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186)


 

101

“그러니까요. 정확히 나는 그 점을 노리고 있어요. 열 받게 하려고 이런 일을 꾸미는 거거든요.” 

충격을 받은 듀폰이 반박을 하기도 전에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중간에 빼돌려진 그를 찾기 위해 치안대가 다시 근처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주변의 가게나 천막 등을 모조리 들춰 보는 소리마저 들렸다.

“나가야 합니다, 당장.”

어둠 속에 묻혀 있던 클로드가 즉시 나서며 이동을 재촉했다.

여기 가만히 있다가는 셋이 한꺼번에 잡힐 확률이 컸다. 그리고 서로가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세 사람 중 누구 하나 이득일 게 없었다.

태리는 고개를 끄덕이곤 자신의 얇은 허리끈을 풀어 빗물에 젖은 손으로 무언가를 적더니, 그 끈을 듀폰의 주머니 속으로 넣어 주었다.

“‘무관심의 기운’이라는 일시적인 주술을 걸었어요.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라도 주의가 끌리지 않아요. 치안대의 코앞을 지나가더라도 그냥 지나칠 수 있을 거예요. 유효 시간은 글씨가 말라 사라지기 전까지. 그러니 당장 서두르는 게 좋겠죠.”

“어째서 자꾸 도와주시는 겁니까?”

“그쪽의 황제가 화가 나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그걸 보려면 여기서 잡히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가야 되잖아요.”

“마법사라는 건 정말 미친 사람이군요.”

“나가서 왼쪽으로 천천히 걸어요. 그쪽이 시장인 것 같던데 가로질러 가면 추적을 어렵게 만들기 좋겠죠. 그다음부턴 경의 집이 부디 그쪽에서 가깝길 바랄게요.”

시간이 촉박하니 서둘러 떠나라고 미는 행동에 듀폰은 천막을 나가려다가 말고 마지막으로 태리를 돌아보았다.

“이 주술은……”

“악마의 힘이냐는 멍청한 질문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그런 게 아닙니다. 전 단지 왜 공주님 본인에게는 쓰지 않는 것인지 여쭤보려 한 것뿐입니다.”

“아, 그거요.”

태리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누군가에게 가야 했을 시선을 억지로 빼돌렸다면 그걸 대신 받아 낼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쉽게 말하면 액받이 같은 거죠.”

그러면서 잡히지 말고 어서 달아나라고. 우리 사이에 빚이 있다면 그걸로 갚은 거라고도 말했다.

시시한 농담이라도 하듯 눈썹을 으쓱 들어 올린 공주는 어떠한 예고도 없이 치안대가 지천으로 깔린 천막 바깥으로 그를 확 밀어 버렸다.

“헉!”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너무 갑작스럽게 나서게 되었다. 심지어 발까지 헛디뎌서 듀폰은 빗물에 철퍼덕하고 엎어지기까지 했다.

숨어 다녀도 모자랄 판인데 나 여기 있소, 하고 광고하다시피 등장하다니. 망했다. 끝난 거다. 이대로 꼼짝없이 체포될 거라고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대로 시간이 얼마나 흘러도 그의 몸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수십 명의 치안대는 코앞을 지나가면서도 그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애꿎은 곳만을 이 잡듯이 들쑤시고 있었고, 하늘은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를 퍼붓는다.

방금 빠져나온 천막은…… 차마 뒤를 돌아 확인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럴 수가.

듀폰은 무언가에 홀린 듯 끈이 들어 있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까슬까슬한 무명천의 감촉이 꿈이 아님을 일깨우듯 손끝을 스쳤다.

그제야 아, 내가 정말로 마법사라는 신비한 존재를 만났구나, 하는 현실 감각이 뒤늦게 찾아왔다.

삐익―

공기를 찢는 호루라기 소리가 좁은 골목에 울려 퍼진다.

주변을 짓밟듯이 수색하던 묵직한 군화 굽들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찾았다, 저쪽이다! 저쪽으로 달아난다! 일행까지 모두 둘이다! 절대 놓치지 않도록 해라!”

