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86)

102

“그래서 말인데 아까처럼 위로 올라가면 어떻습니까.” 

“비 와서 아까처럼 나 안고 올라가려면 엄청 힘들 텐데?”

“아닌데. 가벼워서 하나도 안 힘들던데.”

“나 가벼운 편은 아닌데.”

“여러 번 안아 봐서 가벼운지 아닌지 다 알아.”

“……!”

잇, 갑자기 그런 발언 뭐야! 태리가 얼굴이 빨개져서 올려다보자 클로드가 눈을 내리깔아 마주 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리는 게 보였다.

“그러다가 들키면 제가 황제의 조카라고 대놓고 흘리겠습니다. 잭의 목을 썩둑 자른 사람이 제 고모님이라는 거 아까 사람들이 하는 말 들었죠? 저들이 우릴 잭처럼 쫓아와도 결국은 제가 다 이깁니다.”

그게 무슨 시시한 농담이래. 태리는 듣고 풉 웃었다가, 그제야 클로드가 그답지 않게 농담을 해 가며 자신의 불안감을 누그러뜨려 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유머 감각이라곤 요만큼도 없네.

원래 농담 같은 거 잘 하는 성격도 아니면서.

웃긴 했는데 재미는 없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입은 멋대로 움직여 그와 비슷하게 맞춰갔다. 긴장도 한결 풀어졌다.

“그래요, 나도 더는 도망치는 건 지쳤어요. 춥고 힘들고 난리가 났단 말이에요. 메테오라도 소환해서 싹 날려 버릴까 봐요. 그거 주문이 뭐였더라. 불덩이는 중심으로 뭉쳐진다…….”

“조금 더 작고 건전한 기술은 없습니까.”

“힘 조절을 하지 못하는 걸 언제나 큰 단점으로 지적받아 왔어요.”

단일 주문으로는 최대치의 화력을 끌어낼 수 있는 메테오 소환법. 물론 실제로는 하지도 않았다. 서로 긴장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 중이니까. 태리는 점점 더 좁혀져 오는 수색에 더 깊이 우산속으로, 품속으로 숨으며 말했다.

“기도라도 해 주면 어때요.”

“그러고 싶은데. 내가 신앙심이 턱없이 부족해서. 차라리 때려서 기절시키는 건 가능한데. 잡히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저렇게까지 끈질기면 저건 맞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 같은데.”

“……방금 그건 농담 아니죠?”

“항상 진심이었습니다.”

해 줘? 그렇게 묻는 듯한 눈빛에 태리는 머리를 푸드득 내저으며 그가 튀어 나가지 않도록 양팔로 허리를 꼭 붙들었다.

그러면서도 남몰래 품고 있던 마음속의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 버린 건 전부 다 제 탓이다. 다른 방법이 있음에도 일부러 듀폰에게 ‘무관심의 기운’을 걸어 주어 마법의 흔적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애초에 이곳에 오는 길에도 듀폰을 도와준다고 고의적으로 계속 옥상에서 사소한 마법들을 사용해 왔던 것이다.

클로드에게는 실수라고 둘러댔지만 처음부터 계획했었던 일이다. 이날 이 시간에 자신이 이곳에 있었음을, 공화파의 당수인 듀폰과 접촉했었음을 보여 주는 단서를 아슬아슬하게 긴가민가한 방식으로 흘리는 게 목적이었다.

마법에 대한 면역력이 없을수록 효과는 강력하므로 치안대는 마약 냄새 맡은 군견처럼 귀신같이 그녀의 흔적을 찾아 쫓아오고 있었다.

‘더는 엮이게 해서는 안 돼.’

이 계획으로 인해 클로드가 곤란해지는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 정체가 드러나면 그는 정말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불안감이 옅어진 만큼 그 자리를 미안함이 더 크게 차지했다.

극장을 끼고 걸어가던 태리가 돌연 커다란 포스터가 걸려 있는 벽 앞에서 멈춰 섰다. 그녀가 멈추니 클로드도 영문을 모른 채 덩달아 그 자리에 섰다. 살인마 잭의 빨간 입술을 배경으로 마주 서자, 둘의 존재가 극의 주인공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사람들 속을 뒤지고 있는 치안대는 더욱 근처까지 다다라 있었다. 장난을 치며 여유를 부릴 시간조차 이제는 허용되지 않는다. 태리는 더는 미룰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뭘 말입니까.”

“이러다가 당신이 같이 잡힐까 봐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겠지만 난 신경이 쓰여요. 아주 많이 쓰인다고요. 나랑은 입장이 다르잖아요. 당신은 이곳에서 지위도 있고 신분도 있잖아요.”

이런 사람이 공개적으로 치안대에 잡혀서 망신을 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속사정이 어떻든 그는 대외적으로 제국의 위명을 드높이는 데에 혁혁한 기여를 한 영웅이었다. 명성 있는 가문의 존경받는 성기사이기도 하고.

그의 성격상 그까짓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그것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그의 노력으로 일군 명성들이었다. 태리는 그의 노력이 자신으로 인해 망가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생각한 건데 여기서 찢어져요.”

“……!”

“이만 헤어지자고요. 내가 저기 있는 유리창을 깨트려서 소란을 만들 테니까 그 사이에 먼저 여기를 빠져나가도록 해요.”

무관심의 기운. 그 주술에는 반드시 액받이가 필요하다. 이제껏 그걸 둘이서 나눠 받았지만 태리는 남은 시간을 혼자서 감당할 생각을 했다.

