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0화 (110/186)

110

제길. 가서 얌전히 예배나 볼 것이지 집엔 왜 기어들어 온 거야. 손에 든 것부터 허리 뒤로 감추고 클로드는 털을 바짝 세운 짐승처럼 자신의 형을 노려보았다. 

“뭐, 내가 못 올 곳 왔나.”

“에이, 그런 말 하는 거 아닌 거 알면서.”

“형 갈 길이나 가라고, 좀.”

들키지 않으려고 몸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뒷걸음질을 쳐 보지만 몸으로 가리기엔 이불의 부피가 지나치게 크다. 미리엘 역시 끈질기게 달라붙었으므로 그가 무엇에 손을 댔는지도 금방 들통났다.

“막둥아, 그건 우리 집 보물이야. 폐하께서 상으로 직접 하사하신 거라고.”

“뭔 우리 집 거야. 내가 잘해서 내가 받은 건데.”

“하지만 받자마자 별 쓸데없는 걸 준다면서 신경질 부리고 내팽개쳐 버린 건 너잖아. 근데 이제 와서 갑자기 그게 필요해?”

“어, 필요해. 공주님 줄 거야.”

“하하.”

내 물건 내가 주고 싶은 사람한테 주겠다는데 뭐 어쩔 거냐. 배 째라는 식의 태도에 미리엘은 유쾌한 웃음보를 터트렸다. 아, 정말 내 동생은 왜 이렇게 귀여운 거냐면서 은근슬쩍 엉겨 붙으려는 것을 클로드가 잽싸게 피해 냈다.

“나 방금 씻었어. 형 안 씻었잖아. 붙지 마!”

“너 지금 형이 더러워?”

“공주님 보러 간다고.”

“그래서 나 못 만지게 하는 거야? 너무하잖아.”

“너무해도 돼.”

이것보다 더 한참은 너무해도 되고말고다. 어딜 더러운 세균 같은 걸 묻히려고. 절대 근처에도 오지 말라며 클로드가 이빨을 드러내며 미리엘을 쌀쌀맞게 지나쳤다. 찬바람을 쌩쌩 맞으면서도 미리엘은 여전한 눈웃음으로 그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오면서 들었어. 공주님을 습격한 게 광신도들의 짓이라며? 근데 왜 갑자기 그놈들이 급발진했을까? 혹시 누가 자극했나?”

“그런 일 없어.”

모른다고 하지 않고 그런 일이 없다고 받아치는 동생의 순수함에 미리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올라왔다.

“그래? 하지만 치안대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소문은 꽤 자극적이던데. 수도 한복판에서 마법을 봤다나? 그거 때문에 다 쫓은 범인을 놓쳤다던데. 그때 쫓기던 범인이 듀폰 경이라는 건 꽤나 공공연한 비밀일걸?”

뒤에서 뭐라고 새살거리건 클로드는 무시하고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그의 형은 모르는 척하면서 사람 속을 떠보는 취미가 옛날부터 아주 고약했다. 고모와는 또 다른 형태의 악취미를 가진 인간이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지금 이 시점에선 너무나 한 사람뿐 아니겠어. 그래서 다들 쉽게 추측한다니까. 혹시 그날 듀폰 경을 빼돌려 준 게 공주님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야.”

“…….”

“공화파 당수와 마법사 간의 비밀 모의라니. 그 정도면 광신도들이 충분히 발끈할 만도 했지. 그런데 시기가 어쩜 그렇게 딱 맞아떨어졌을까. 기막힌 우연이야. 응!”

하, 진짜 이 인간이. 뒤질라고.

내내 무시하다가 못 참고 결국 클로드가 홱 뒤돌아섰다. 적당히 하라는 의미가 담긴 무서운 눈빛으로 내려 보는데도 미리엘은 해맑은 얼굴로 꿈쩍도 안 했다.

“드디어 형을 봐 주네!”

“자꾸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걱정 마, 다들 추측만 하고 사실이라곤 얘기 못 해. 그날 그 시각에 공주님은 너와 함께 황궁 예배당에 있었던 걸로 다 알려져 있잖아? 내가 받아 줬는걸. 내가 증인이고. 물론 내가 몰래 내보내 주기도 했지만 그건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이니까!”