멍하니 길 한복판에 서 있는 듀폰을 투명 인간처럼 세워 둔 채 치안대는 맹렬한 속도로 그를 지나쳐 갔다. 그들이 추적하는 길 끝에는 비를 헤치며 허겁지겁 도망치는 두 남녀가 있었다.

“도대체가 저 공주는…….”

일부러 자신이 가야 할 곳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뛰었다. 그럴 것 같은 게 아니라 틀림없이 그러하다. 저 둘이 대신 시선을 끌어 줌으로써 그의 신변은 더욱 안전해지고 말았다.

도주하는 두 남녀의 모습은 금세 허공의 점만 한 크기로 작아져 이내 시야 밖으로 사라져 갔다.

“빠르기도 참 빠르군.”

보나 마나 이건 빚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갚아야 할 날이 오게 될지 아닐지는 모르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솔직히 없을 거라는 쪽에 더 확신이 섰다.

괜찮겠지. 인적 하나 없어진 한적한 빗길을 그가 외투를 뒤집어쓰고 천천히 걸어갔다.

* * *

여전히 그칠 줄 모르는 폭우 속에서 다리가 무겁게 쳐지며 속도 또한 더뎌졌다.

몇 번이나 유연하게 따돌렸음에도 도로 꼬리가 붙잡히길 몇 번째인지도 모른다.

단순히 치안대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진작에 나가고도 남았을 테지만, 듀폰이 온전히 도망칠 수 있도록 이 예술지구에 치안대의 발목을 붙잡아 놓으려 하다 보니 따돌리는 데에 제약과 한계가 있었다.

뱅뱅 돌고 돌아서 지금 이 회전목마 앞을 지나가게 되는 것만 해도 벌써 세 번째.

뛰듯이 걸어가며 클로드는 버려져 있던 우산 하나를 주워서 펼쳤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재빨리 그 아래에 숨었다.

이미 젖을 때로 홀딱 젖은 몸이라 뒤늦은 우산은 의미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굳이 사용한 것은 잠시라도 가림막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지속적인 비로 인해 클로드의 얼굴에 있던 페인팅이 다 씻겨 내려가 있었다. 까닥하면 위장이 들킬 위기였다. 여기서 잡힌다면 그가 광장의 시위대 속에 있었다는 것이 들통 나고 말 것이다.

교단을 욕하는 자리에 무려 성기사단장이 끼어 있었다고 밝혀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는 말이다.

초조해서 우산 밖을 자꾸만 내다보는 태리의 팔을 클로드가 저지하듯 제게로 바짝 잡아당겼다. 축축하게 젖은 어깨가 가깝게 붙었고 닿은 부위에서 서로의 체온이 유달리 뜨겁게 느껴졌다.

“저쪽으로 걷죠. 시간을 보니 사람들이 곧 쏟아져 나올 것 같습니다.”

근처의 한 소극장 벽에 걸려 있던 포스터를 보고 한 말이었다. 포스터 하단에 적힌 공연 시간은 오후 14시부터 16시. 지금이 벌써 16시의 5분을 넘어가고 있는 시점이었으므로 공연을 다 본 사람들이 대거 나올 타이밍이긴 했다.

고개를 끄덕인 태리는 그의 보폭에 맞춰 극장의 입구를 향해 걸었다. 긴장해서 숨을 들이켤 때마다 덥고 습윤한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가서인지 계속해서 호흡을 짧게 쉬게 되었다.

클로드가 그 모습을 힐끗 내려다보더니 꼭 쌕쌕거리는 낮잠 소리 같다며 목을 울리며 웃었다.

“뭐예요. 뭐가 웃겨!”

“아니, 듣는데 애기 소리 같아서. 한 두세 살쯤?”

“두세 살이 아니라 스물두세 살인데.”

“아닌데. 그냥 두세 살 같던데.”

뭐? 발끈한 태리가 팔꿈치로 클로드의 명치를 툭 때리면서 같이 쓰고 있던 우산이 출렁거렸다. 그 바람에 태리의 어깨가 반쯤 우산 밖으로 빠져나갈 뻔했지만 클로드가 얼른 붙잡아서 안으로 잡아당겼다.

“되도록 이 범위를 벗어나지 마십시오.”

