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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간 쪽을 추격하느라 절반이 빠져나갔다. 생각보다 많은 수가 쫓아가긴 했지만 안시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으므로 별 탈 없이 잘 도맡아 줄 것이다. 덕분에 머릿수가 수월하게 분산되어서 좋았다.
“다라면? 왜, 여기가 정정당당히 겨루는 수련장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는가 보지. 우리가 왜 이런 장소를 써먹었는지 적당히 생각을 해야지. 순진하긴.”
“아아.”
태리는 괴한들이 말한 대로 순진해 보이는 눈을 끔뻑거리며 놈들의 강제적인 손길에 이끌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만큼 열심히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거 괜찮으려나?’
왜냐면 좀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검은숲의 몬스터만을 사냥하며 밤낮으로 뒹굴뒹굴하는 일상을 보내 왔다. 인간을 상대로 싸워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싸운 적이 있긴 한가 싶기도 하고.
‘마법을 안 쓸 거긴 하지만 그래도.’
정도를 넘어설까 봐 걱정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괴한들은 그녀를 가두듯이 구석의 내림벽 같은 기둥으로 끌고 가 세웠다. 그러더니 안으로 열심히 옮기던 나무통을 열어 그 안에 든 액체를 주변으로 뿌리기 시작했다.
코 속을 비릿하게 쑤시고 들어오는 냄새를 맡아 보니 틀림없이 기름이었다.
정말 마녀 화형식이라도 할 요량이었던 건가.
어휴, 이거 정말 못된 녀석들이네.
태리가 못마땅하게 그걸 지켜보거나 말거나 놈들은 바닥이 흥건해질 정도로 기름을 뿌리더니 곧 나머지는 물러서고 한 명만이 쇠꼬챙이 같은 긴 창을 들고 앞으로 다가왔다.
기둥에 세워 두고 또 묶으려나 했는데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전혀 그쪽이 아니었다. 저걸로 제 몸을 찔러서 꼬챙이처럼 이 기둥에 꿰어서 고정시킬 생각이었던 거다. 정말 악질이었다.
‘미친놈들 아니야. 내가 뭘 잘못했는데.’
어디 가까이 오기만 해 보라고 입을 씰룩거리며 구시렁거렸더니 괴한이 한쪽 입가를 비열하게 치켜올렸다.
“흐흐, 무섭나? 걱정 마라. 금세 불을 붙여 몸을 태워 줄 테니.”
무섭긴. 지금 벼르고 있는 건데.
태리는 놈이 완전히 다가올 때까지 작은 미동도 없이 제자리를 지키다가, 창이 쑤욱 자신의 배 쪽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순간 바닥의 미끄러움을 이용해 몸을 옆으로 돌려서 피했다.
그러곤 비껴 나간 창끝을 발로 콱 밟아서 놈의 자세를 무너뜨린 뒤, 다시 신발을 쭈욱 측면으로 미끄러트려서 그의 허리춤에 있던 단도를 빼 얼른 놈의 허벅지에 꽂아 버렸다.
“으악!”
횃불을 들고 대기하고 있던 녀석들은 제 동료가 당한 것을 보곤 그녀를 붙잡으려 허겁지겁 달려든다. 하지만 기름칠한 마룻바닥이 미끄러워서 빠르게 뛰지 못했고, 섣불리 입구부터 막으려 속력을 내다가 엎어지기도 한다.
태리는 죽을힘을 다해 밖으로 도망칠 것처럼 애쓰다가, 허를 찌르듯 돌연 행동을 바꿔 찬장으로 도달한 뒤 자신이 반납했었던 무기를 찾아서 재빠르게 착용했다.
빼 둔 총알을 쓸어 담듯이 탄창 속으로 회수하고 도끼를 허리춤에 꽂은 뒤 잽싸게 로프 런처를 낀다. 그러곤 자신을 낚아채려는 위협이 덮치기 바로 직전에 천장의 샹들리에로 와이어를 쏴서 그 위로 쭉 끌려 올라갔다.
“으윽, 젠장! 쥐새끼같이!”
