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발꿈치를 들면서 제게 따지는 태리의 이마를 손끝으로 톡 눌러서 도로 내리고, 클로드는 지시하던 명령을 끝마쳤다.
“신속하게 복귀할 준비를 한다. 공주님의 신변은 이 시간 이후로 공작가에서 책임질 테니 근위대는 그런 줄 알아. 내 명령이 억울하면 나랑 싸워서 이기고 뺏어 가든지.”
“그런 불가능한 조건을……”
“출발한다.”
클로드보다 늦게 현장에 도착한 황제의 군사들은 그의 일방적인 횡포에도 할 말이 없었다.
맨 처음 그에게서 공주의 호위권을 뺏었을 때는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었다. 하지만 근위대의 호위가 허술해서 이 사달이 난 지금에는 그 명분에 체면이 서질 못 한다.
절대 권력인 황제가 따로 언질이라도 남겨 줬다면 그걸 빌미로 저항이라도 해 보겠으나 황제는 아직 그에 대한 어떠한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모두가 바쁘게 떠날 채비를 하는 가운데에 안시와 함께 보냈던 기사가 다시 태리에게 다가와 작은 바구니를 건넸다.
“공주님. 제가 끝까지 모실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공작저로 가시게 되다니…… 이건 혹시 몰라서 챙겨온 담요와 물입니다. 가시는 길에 필요하시면 쓰십시오.”
“세상에, 고마워요. 경도 오늘 고생이 정말 많았어요.”
놓치고 가는 것은 없는지 마지막 점검차 현장을 둘러보고 온 클로드는 그 착한 기사가 태리에게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얼굴이 똥 묻은 휴지처럼 구겨졌다. 저 멀리에서부터 득달같이 달려와선 기사를 겁먹여 쫓아내 버렸다.
“경은 돌아가면 임무 소홀에 대한 처벌이 있을 텐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당장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라. 더 무거운 처벌을 받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아닙니다, 단장님! 저는―”
“빨리 가라고.”
“앗, 예!”
“얼씬거리지 마라.”
* * *
발로란의 수도 1번가에는 주요 관공서들과 함께 마치 그것들을 거느리듯이 자리 잡은 아득한 크기의 대저택이 위치하고 있다.
압도적인 규모에 역사조차도 깊은 저택으로, 지금의 황궁이 완공되기 전에는 황제가 잠깐 기거하기도 했었던 곳이라 사람들의 입에서는 종종 1번가의 성이라고도 불리지만 공식 명칭은 데본셔 공작저다.
표면적으로는 데본셔 지방을 소유한 공작의 집이란 뜻이었고, 더 명확히는 황제로부터 가장 신임받는 그의 형제가 살고 있는 곳이라는 뜻이었으며, 현재는 제국에서 가장 으뜸가는 신관과 성기사를 한 세대에 동시에 배출해 낸 신의 축복이 서린 곳이다.
그런 대단한 저택치고는 좀체 호들갑스러운 적이 없는 편이었는데, 어째선지 오늘은 수백 개의 창문에 불빛이 전부 환하게 밝혀질 정도로 야단법석이 났다.
“저 왔습니다.”
“막둥―”
“아버지.”
“아, 아차차…… 그, 그렇지. 크흠. 그래, 왔느냐. 그런데 저분은?”
“이자리스에서 오신 공주님이십니다.”
“헉!”
이유는 이 집의 막내가 귀가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예고도 없이 귀가해선 연락도 없이 여자를 무작정 집으로 데리고 왔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을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뽀얀 도자기 인형 같은 아가씨였는데, 그 막내 공자의 뒤에 숨어서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보자마자 꺅 소리 나올 정도로 요정처럼 귀엽고 어여쁜 외모였다. 어디에서 구르다가 온 건지 옷과 얼굴에 얼룩덜룩한 재가 묻어 있다는 특이한 점만 빼면 인형이 살아 움직인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재가 덕지덕지 묻은 뺨은 현재 민폐와 민망함으로 인해 홍시처럼 익어 있다.