그러더니 잡아당긴 걸로도 모자라서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러 아예 제 가슴 쪽으로 완전히 끌어다가 붙였다. 덕분에 태리는 그의 품에 거의 안기다시피 파묻혀서 걷게 되었다.

“이건 보호.”

그 무슨 기똥찬 변명이냐고 따져 물으려 했지만 그가 쉿 하고 입막음을 시키며 늦췄던 걸음 속도를 다시 빠르게 올렸다.

“뒤에 세 명이 따라옵니다.”

안겨 있는 탓에 볼 수는 없었지만 태리도 대충은 감을 잡았다.

원래 한 무더기로 뭉쳐서 쫓아오던 치안대는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두 사람을 잡기 위해 도중에 찢어져서 여러 개의 팀으로 움직이는 방법을 택했다.

분산된 인원으로 인해 추적의 눈은 수십 개로 늘어났고, 지금처럼 동선이 겹치면 쉽게 발각되고 말았다.

“저 안으로 섞여 들어가야 합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걷죠.”

다행히도 둘은 이미 극장의 입구까지 다다라 있었다. 관람을 마친 관람객들이 문을 열고 나와 계단으로 내려오며 사방에서 우산을 펼쳐 들었다.

다양한 무늬와 색색깔의 우산이 섞이면서 극장 입구는 순식간에 젊은 인파로 붐비게 되었다. 공연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말소리가 어지럽게 퍼져 들려왔다.

“다섯 명을 다 죽인 게 맞는 거죠?”

“그렇소, 일부러 시체를 한곳에 다 버렸잖소.”

“이런 게 실화라니, 너무 끔찍해요!”

“결국에 잭은 잡혀서 교수형을 당했잖소. 지금의 황제께서 분노에 차서 직접 내린 판결로 유명한 일이지.”

“중간에 탐정이 잭을 놓친 부분이 너무 이해가 안 가더라. 좀 억지스럽지 않아?”

“왜, 그래도 연출은 생생하던데. 마지막에 다리에서 뛰어내리던 여배우도 예쁘고.”

“얼굴 말고 내용을 보라고.”

짜임새가 어떻고, 배우의 연기가 어떻고, 결말이 마음에 든다 안 든다 하는 제각기 다른 감상들을 토론하기에 바쁘다.

덕분에 태리는 방금 전 공연이 <교차로 살인 사건>이라는 제목의 추리물이며, 잭이라는 실존했던 연쇄 살인마의 이야기를 각색한 내용이라는 것까지도 모두 알게 되었다.

재미있었나 보네. 조커처럼 찢어진 입술에 가면을 쓴 남성이 그려진 포스터를 그녀가 흥미로운 눈으로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어머, 뭐야!”

“꺅, 깜짝이야!”

“갑자기 이게 뭐하는 짓인가!”

불타는 토론 속으로 불현듯 놀란 비명들이 간간이 섞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치안대원들이 관람객들의 우산 속을 무작위로 들추며 수색을 하는 것 같았다. 양해를 구한다는 말과 짜증 섞인 말소리가 번갈아 움직였다.

점점 가까워져 오고 있다. 태리는 안긴 상태로 클로드의 허리 쪽 옷을 저도 모르게 구김이 갈 정도로 꽉 구겨 잡았다. 거기서 불안감을 읽었는지 클로드가 안심시키듯 그녀의 어깨를 더욱 단단히 감싸 안았다.

“적당히 끈질겨야지. 살인마 잭처럼 쫓아오는군요.”

“주술 때문에 그래요. 마법에 걸린 상태니까.”

“그 주술이 끝나려면 얼마나 남았습니까.”

“글쎄요. 글씨가 마를 때까지니까 정확히는 알 수 없어요. 그래도 이쯤이면 거의 다 말랐을 것 같긴 한데.”

한 시간 가량을 듀폰 대신 희생양이 되어 치안대의 술래잡기로부터 피해 다녔다. 이 정도 뻐겨 주었으면 듀폰도 무사히 몸을 피신했을 것 같으니 그만 이 예술지구를 벗어나도 될 것 같긴 했다.

“문제는 들키지 않고 어떻게 여길 빠져나가냐는 건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