위로 피신해 한 번 위기를 모면하긴 했지만 계속 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다. 언젠가 내려오긴 해야 한다. 괴한들은 악다구니를 써 가며 그녀가 내려올 순간을 살벌하게 재며 기다렸다.
하지만 태리는 내려가지 않았다. 샹들리에의 끝을 양손으로 잡고 그네 타듯이 흔들흔들 좌우로 크게 움직이다가, 그 반동을 이용해 기름칠이 되어 있지 않은 2층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비켜! 내가 처리한다!”
층계참으로 떨어진 그녀를 처치하기 위해 한 놈이 맹렬할 기세로 돌파해 왔다. 태리는 기둥 앞에서처럼 일부러 몸을 열어 정면을 노출시켰다. 누가 봐도 탐스러운 빈틈이 보이면 보통은 거기를 때리지 않고는 못 버틴다.
그러므로 녀석이 어느 방면에서 어떻게 달려들지를 예상할 수 있었다.
양손으로 도끼를 움켜잡은 태리는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힘을 비축했다가가 놈이 소리를 지르고 달려드는 그 순간, 팔을 있는 힘껏 휘둘러서 계단 아래로 날려 버렸다.
도끼날에 가슴을 얻어맞은 남자는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져서 기름 바닥에 쭉 밀리더니 가구 모서리에 머리를 박은 다음 몇 번 들썩이다가 곧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마법이라곤 일절 없었는데!
아래에서 상황을 목격한 자들은 경악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보란 듯이 태리는 섬뜩하게 빛나는 도끼날을 손으로 쓸며 아주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땐 도끼가 참 좋지.’
이래서 처음 무기를 선택할 때 도끼를 잡았다. 유용함에 있어서는 당연히 검을 따라갈 수 없지만 숙련되기까지 장시간의 훈련이 필요한 검과 달리 도끼는 특별히 사용이 어렵지 않다.
무거운 날로 상대를 직격하는 데에 핵심이 있으므로 전투가 익지 않은 초보자도 어떻게든 찍기만 하면 한 방을 먹일 수 있다. 약간 반전을 선사하는 매력이 있달까.
그런 점에서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무기가 되지 않을까도 싶었다.
마법을 쓰기 때문에 마법사는 끔찍한 존재이고 사라져야 할 존재라는, 놈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그 고루한 편견을 오늘 이 자리에서 산산조각으로 파괴해 바꿔 줄 것이다.
“실례합니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도끼만 쓸 테니까.”
그녀가 다시금 피 묻은 도끼날을 쓸었다. 아름답고도 섬뜩한 자태가 살육의 천사 같았다.
* * *
공주가 습격을 당했다. 소식이 퍼지자마자 황궁은 발칵 뒤집혔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친 기사가 도달한 곳은 예배당에서 취침 전 저녁 기도를 드리고 있는 황제의 앞이었다.
창백해진 그녀의 낯빛보다 앞서 미리엘이 낭독하고 있던 기도문을 끊었고, 그보다 더 먼저 예배석에 앉아 있던 클로드가 튕겨지듯 일어섰다.
황제는 성수에 담갔던 손을 닦지도 못한 채로 달려와 뛰쳐나가려는 조카를 막았다. 투구를 쓴 여신상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클로드, 기다리거라! 야경 부대를 호출해 줄 테니 기다렸다가 그들을 데리고 가도록 해라. 흥분하지 말고 차근차근히……”
“전부 죽여서 길을 열겠습니다.”
“그런 무모한 짓을! 이 일은 내가 처리하마.”
“예배 보십시오.”
“마음이 급한 건 나도 다르지 않아.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욱 준비가 완벽하지 않아선 안 된다.”
완벽? 그 말에 제대로 열이 받은 것처럼 클로드의 안색이 하얗게 타올랐다.
“그런 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얘기입니다. 어떤 게 손해고 어떤 게 이득인지 계산할 수 있을 때나 하는 거라고요.”
그러니 비키라고. 여유가 없는 손길이 감히 황제의 팔을 밀치고 지나갔다.