놀라서 입이 벌어진 공작에게 그녀는 ‘안녕하세요, 공주입니다. 갑자기 들이닥쳐서 죄송합니다.’를 작은 목소리로 무한 반복했다.
그에 반해 이 댁의 막내는 한 점 부끄럼 없이 부모 앞에서도 기세가 당당했다.
“미리 소식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공주님께서 위험한 일을 당하셔서 경황이 없으니 오늘은 쉬고, 내일 날이 밝을 때 자세히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됐다. 그냥 그런 줄 아셔라. 궁금한 건 내일 대충 말하겠다. 그런 뻔뻔한 얘기였지만 이 집의 공작은 막내아들의 박력에 예외 없이 껌뻑 죽는 편이다.
“어어, 그래그래. 그, 그래야지.”
그가 멍한 채로 고개를 끄덕이자 곧 칼같은 지시가 귀가 쫑긋 선 집사에게로 향했다.
“공주님께서 쉬실 곳을 마련해라. 서둘러.”
“예, 그런데 도련님. 공주님의 짐은 어디에 있으신지요.”
“없어.”
“아무것도…… 말입니까?”
“여기서 마련하면 될 거 아냐. 그…… 안 되나?”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공주님께서 불편하지 않으실지…….”
처음부터 몸만 온 게 아니라면, 소지품은 놔두고 숙소만 옮겨지는 상황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모른다. 클로드는 거기까지 미처 고려하지 못했고 태리는 그거 보라며 화난 왕관 앵무새 같은 눈으로 조용히 씩씩거렸다.
“지배인이 별궁을 들렀다가 온다고 했으니, 그때 알아서 잘 가져올 겁니다. 신경 쓰지 말고 공주님은 가서 쉬십시오.”
“씨이…….”
“가요, 얼른. 푹 쉬고. 잘 자고.”
어른 앞이라서 따따부따 말은 못 하고 표정으로만 골이 난 태리를 클로드가 휙 돌려 세워서 밀었다.
모르긴 몰라도 은근히 티격태격하는 분위기였는데 기둥에 조르륵 붙어서 훔쳐보던 공작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는 듯이 놀란 물음표를 띄웠다.
“작은 도련님이 여성에게 저런 말을?”
“저런 목소리로?”
“저런 얼굴로?”
“눈도 못 떼시는데?”
여자를 데려온 것도 뒤로 자빠질 만한 일인데 그 여자에게 쏟는 관심의 정도가 남다르지 않은가.
이 댁의 작은 도련님에게 여자라는 것은 여자라기보다는 사람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만큼 여성이라는 성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고 의미가 없으니 관심도 주지 않아서 어쩌다가 무도회에 끌려가는 일이라도 생기면, 입은 옷 색깔로 방금 지나간 여자와 아까 지나간 여자를 겨우 분간해 내는 사람이었다.
가끔은 ‘가만, 여자였나? 아니, 남자였나?’ 하고 중얼거려서 그의 눈길을 받으려 앞을 서성거렸던 여러 명의 아가씨들에게 본의 아니게 큰 실례를 저지른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쉴 곳, 누울 곳, 먹을 것까지 일일이 잔소리를 하며 챙기고 있었다.
심지어는 먼저 어깨를 만지거나 팔뚝을 잡기도 했고 미적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가는 공주님의 등을 보면서는 난생처음 보는 미소를 보여 주기도 했다.
‘작은 도련님이!’
‘드디어!’
‘드디어?!’
사람들은 다 함께 소리 없는 함성을 내질렀다. 그동안 다른 집 녀석들에게 ‘야, 너희 집 작은 도련님은 고자라며? 에베베―’라는 개소리를 들을 때마다 얼마나 분했는지 모른다. 아니라고 속 시원히 부정하지 못했던 건 더 속 터지는 일이었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놈들이 틀렸다. 이젠 아니라고, 우리 도련님은 여자에 아주 환장하는 인간이라고 마음껏 반박해도 된다.
감격으로 가슴이 웅장해진 게 그들만은 아니었는지 미련 없이 나가려는 클로드의 허리에 난데없이 공작이 매달렸다. 그 역시 격하게 감동한 나머지 마음의 소리를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야!”
