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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놈의 마법사가? 이게 다 뭐야. 소시지처럼 줄줄 뽑혀 나오는 무기의 향연에 입을 다물지 못하던 놈들은 이해할 수 없는 기색으로 그것들을 회수하다가 지팡이는 어디 있느냐고 윽박질렀다.
그러자 곁에서 짜증 난 한숨을 내쉰 안시가 머리에 꽂혀 있던 비녀를 뽑아내 내려놓았다. 땅에 내려놓는 순간 비녀는 단숨에 크기가 커져 지팡이가 되었다.
괴한들은 지팡이를 보자 그것만 없애면 될 거라고 여겼는지 자루에 넣고 입구를 꽁꽁 둘러 묶은 뒤, 상자에 봉하고 또 다른 상자에 몇 겹이나 봉해서 튼튼한 자물쇠를 채웠다.
“저거 비싸, 안시?”
“아뇨, 뭐 돌아가서 다시 새 걸로 사면 되지요.”
그다음에는 순순히 포박당하라던 두 번째 요구에 맞춰 팔이 허리 뒤로 둘린 채 굵은 밧줄로 손목이 칭칭 감겼다.
마법사 둘과 기사 하나, 마부 한 명까지 모조리 무방비 상태로 만든 괴한들은 그대로 그들을 어두운 흙길로 걷게 한 뒤 길가에 버려져 있는 한 폐가로 밀어 넣었다.
이런 집을 아깝게 누가 버렸나. 시킨 대로 안으로 들어서며 태리는 내부를 휘이 살폈다.
대저택으로는 어림도 없지만 그래도 3층까지 계단이 나 있는 나름 규모가 있는 집이었다.
필요한 가구까지 대부분 갖춰져 있음에도 사용감이 없고, 벽난로에 남아 있는 재마저 최근의 것이 아닌 걸로 봐선 오랫동안 비어 있는 상태였다는 걸 확신했다.
이 집을 통째로 태워서 화형시키자고 떠드는 헛소리를 들으며 태리는 묵묵히 구석에 앉아서 돌아가는 사정을 눈으로 파악했다. 반납했던 무기들은 찬장 위로 치워져 있고 그 외에 다른 요긴한 물건들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곧 기절해 있었던 기사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절망 어린 눈빛으로 태리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일어났군요.”
“죄송합니다, 공주님. 사고를 당할 줄은……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많은 호위를 데리고 올 것을―”
“그쪽 잘못이 아니에요.”
스스로 자청해서 파 놓은 무덤이었기에 더 많은 호위가 있었다면 어쩌고저쩌고가 나오기 전에 얼른 기사의 말을 싹둑 해 버렸다. 그런 다음 ‘당신을 죽인다고 해서 저항하지 못했어요’라며 자책감을 무겁게 만드는 발언을 슬쩍 얹었더니 기사는 더욱 죄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공주님. 호위 기사로서 도저히 면목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태리는 그에게서 죄송함이라는 감정만을 안기는 데에 성공했다. 죄책감이 훌륭하게 어려 있는 숙여진 고개를 보다가 그녀가 다시 괴한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며 말했다.
“우릴 작정하고 덮친 것 같아요. 숫자도 적지 않아요. 내가 여러 번 세어 봤는데 여덟 명이나 돼요.”
게다가 도주로나 동선 같은 것들을 잘 통제하고 있어서 수비에 물 샐 틈도 없다.
창문은 닫아서 자물쇠를 달아 놓았고 숨을 만한 방에는 널빤지로 문에 못질을 해 놔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 두었다. 위층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1층에는 이 거실 말고는 딱히 숨을 곳도, 피할 곳도 없었다.
유일한 통로가 있다면 들어올 때 이용했던 저택의 대문이었다. 놈들이 커다란 기름통 같은 것들을 안으로 옮기느라 그 문은 아직까지 열려 있는 상태였다. 옮기는 작업이 끝나면 저 구멍마저도 막히겠지만 아직까진 열려 있었다.