“저 망둥이 같은 녀석이. 내 생각도 모르고……!”
클로드의 등에 대고 강하게 소리치는 황제에게 미리엘이 걸어와 젖은 손을 닦을 수 있도록 손수건을 전했다.
“놔두시죠. 폐하의 눈엔 망둥이처럼 보여도 수십 기의 군대를 이끄는 사령관입니다. 사지로 자처해서 들어가는 일이야 늘 하던 일인걸요. 줄곧 그렇게 키우지 않으셨습니까? 오직 그 힘만을 떨쳐도 될 정도로 강하게 키우셨잖습니까.”
“미리엘, 너까지.”
“마침 다른 성기사들이 쫓아도 갔고요. 저러는 걸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니 훌륭히 보조할 겁니다. 너무 걱정 마시라는 뜻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보이는 그대로 막무가내는 아닐 거라고 미리엘이 정정했으나 황제는 여전히 진정되지 못한 상태였다. 말을 안 듣고 멋대로 가 버린 클로드도 클로드였지만, 공주에 대한 공격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도 그녀의 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 분노에 미리엘의 흥미로운 목소리가 찬물을 끼얹었다.
“그나저나 제 사랑스러운 동생이 마법사 공주님의 일에 무척이나 필사적이군요.”
황제가 멈칫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거니?”
“전 동생에게 관심이 많은 형이라서요. 폐하께서 그 애에게 쏟으시는 관심의 크기에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많죠.”
“그런 실없는 얘기가 어울리는 상황은 아니지.”
“아뇨. 아주 잘 어울리는 때입니다. 누가 더 그 아이에 대해 잘 아는지 저와 내기라도 하실래요? 저는 방금 제 동생에게서 아주 여러 가지의 감정을 봤는데 말입니다.”
“미리엘!”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건 복잡하죠. 어느 단계에 이를 때까지 한순간에 뛰어오를 수 없어요. 여러 단계를 거쳐서 변하고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령, 사랑이라는 걸 예로 들자면.”
적당히 하라는 황제의 경고성 눈빛에도 미리엘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고 가벼운 입을 새살거렸다.
“어떤 상대가 내 눈에만 예뻐 보이는 것.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게 조금 더 심해져서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레거나 반대로 미어져도 여전히 그럴 수 있는 단계죠. 하지만 헛디딘 한 발에 절망스러운 것? 그때부터는 진지하게 고민을 해 봐야 합니다. 거기서 더 갈지, 멈출지. 그런데 멈추지 못하고 전진해서 끝내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졌다면 그땐 영원히 헤어나올 수가 없게 돼죠.”
“…….”
“위기에 빠진 공주님을 극적으로 구출하고 나면 제 동생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남을까요. 함께 불속에서 빠져 나와 뭐 겨우 숨이나마 쉬게 되겠죠? 그리고 깨달을 겁니다. 헤어나오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이것보다 더 그 애의 마음을 잘 설명할 수 있으십니까?”
여우가 꼬리를 살랑거리듯 긴 소매로 입을 가리고 눈만 실금처럼 접히는 저 표정이 저리도 얄밉게 느껴질 수가 없다. 웃음의 의미도 투명하게 읽혔다.
눈치 빠르고 똑똑한 분이니까 이미 알고 계시죠? 하는.
“돌아오면 수고했다고 칭찬하시고 따뜻하게 맞아 주세요. 괜한 짓 해서 클로드에게 미움받을 필요는 없잖습니까. 이미 눈에 뵈는 게 없어질 단계가 되었을 텐데.”
“아니. 그러면 안 되지. 그 아이들은.”
“왜죠?”
“나를 거역하는 거니?”
견디다 못해 쥐고 있는 권력으로 쏘아붙인 한마디에 미리엘은 그녀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며 잔뜩 울상 지었다.
“동생에게 관심을 가지듯 전 고모님에게도 많은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사정은 알지 못해도 마찬가지로 감정만큼은 읽었죠. 이자리스라는 그 작은 땅을 자신의 손으로 어떻게든 구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집착. 후회. 미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