……하, 미치겠네.

이걸 미처 대비 못 했다. 광장에 나갔었던 그날, 태리의 동선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 말고도 또 한 사람 더 있다는 것을.

그날 하도 존재감 없이 빠져 주길래 그쪽으론 전혀 생각 안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혹시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클로드가 미리엘의 옷을 쥐어뜯듯이 잡아당겼다.

“어디 가서 입 벙긋하기만 해.”

“벙긋!”

“여기서 확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해 버릴까 보다.”

열받아 죽겠는데 미리엘은 코앞에서도 그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하여간에 눈치만 징그럽게 빠른 인간이다.

월등하게 타고난 신성력 때문인지 그의 형은 어릴 적부터 무엇이든 훤히 꿰뚫어 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 무기 하나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허약한 신관일 뿐인데도 사람들이 그 앞에서 늘 쩔쩔매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인물이 제 형이건 남의 형이건 평생 쥐뿔도 관심 없었는데……

“너 요즘 무슨 짓 하고 다니는지 나 다 알아. 아버진 몰라도 폐하의 귀에 들어가면 아주 곤란할 일들이지, 아마? 후후.”

역시 이 인간은 지금 당장 암살해야 한다.

친형 암살을 되뇌며 클로드는 사약을 들이마시는 듯한 표정으로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하지 마, 그거.”

“응?”

“입 다물라고.”

“왜?”

“아, 진짜 제발!”

“제발, 뭘?”

“부탁……할 테니까, 형.”

“부탁?”

그러자 바로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미리엘의 입가가 봄꽃처럼 활짝 만개해서 폈다. 매일 가면처럼 걸고 다니는 가짜 미소가 아니라 진짜, 진실로 행복한 미소였다. 음성조차 쾌활했다.

“좋아. 그러면 우리 형 사랑해, 형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 이거 큰 소리로 세 번 외쳐 줘.”

“너는 진짜 암살감이야. 오늘 밤이나 내일 중으로 내가 반드시 끝내 준다.”

“에이, 그러지 말고.”

“꺼져 버려, 당장! 갈 때는 꼭 지옥으로 가, 알겠어?”

“너 나한테 여섯 살 때 이후로 그거 해 준 적 없어!”

“여섯 살 때도 더럽게 하기 싫었어, 그거.”

“세상에, 클로드. 난 평생 너를 목마 태워 다닐 수도 있단다.”

“난 걸어 다니고 싶다고! 그때도 지금도 항상 걸어 다니고 싶었다고!”

밖에 나가서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사실 공주와 기사는 그날 광장에 있었소! 하고 지껄이든지 말든지. 어차피 그전에 암살해 버리면 된다.

저 인간을 사랑한다고 세상에 외칠 바에야 그냥 비밀이 다 털리고 세상 전부와 싸우는 것이 더 명예롭고 영광스러울 것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말만은 못 하겠다는 각오로 클로드는 형을 밀치고 다시 지하계단 위로 쿵쾅쿵쾅 걸음을 빨리했다.

단번에 거절당한 게 상심이 컸는지 미리엘이 토라진 어투로 찡찡대며 뒤따라왔다.

“치, 그 이불은 기어이 가져갈 모양이네.”

“말 시키지 마.”

“넌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물론 그 공주님이 쪼오끔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건 인정하지만 마법사에다가 무려 이자리스의 왕족이라고. 공주님을 지키는 기사……. 그래, 기사는 언제나 그런 역할이긴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 관계를 환영하지 않을걸.”

두 사람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말이야. 그러니 나한테라도 잘 보여야 하지 않겠어? 그런 의도로 꺼낸 우스갯소리였는데 미리엘은 그 뒷부분은 마저 꺼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금고 문을 잠그며 돌아가던 열쇠가 열쇠 구멍에 꽂힌 채로 강한 힘에 의해 그대로 휘어져 버렸기 때문에. 문고리를 잡고 있는 클로드의 얼굴이 어두웠다.

“아니, 얘가 아무리 힘이 세도 그렇지. 여기다가 화풀이를 하네.”

