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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나 봐.’
그것이 부스스한 머리로 잠자리에서 일어나며 든 첫 생각.
‘너무 잘 잤…….’
그것이 뻑뻑한 눈을 비비적거리며 한 두 번째 생각이었다.
“망했다.”
머리맡 창문가에서 이미 아침 햇살이 환하게 들이치고 있었다. 바깥에서 아침 짹! 하고 외치는 것 같은 참새의 지저귐도 들린다.
한숨도 못 잘 것 같았는데 이렇게나 잘 자다니. 기온이 서늘해서 쉽게 잠들지 못하겠거니 싶었는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따뜻해져서 마음 놓고 푹 곯아떨어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누가 와서 덮어 주고 간 건지 침대보 위에 두툼한 털 이불이 한 겹 더 있었다.
어떡해야 하지.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이 다음에는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설렁줄을 당겨서 사람을 불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팡질팡하는데 문이 딸깍 열리면서 안시가 세숫대야를 받쳐 들고 들어왔다.
“깨셨어요?”
그녀가 반색하며 신속한 걸음으로 다가와선 제일 먼저 태리의 왼팔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없었던 붕대가 깨끗이 감겨 있었다.
“주무시면서 혹시 몸에 상처가 있는지 살폈습니다. 팔뚝에 약간의 찰과상이 있더군요.”
“아, 별거 아니었는데.”
“별거 아니긴요. 그만한 외상이 생기셨으면 제게 알려 주셨어야죠. 주무실 때 포션을 사용해 치료해 놨는데 혹시 여기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까 붕대로 느슨하게 감아만 두었습니다.”
“응, 고마워, 안시. 그리고 이것도. 밤새 너무 포근했어.”
이런 건 어디서 구해 온 거야? 담비 털 이불을 들어 흔들어 보였더니 안시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두어 번쯤 입술을 달싹이다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예, 덕분에 공주님의 잠자리가 편안하셨다니. 그거면 됐지요.”
안시는 미리 받아 놓은 세숫물을 가져와 태리의 얼굴을 뽀득뽀득 씻기고 닦았다. 그런 뒤에는 챙겨 온 짐 가방 안에서 한참을 고심한 끝에 새 드레스를 꺼내 주었다.
“나 오늘 이거 입어?”
“네. 이걸로 하는 게 좋겠습니다.”
고풍스럽고 부드러운 질감의 분홍빛 벨벳 드레스였다. 새로 맞춰 온 옷 중에선 가장 격식 있는 차림새였고 태리의 잿빛 금발과도 잘 어울려서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했었던. 중요한 자리나 행사 때에 입으려고 아껴 둔 거였는데 안시는 그것을 일찌감치 꺼내 태리에게 입혔다.
팔을 쇽쇽 껴 넣고 지퍼도 야무지게 올리고 주름과 매무새도 꼼꼼하게 잡는다. 부스스했던 머릿결도 윤기가 나도록 빗질해선 좌우로 두 가닥씩 땋아 굽슬거리는 긴 머리를 반묶음으로 마무리했다. 어젯밤에 재투성이 차림새로 들어왔던 공주의 모습이라곤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곱고 우아해졌다.
그러고도 부족한지 안시는 몇 번이나 확인 점검을 하듯 태리를 앞뒤, 좌우로 살펴보고 나서야 그녀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그럼 이제 문을 열까요.”
“아, 응. 그럼 나갈까?”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역작을 선보이는 듯 뻣뻣하게 긴장한 안시와 달리 태리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옷을 입으면 입는가 보다 했고, 나가야 한다고 하면 나가는가 보다 했을 뿐이다. 안시가 해야 된다고 하면 어련히 다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믿는 것이다. 아마 문이 열리고도 별다른 게 없었다면 또 아무 생각 없이 걸으라는 대로 걸었을 것 같았다.
“……?”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눈부터 동그래졌다.
“뭐 해요, 거기서?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방문 앞, 마룻바닥에 클로드가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건지 허둥지둥 일어서는데 쥐가 났는지 한쪽 다리가 조금 느리게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짧은 시간은 아닌 것 같았다.