“세월이 참 안 좋게 변했어요. 요즘 악당들은 지능적이군요.”
“예,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군요.”
솟아날 자리가 없다는 공주의 말에 기사는 동의하며 더욱 크게 낙담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하지만 자포자기한 듯한 그와는 달리 공주는 거기서 말을 끊지 않고 계속해서 입을 움직였다. 처음부터 아예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한 것 같기도 했다. 그가 기절해 있었던 동안 미리 짜 놓았던 대사를 외워서 줄줄 읽는 것처럼.
“그러니까 이럴 때는 정말 판단을 잘해야 돼요. 어떤 걸 우선으로 할 건지. 그게 방어인지, 공격인지 아니면 탈출인지. 고른 다음에는 또 어떤 방법을 쓸 건지.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 뭐가 남았는지.”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리고 내가 봤을 때 지금 최선의 답은 탈출인 것 같아요.”
“예?”
“줄곧 그쪽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렸어요. 정신이 들었으면 이제 달아날 준비를 해야죠.”
“무, 무슨―”
“기사로서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검은 버려요. 무거우면 속도가 느려지니까. 말고삐를 쥐게 되면 절대로 뒤돌아보지 마세요. 지름길로 가겠다고 비포장된 길로 달리는 모험도 피해야 돼요.”
“공주님?”
“저들이 어디까지 대비를 했을지 모르니 본궁이 아닌 다른 곳으로는 도움을 청하지 마세요. 말을 타고 달리면 30분 남짓이겠죠. 긴장만 늦추지 않는다면 안전하게 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낮고 은밀하게, 빠르고 간략하게 내지르는 주의 사항이 부드러운 음성을 타고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기사는 그게 다 무슨 소리인지 얼떨떨해하다가 자신을 격려하는 듯한 공주의 희미한 미소에 서서히 얼굴색이 달라졌다.
아, 공주께서 나를 보내실 작정이구나. 그는 아주 멍청하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또렷한 지시 또한 금세 이해해 나갔다.
“말이 저 문 밖에 묶여 있는 겁니까.”
“네, 우리 마차를 끌고 온 한 필의 말만 남았어요.”
“하지만 마부가―”
마부가 있지 않습니까. 그는 그렇게 대꾸하며 옆을 보았다가 불현듯 자신들 가운데에서 마부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난히 말이 없었던 노인. 벙어리인가 싶어서 말을 붙이면 게슴츠레 초점이 없는 눈으로 ‘예’, ‘아니오’만을 대답하길래 어딘가 묘하게 기분이 나빴던 마부.
그래도 같이 잡혀 온 게 내심 안타까웠던 노인이었다. 그런데 그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다. 분명 방금 전까지 제 옆에 결박당한 채로 같이 무릎이 꿇려 있었는데!
커다랗게 변한 눈을 좌우로 돌리던 기사는 곧 마부가 묶여 있던 자리에 사람 형상의 지푸라기 인형 한 개와 밧줄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마, 마, 마부가……!”
“그럼 마법사의 마차를 끄는 마부가 진짜 사람인 줄 알았어요?”
“헉!”
“쉿. 저들이 아직 눈치채지 못했으니 그런 큰 소리는 내지 말아요.”
기사는 벌렸던 입을 허겁지겁 다물며 침착하려고 노력했다. 공주가 했던 당부 중에 ‘말의 고삐를 쥐게 되면’이라는 구절이 어떤 뜻이었는지도 비로소 간파했다.
“공주님, 그렇지만…… 우리는 감시를 받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부터 문밖을 빠져나가 말잔등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 못할 겁니다.”
“그렇죠. 그게 가장 큰 문제죠. 그래서 말인데 여기 있는 안시와 함께 가는 게 어떨까 해요. 혼자는 무리일 테니 든든한 동료를 붙여 주도록 하죠.”
동료라면 공주의 시녀를 말하는 건가. 고작해야 시녀 따위가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인지. 걱정하지 말라는 공주의 대안책에 기사는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곧 그 시녀가 묶여 있던 밧줄을 여유롭게 푸는 모습을 보곤 다른 의미로 말을 잇지 못했다.
