 난색을 표했지만 공작은 적극적으로 변한 그녀의 태도에 매우 기뻐하며 대신 조잘거렸다.

“조금 더 커서 진짜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후부터는 이 집에 자주 있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기사 여행도 열넷에 떠났죠. 기사 서훈을 받고 정식 기사가 되고 나서도 쭉 지방의 작은 수도원들을 전전했고요.”

“왜요?”

왜? 그 질문에는 모두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너무 셌거든요.”

“저희 애가 지나치게 강해서.”

“거의 정도를 몰랐죠.”

수도원에 속한 기사회는 과거에는 상당히 의로운 보직으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촌구석의 성기사 그 이상도 이하로도 취급해 주지 않는 곳이다.

그런데 무려 공작의 아들이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그런 작은 수도원에서 생활했었다니……. 하지만 너무 강해서였다는 대목에 태리는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단번에 공감했다.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게 숨기신 거네요?”

“예, 바로 눈치채시는군요. 맞습니다. 공주님도 왕족이니 아시겠지만 후계자가 아닌데 재능이 과하게 넘치는 황족은 좋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데에 위협만 따를 뿐이죠.”

차라리 미리엘처럼 신성력 쪽으로 두각을 드러냈더라면 교단에 헌신하면 되니, 숨지 않아도 되고 훨씬 삶이 편했으련만 클로드는 기가 막히게도 검술에 천재적인 소질에 있었다.

대대손손 몸치 집안에 그게 웬 황당한 일이었는지 자신들의 실력으론 도저히 가르치지 못하겠다며 검술 선생들이 사직서를 들고 뛰어올 때마다 그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갈까 공작은 매번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그대로 뒀다면 힘 조절을 못 하고 금세 제국 바닥에 소문이 날 게 뻔했습니다. 아이가 실수로 바위를 깼다고 하면 그래도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실수로 검술 선생을 수십 명 때려 눕혔다고 하면 수습이 안 되잖습니까.”

그래서 피눈물을 머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를 멀리멀리 사람들의 눈 밖으로 숨겼다는 내용이었다.

납득하겠다며 태리는 고개를 끄덕이곤 찻잔에 입을 갖다 댔다.

‘……그리고 그 재능과 함께 신성력이 안 도는 몸이란 것도 같이 숨겨 보려고 했겠지.’

공작은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의 전부를 말하지도 않았다. 태리는 일찍부터 그 점을 눈치챘다. 그가 아들을 먼 곳으로 보내면서까지 세상으로부터 감추려 했던 이유에는 아들의 천재성과 동시에 아들의 결함도 있었다는 사실을.

황족임에도 신성력이 제로에 가까운 몸. 필사적으로 숨겨야만 했던 부분은 오히려 그쪽이 더 컸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숨기려던 두 가지가 모두 황제에게 들통났고, 클로드는 수도 기사회에서 궁정 성기사로 끌려 들어와 전쟁터를 구르고 영웅이 되어 종국엔 이자리스로 왔다.

그러니 그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불행이라고 해야 건지.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케이크를 깔짝대던 미리엘이 끼어들듯 뒤의 말을 받았다.

“그래서 그런가, 원래 살가웠던 성격이 저렇게 다 나빠져 버렸어요. 어렸을 때 내가 좀 더 옆에 끼고 살았다면 저렇게 무뚝뚝한 성격이 되진 않았을 텐데.”

무뚝뚝. 그런가? 잘 모르겠던데. 태리가 갸우뚱했다.

“아닌데. 말 많이 걸어 주는데요.”

“화낼 때만 말 걸지 않던가요? 평소에는 톡 건드리면 탁 쳐 낸단 말이에요.”

“화도 잘 안 내는데…….”

클로드는 투덜대긴 해도 웬만해선 화는 잘 내지 않았다. 가끔 잔소리가 심할 때가 있긴 하지만 결국엔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고 다 들어줬고. 태리가 아닌데, 라고 딱 잘라 답하자 가족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먹던 행동을 그쳤다.

그녀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말했다.

“화 조금 낸 적이 있긴 한데…… 그건 사실 제가 잘못한 거라. 그래도 소리 지르는 건 아니고 얼굴만 약간 빨개져요. 그러다가 더 답답해지면 막 여기 옆머리랑 앞머리를 헝클어트리는데 그래서 가끔 머리가 까치집이 되는 것 같아요.”

“내가 언제 그랬습니까?”

“지금.”

항의하는 클로드에게 태리가 그의 손 위치를 눈짓하자 그가 무심결에 가 있던 앞머리에서 바로 손을 뗐다.

하지만 이미 가족들이 그의 어린 시절의 어두운 역사를 파낼 때부터 주구장창 헝클어뜨려 놨기 때문에 머리 앞쪽이 정갈하지 못하고 삐쭉삐쭉하게 서 있었다.

한두 번 같이 붙어 있던 것도 아닌데 버릇이라면 꿰고 있지. 태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가족들을 향해서 마저 이야기했다.

“하지만 아시잖아요. 화내도 말뿐이에요. 어차피 하나도 안 무서워요.”

미안한 얘기지만 클로드가 무서웠던 적은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너무 편하고 만만해서 문제였지. 오죽 무섭지 않았으면 위급할 때면 항상 그가 먼저 떠올랐으려고.

그녀가 바나나 과자를 또 하나 집어서 아삭! 하고 씹자 다들 그 소리가 주문이었던 것처럼 활발하게 살아서 움직였다.

“공주님께서 정확히 알고 계시는군요. 맞습니다. 지가 화내 봤자죠, 오호호!”

“말만 좀 그렇게 해서 그렇지 사실 얼마나 착한데요.”

“우리 막내 귀엽다고 하면 이제까지 아무도 우리 가족을 이해 못 했는데…….”

특이한 공감대도 형성됐다. 그 사이에서 클로드만이 홀로 열렬하게 ‘뭔 소리야, 나 나쁜데! 내가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데!’라고 패악을 떨었지만 아무도 듣고 있지 않았다.

‘알지? 어휴, 알지 알지.’ 하고 표정으로 서로 공감하기에 바빴다.

개중에서도 특히 미리엘의 반응이 크게 두드러졌는데, 태리는 그의 고정된 실눈이 찰나에 깨지며 커졌다가 다시 완벽한 곡선으로 휘어지는 것을 여러 번 보았을 정도였다.

그것만큼은 가짜 미소가 아닌 진짜 미소라고 여겨질 만큼. 왠지 모르게 날카로웠던 기운도 뭉툭해졌다.

그 후엔, 날뛰는 클로드에게 집사가 달려와 누군가가 찾아왔다는 귓속말을 전해 그가 제일 먼저 자리에서 빠지게 되었다.

잠시 의자를 비우면서도 어찌나 불안해하던지 더 이상 자신의 어린 시절 얘기는 공주님께 하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했고,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태리는 미리엘의 상냥한 제안을 받았다.

“공주님께 저택의 정원을 구경시켜 드리고 싶군요. 제가 안내해 드릴 테니 함께 가시겠습니까?”

으, 저 거부할 수 없는 실눈캐의 웃음. 태리는 반강제적으로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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