“아…….”
목소리를 잃은 붕어처럼 입만 벙긋대면서 빤히 쳐다보는 게 민망해서 태리가 먼저 노크하듯 그의 어깨를 손등으로 콩콩콩 두들겼다.
“왔으면 왔다고 노크라도 하면 되잖아요.”
“그게.”
“제가 공주님께서 아직 주무시니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안시가 보란 듯이 가로채서 말했다. 약간의 씩씩거림이 느껴지는 게 남들은 모르는 실랑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냥 날 깨우지 그랬어.”
“깨우다뇨?!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 정도 참을성도 없다면 애초에 이 방 앞에 설 자격이 없는 인물인 겁니다. 기다리질 못하면 아예 오질 말았어야죠.”
“안시도 참, 왜 또 말을 그렇게 얄궂게 해.”
“공주님은 모르셔요. 이 총독은 동트기 전부터 이 앞에서 서성거렸단 말입니다!”
뭐라?
“내가 언제 동트기 전부터 왔나. 6시 15분에 왔다.”
지금 8시가 넘었는데?
“그 전에도 한 번 더 왔었잖아욧!”
“그거는 전해 줄 게 있어서 왔던 거지. 내가 일부러 왔나.”
“네, 그게 일부러 온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걸 보고 일부러 왔다고 표현합니다.”
“억지가 심하군.”
“총독이 이렇게 한가한 분인지 몰랐습니다. 잠도 안 잡니까?”
“생각할 게 많아서 좀 못 자긴 했어.”
한 지붕 아래에 있다는 생각에 새벽까지 잠자리를 설치긴 했다. 아침이 되면 또 볼 수 있다고 기대하니 별 갖가지 상상들이 다 떠올라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좀 전까지만 해도 안시와 잘도 티격태격하던 그는 다시 태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금세 또 눈 밑이 붉어져선 시선을 옆으로 회피했다.
“할 말 있어서 기다리고 있던 거 아니에요?”
아침부터 찾아와야 할 만큼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는데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어찌나 머뭇거리던지. 띄엄띄엄 나오는 말을 알아듣느라 태리는 귀를 쫑긋 세웠다.
“혹시 그, 괜찮으면…… 우리 가족들이랑 같이 아침 식사…… 하면 어떤가 해서. 다들 공주님을 궁금, 아니, 보고 싶어 해서요.”
식구들이랑 같이 식사하면서 어제 일을 해명하자는 뭐 그런 건가? 태리가 갸웃하며 고개를 기울였을 때였다. 여전히 자신은 없지만 바람은 한가득 묻어나는 목소리가 우물쭈물 흘러나왔다.
“소개해 주고 싶은데…….”
머리가 띵해진 건 그 한마디를 알아듣고 난 후부터였다.
소개라 함은 곧 자신을 그쪽 가족들한테 인사시키겠다는 것과 다름없는 뜻 아닌가.
술 마신 것처럼 얼떨떨했던 정신을 허우적거리며 현실로 되돌린 태리는 실감이 안 나는 듯한 얼굴로 한 번 끄덕하다가 다시 여러 번을 끄덕끄덕 흔들었다.
“가…… 가야죠, 당연히.”
가야지. 신세지는 입장에서 부르면 당연히 가야 하는 자리다. 그리고 또 클로드의 가족이 어떤 사람들일지 실은 궁금하기도 했다. 형을 먼저 만나 봤다지만 부모님을 만나는 것은 그것과는 또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이 밍숭맹숭하고도 건실한 남자는 어떤 부모님 밑에서 자랐을까.
기대감과 궁금증에 설레면서도 동시에 심장이 약간의 긴장감으로 널뛰기 시작했다.
‘그냥 식사일 뿐이잖아. 만나 보기만 하는 거라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 안 돼.’
불필요한 상상은 하지 말자. 가서 최대한 예의 바르고 얌전하게 행동하자. 태리가 어색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반면에 클로드의 입가에는 함박 미소가 걸렸다.