“어, 어, 어떻게?”
“안시는 환술의 대가예요. 원래의 손 크기보다 살짝 더 크게 보이도록 해서 묶이는 눈속임 정도는 일도 아니죠.”
그러니까 애초에 시녀의 손목에 걸려 있던 밧줄은 꽉 묶인 적이 없었다는 소리였다. 성긴 채로 헐렁하게 걸쳐만 있었으니 그냥 후드득 털면 풀린다. 괴한들이 본 것은 안시가 걸어 둔 환영이었다.
“그럼 잘 가요. 생전 해 보지도 않은 경험을 겪게 만들어서 유감이에요. 내 잘못은 아니지만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공주님은 피하지 않을 작정이시군요.”
“내가 피하면 저 여덟 명이 모두 우리의 뒤를 쫓아오겠죠. 그러면 도주에 성공할 확률이 너무 떨어져요.”
애초부터 저들이 노리는 것은 공주였고 목표물이 손아귀로 빠져나가면 놈들이 사력을 다해 다시 붙잡으려 들 게 뻔했다. 하지만 그게 아닌 졸병의 도주라면 그보다는 덜 정성을 들일 것이다.
“……제가 살아서 어디로 가야 합니까.”
“글쎄요. 어디로 가야 할까요. 가장 힘세고 가장 강한 사람이 있는 곳?”
웃음기가 연하게 묻어 있는 공주의 농담을 끝으로 문밖에서 뭔가가 크게 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소리는 폭탄처럼 컸고 뿜어진 연기는 그보다 더 뿌옇게 번져서 삽시간에 입구가 보이지 않는 연막으로 가득 차오른다.
그 사이에 눈초리가 매서운 시녀에 의해 자신의 손이 자유롭게 풀리는 것을 느낀 기사는 이 순간에 도망을 쳐야 한다는 것을 누가 일러 주지 않아도 곧장 눈치챌 수 있었다.
뿌옇게 변해 버린 연기 속으로 뛰어들며 그는 가려져서 더는 볼 수 없게 된 공주가 묶여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신께서 당신의 안전을 굽어 살펴 주시길.”
공주는 떠나는 그를 위해 담백한 기도를 해 주었다.
그러니 지금 이게 얼마나 역설적인 상황인지 모를 일이었다.
존재 자체로 신을 모욕하니 화형을 시켜 버리겠다는 명목으로 잡혀 온 마법사가 정작 가장 진실되게 그 신의 가호를 빌어 주고 있다는 것.
‘반드시 이 사실을 전해 구하러 오겠습니다. 부디 그때까지만……!’
정의감에 사로잡혀 이를 악문 기사는 그녀가 시킨 대로 시녀와 함께 말잔등에 올라타선 힘껏 말의 허리를 발로 찼다. 그것을 가로막으려는 자들의 손길이 득달같이 뻗어져 왔지만, 매서운 눈길의 시녀가 소매를 펄럭거리자 주변의 이파리들이 떠오르며 순식간에 그들의 모습을 똑같이 복제해 냈다.
* * *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였던 대문이 닫혔다. 저택을 빠져나갈 수 있었던 마지막 방법이 그렇게 사라졌다.
독 안에 든 쥐. 괴한들은 모두가 떠나고 홀로 남은 공주를 흡사 그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깜찍한 짓을 했군. 수작을 벌이는 재주가 제법이다, 마법사.”
“그럴 땐 수작이 아니라 기지라고 칭찬해야지.”
“건방하게 아직도 혓바닥이 살아 있군. 하지만 상관없다. 정 안 되면 직접 죽여도 된다고 했으니.”
달아난 자들이 어디로 갈지는 뻔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괴한들은 이제 더 서둘러서 공주를 해치워야 한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원래부터 그럴 예정이기도 했으니 문제라고 할 것까지도 없다. 그러나 공주는 전혀 겁먹지 않은 얼굴로 조잘거리고 있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여기 있는 인원이 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