“아, 왜 귀찮게 허리에―”
“내 아들은 고자가 아니었어!”
허리에 붙은 손을 떼어 내려던 클로드는 공작의 환호를 듣자마자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악물린 잇새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글자들을 끊어 낸다.
“공주님 앞에서 그런 멍청한 소리 꺼내면 다시는 제 얼굴 못 볼 줄 아십시오.”
“헉!”
협박을 단단히 이르자 공작은 두 손으로 자기 입을 봉하며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거듭해서 약속했다.
그래도 여전히 못 미더운 눈치였지만 클로드는 한숨을 쉬곤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재빠르게 아버지를 지나쳤다.
가면서 마주친 수많은 이들의 눈빛은 어처구니가 없게도 아버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다들 자신을 뭐라고 생각했던 건지. 그중에 어린 녀석마저 끼어 있길래 꿀밤을 먹여서 흐에에엥 울려 버렸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몇 번을 말해.”
예전에는 남들이 그렇게 오해하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쓰였는데 이제는 그런 얘길 들으면 성질이 난다.
정말 돌덩이처럼 아무것도 안 느껴지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그는 심지어 무척이나 자제하고 있는 중이었다. 진짜 어렵게, 힘들게 참고 있는 중이었다.
알지도 못하면서.
긴 다리로 계단을 몇 개씩 건너뛰어 방으로 들어온 클로드는 목욕물을 데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됐으니 그냥 두고 나가라고 손짓했다.
바빠 죽겠는데 따뜻한 물이 아니면 죽어도 씻지 못하는 그런 곱상한 공자님은 아니었으니까.
남들이 보면 정신 수련이라도 하는 거냐고 할 만한 시린 물속에 들어가서 머리를 벅벅 감고, 몸을 깨끗하게 씻은 뒤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면서 남는 손으로는 땅굴 파는 두더지처럼 옷장을 막 헤집었다.
근육으로 덮여 있던 넓은 등은 물기가 다 마르기도 전에 셔츠 구멍에 얼굴을 쑤셔 넣는 그의 행동으로 인해 곧 사라졌다.
닦던 수건은 목에 건 채, 그는 다시 살살 문을 닫고 제 방을 빠져나왔다. 나와서는 복도에 아무도 없는지를 확인한 다음 발소리를 죽여 지하로 내려갔다.
‘손님방은 오랫동안 비어 있어서 싸늘할 거야. 불 피우려면 시간도 걸릴 거고.’
발로란은 이자리스보다 추운 편이므로 태리가 아직 이 기온에 익숙해져 있을 리가 없었다. 공작가의 지하 금고에 열쇠를 끼워 넣으며 그는 안에서 찾아야 할 물건을 즉각 떠올려 냈다.
금고에는 수백 년에 걸쳐서 착실하게 축적되어 온 가문의 보물들이 박물관처럼 전시되어 있었다.
희귀한 옷감에서부터 장신구, 오래된 화폐와 고서, 타국의 향신료까지 종류를 가리지도 않는다. 하나하나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는 그것들을 클로드는 또다시 두더지 같은 손으로 거칠게 파헤쳤다. 상자란 상자는 죄 열어서 얼굴을 박고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휙휙 뒤로 던진다.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아내곤 입가가 환해졌다.
황금 담비 털로 된 실크 이불. 한낱 이불이라고 무시하기엔 마감과 장식이 예사롭지가 않다. 무엇보다 팔 안에 감기는 순간 즉시 후덥지근한 온기를 전해 온다. 보관함 안에서 향료 주머니와 함께 들어 있어서 그런지 냄새조차도 향기로웠다.
이거면 됐다. 주변은 난장판으로 만들고 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돌아섰을 때였다.
“우리 막둥이, 일찍 왔네? 여기서 뭐 해?”
“……!”
문가에 팔짱을 끼고 기대서선 너 하는 짓을 내가 다 지켜봤다는 듯 미리엘이 눈웃음을 생글거리며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