이미 오랜 시간을 버텼으므로 대략 한 턴가량만 걸리지 않으면 된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여차하면 수면 마법을 걸어 회피하는 방법도 있고. 그렇게 되면 더욱 노골적으로 제 정체가 탄로 나겠지만 클로드가 들키는 것보단 그쪽이 훨씬 나았다.

“당장은 한 사람만 도망칠 수 있어요. 내가 남을 테니까 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난 마법사예요. 하늘로 솟든 땅으로 꺼지든 뭐라도 할 수 있다고요. 그러니까 당신이 먼저 빠져나가도록 해요.”

태리는 애당초 자신이 저지른 일이니 얼마든지 스스로 감당하고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클로드는 고집을 꺾지 않으며 한사코 버텼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다 있나. 이런 건 다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나야 운 나빠서 잡혀 봤자 마녀라는 소리 좀 듣고 끝나겠지만 당신은 아니잖아요. 높은 곳에 있을수록 떨어지면 더 날아오르기 힘든 거 몰라요?”

제발 말 좀 들으라며 태리가 답답하게 소리쳤다.

“나한테 항상 잘해 줬다는 거 아는데 지금은 잘해 줘 봤자 당신 손해라고요.”

“이건 잘해 주는 게 아니야. 좋아하는 거지!”

그러나 클로드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말을 퍼부어 태리의 입을 단번에 막아 버렸다.

왜냐하면 그 말은 무적이니까.

좋아한다는 건 어떠한 설득도 통하지 않는 고집이었다. 좋아해서 그러는 거고, 좋아해서 떠나지 못하겠다고 하는 거라면 막을 수 없다.

말없이 입술을 깨무는 태리의 모습에 클로드는 낮은 신음을 터트리며 자책했다. 감정에 치우쳐 스스로가 자제하지 못하고 뱉어 낸 말이었기에 그랬고, 행여나 그것에 그녀가 부담을 느꼈을까 봐도 그랬다. 그래서 지난번 취중 고백 때처럼 마음을 보여 주고 더 사이가 멀어져 버릴까 봐. 그렇게 나를 멀리할까 봐.

그렇게 되면 이젠 죽어도 못 견딜 것 같았다. 그때도 충분히 괴롭고 힘들었다.

“나…… 나는 그러니까…… 그게…… 그런 말로 힘들게 하려는 게 아닙니다. 뭔가를 바라는 건 더더욱 아니고. 절대로, 절대로 당신의 무엇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부담스러우면 그냥 못 들은 걸로 해도 되고 잊어버려도 돼요.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으니까…… 진짜 그래도 괜찮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그런 표정은 하지 마.”

들으면 안 될 말을 들었다는 사람처럼 그렇게 굳어 버리지 마. 받아 주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거리를 둬야 할지를 고민하는 그런 난처한 얼굴 같은 거, 보여 주지 말라고.

“힘들게 안 할게요. 억지로 대답 같은 거 강요하지도 않는다고. 약속할 테니까…….”

머릿속이 반쯤 타서 헛소리를 하는 사람처럼 클로드는 태리의 손목을 잡고 똑같은 말을 쉼 없이 반복하며 매달렸다. 뿌리칠 것을 겁내는 사람처럼 너무 간절하게 잡고 있어서 태리는 손목에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마음이 같이 찌르르 울렸다.

서로가 좋아하기 힘든 위치라는 것을 둘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계약 관계. 동업자를 좋아한다는 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일까. 그런데도 이 순진하고 어리석은 남자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이따금씩 바라볼 때면 늘 자신을 향하고 있던 사람처럼 항상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서 곁에만 서도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나를 정말로 좋아한다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미안해.

그렇게 눈으로 사과하는 그를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태리는 내내 아픈 마음에 잠겨 있던 목소리를 꺼냈다. 그리고 작은 숨을 쉬듯 말해 버렸다.

“좋아한다고 말해 줘서 고마워요.”

그가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했으니까. 그런 말을 들어서 사실은 난 아주 기뻤으니까.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아귀가 그대로 얼어 버렸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침착한 눈길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다.

우산 속을 파헤치는 치안대의 그물망은 지척까지 좁혀졌고, 질서 없이 밀려 나오는 사람들로 인해 거리는 훨씬 더 번잡해지고 있었다. 점점 더 빠르게 물러날 곳이 사라져 간다.

배경처럼 걸려 있는 살인자의 빨간 입술이 붙잡힘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예고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태리는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아직도 얼이 나가 있는 클로드의 깨끗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페인팅이 완전히 씻겨져 내려가 잘생긴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마를 간지럽히던 앞머리는 여전히 흘러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태리는 입 모양만으로 희미하게 웃곤, 발끝을 올려 그의 이마에 손을 대 그것들을 정성스레 넘겨 주었다.

흘러 내려왔던 머리까지 모조리 넘겨지자 가뜩이나 맑고 반듯했던 그의 이목구비가 더 남김없이 바깥으로 드러났다. 이렇게나 굵고 강한 선을 가졌는데 한없이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건 그밖에 없을 것 같았다.

손끝으로 그리듯이 천천히 그 얼굴을 쓰다듬었다. 눈썹과 뺨, 콧날까지도. 손가락이 지나갈 때마다 그가 움찔한다는 걸 알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입술에 닿은 순간 작게 헐떡이는 숨결이 느껴졌다.

그가 열이 펄펄 끓는 입술을 순식간에 그녀의 손끝에 비비듯이 대더니, 곧 괴로워하며 더는 만지지 못하도록 손가락 전체를 밧줄로 묶듯 강하게 움켜잡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