휘어진 채로 꽂혀 버린 열쇠를 낑낑거리며 빼려는 정수리 위로 차갑게 굳은 음성이 떨어졌다.

“난 그냥 공주님을 지켜 주고 싶을 뿐이야. 나 혼자 그냥 안달 나서 내버려 둘 수가 없는 거라고. 그쪽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상한 소리 해서 괜히 그 사람 곤란하게 만들지 마.”

“……뭐?”

“나와 무슨 관계라도 되는 것처럼 헛소문 퍼트리지 말란 소리야.”

“하, 이런?”

처음에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깨졌던 미리엘의 절대 미소가 차차 흐트러져서 다시 쓰디쓴 웃음을 매다는 쪽으로 되돌아왔다.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고 해도 너희는 참 힘들 텐데, 라고 여겼건만. 그게 착각이고 오해라니? 서로가 그런 게 아니라 한쪽만 그런 거였다니?

이거는 아니지, 이런 식은. 그런 건 너에게 정말 좋지 않아, 클로드.

“그럼 너는 또다시 보답받지 못할 무언가에 네 자신을 쏟아 넣고 있는 거니?”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 눈꼬리가 매몰차게 변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웃고 있는데도 미리엘의 얼굴은 신벌을 내리는 신처럼 가혹해졌다. 동생이 또다시 누군가에게 이용당한다는 사실에 그만 환멸이 날 지경이었다.

“아, 어떻게 이런 바보가 다 있지? 뭐 이런 맹탕이 다 있을 수가 있어? 그런 건 희생이야, 클로드. 또 다른 말로는 이용이라고도 하고.”

“그런 거 아니야.”

“이런 식이면 너 내가 그 공주님 그냥 둘 줄 알아.”

지금도 거기로 가는 거지. 울컥해서 소매를 잡았더니 클로드는 곧바로 냉정하게 쳐 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뭐라도 하기만 해. 다시는 안 보고 산다.”

“너……”

“형 사랑해사랑해사랑해! 됐냐?!”

“어어?”

어어어?

누구 하나를 해칠 것 같은 얼굴로 어금니를 빡빡 갈면서 ‘형 사랑해’를 정확히 세 번 발사한 후 클로드는 갖은 욕설을 다 퍼부으며 후다닥 위로 뛰기 시작했다.

몽롱한 꿈이라도 꾸듯 손바닥으로 두 뺨을 감싸며 미리엘이 중얼거렸다.

“어디 그런 걸로 어림도 없……지 않으려나?”

이런 걸 보면 역시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것 같기도 하고. 저택을 부술 듯이 쾅쾅쾅 짓밟고 뛰는 뒤통수에 대고 그가 크게 소리쳤다.

“맹탕처럼 굴지 말고 요령을 부려, 동생아! 넌 가진 게 아주 많다고! 일단은 미남계를 써! 네 얼굴과 몸이면 웬만한 문제는 다 해결된다, 알지?”

쌍방향이 아니란 건 좀 화나지만 그래도 그의 높은 눈치력으로 살펴봤을 때 머지않아 쌍방향이 될 가능성은 상당히 농후해 보인다.

“아, 참! 그리고 있지 클로드……”

미리엘은 ‘형 사랑해’라는 외침에 대한 화답으로 ‘나도 사랑해!’를 그 뒤에 이어서 크게 세 번을 외쳐 호응했다.

잠시 후 ‘닥쳐!’라는 짧고 굵은 한 마디가 쩌렁쩌렁 지하에 울려 퍼졌다.

* * *

뻔뻔함에도 정도가 있는 것 아니냐. 어떻게 남의 집에서 이런 꼴로 이런 상황에 들어와서 잘 수가 있냐. 잠들 수나 있겠냐. 잠들면 그게 사람이냐……라고 자신을 통렬히 비난했던 태리는 어젯밤 따뜻한 물로 목욕 시중을 받고, 나오니 착 대기하고 있는 뽀송뽀송한 잠옷을 입고 안시를 기다리다가 ‘좀만 앉자’라고 생각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아침까지의 기억이 몽땅 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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