“고맙습니다.”
“이런 걸로 뭐가 고맙다고요.”
“그래도 갑자기 이런 말 한 게 미안해서.”
미리 상의도 없이 꺼낸 제안이 그녀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에 거절당할 수도 있다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든 졸라서 둘이서라도 꼭 같이 먹어야지, 그런 꿍꿍이를 펼치고 있었는데…….
그런데 거절당하지 않았다. 당연히 가겠다는 그 두 마디가 뭐라고 이렇게 기쁠 수가.
마음이 급해진 클로드가 앞장서서 계단을 쿵쾅쿵쾅 내려가며 들뜬 소년처럼 말했다.
“먼저 가서 말해 놓을 테니까 천천히 오십시오! 진짜, 진짜 천천히 와도 됩니다. 다치니까 한 걸음에 한 칸씩―”
“원래 공주님은 한 걸음에 한 칸씩 걸으십니다. 총독은 어째 본인 집에서도 경거망동하는군요?”
안시가 전보다 배로 까칠하게 쏘아붙이는데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모양인지 그는 미끄럼틀 타듯 후다닥 뛰어 내려가더니 금세 사라졌다.
태리는 클로드가 떠나고도 한동안 제자리에서 기합이 들어간 채로 서 있다가, 그의 말대로 정말 천천히 느릿느릿하게 아래층으로 걸음을 뗐다. 왜 떨리는 건지 모르겠는데 자꾸만 긴장된 숨이 후 하고 내쉬어졌다.
그 느림보 걸음을 보조하는 안시는 행여나 걷는 동안에 공주님의 어딘가가 흐트러질까, 그래서 흠잡히거나 안 좋게 비칠까 드레스의 리본을 고쳐 주고 빗으로 잔머리를 꼼꼼히 넣어주며 그녀를 1층까지 조심히 데려다주었다.
* * *
살얼음 걷듯 조심조심 걸어서 도착한 식사 자리에는 총 네 사람이 태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예배당에서 보았던 신관들의 옷을 간소화하여 재단한 양장복 차림의 공작, 정숙한 드레스에 숄을 걸치고 묵주를 목에 걸고 있는 공작 부인. 변함없이 실로 꿰맨 듯한 눈웃음에 무수한 단추로 이루어진 예복을 정갈하게 갖춘 큰아들.
그리고 넥타이를 풀어 놓은 셔츠에 바지 차림의 클로드.
왠지 백조 무리 속에 개구쟁이 흑조 하나가 끼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신실해 보이는 가풍을 지닌 집안이었다.
황실의 최측근이니 당연한 일이려나. 하지만 기이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마법사로서’ 불편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평범하고 화목한 보통의 가정 같았고 그녀는 그런 가운데에 그저 부끄럽게 서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앉기를 기다리며 덩달아 일어서 준 상냥한 이들을 향해 태리는 잔뜩 쑥스러움을 타는 목소리로, 그러면서도 가지런하고 예쁜 말씨로 인사했다.
“멋진 식사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부인이 환한 미소로 응대했다.
“어서 오세요, 공주님. 어젯밤에는 제가 피곤하여 일찍 잠자리에 드느라 귀한 분이 오셨는데도 직접 나가 보질 못했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하세요.”
“아, 아뇨! 괜찮아요!”
태리는 격하게 손사래를 쳤다. 여기서 더 뻔뻔한 공주가 되고 싶진 않았는데 공작 부인에 이어 공작 또한 그녀를 깍듯하게 대우해 주었다.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셔서 시장하시지요. 곧 음식이 나올 겁니다. 어서 앉으시지요.”
“아뇨, 먼저 앉으세요.”
“그래도 공주님이신데 공주님께서 먼저 앉으셔야 예의가…….”
“그래도 집주인이신데 주인이 먼저 앉으셔야 순서가…….”
미루듯이 서로 우선권을 양보하다가 갓 구운 빵이 식탁 위로 올라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스르르 다 함께 자기 자리에 앉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