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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하려고?
“신이시여. 일격에 당신의 곁으로 보냅니다.”
태리가 입을 벙긋거려서 물었고 그에 대해 딸려 온 목소리는 신실한 성직자의 듣기 좋은 읊조림이었다.
곧 파앙! 하고 두꺼운 막대기가 공기를 깨트리듯이 휘날리더니, 드문드문 남아 있던 벽 위의 그림자들이 모조리 날아가 하늘의 별이 되듯 사라져 버렸다.
숨을 들이켜며 선 채로 굳어 버린 태리를 돌아본 미리엘이 싱긋거리며 상냥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제 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공주님.”
아뇨, 지금 여기서 당신이 제일 해로워 보이는데요. 방금 뭐였나요, 그 무력은?
스태프를 몽둥이처럼 잡았던 손이 하나는 태리의 어깨에 다른 하나는 클로드의 등에 깃털처럼 사뿐히 내려앉아 둘을 안쪽 방으로 떠밀었다.
얹어 놓기만 했을 뿐 강한 힘이 실린 것도 아니었는데 태리의 두 다리는 그가 시킨 대로 착실하게 걸어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찡긋하고 선명하게 파이는 눈꼬리가 역시나 완벽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 * *
“뭐라고 합니까, 고모님이.”
외딴 공간 속에 마침내 둘만이 남게 되자 클로드는 제일 급한 것부터 살펴 물었다.
약속했던 12시보다도 더 일찍 황궁에 들어와 있었던 그는 암살자처럼 몰래 황제의 응접실에 들이닥칠 사전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그렇게 계획대로 분명히 쑤시고 들어가는 데에는 성공을 했는데, 어처구니가 없게도 그를 맞이한 것은 텅텅 빈 응접실이었다.
황제의 변덕으로 인해 장소가 갑자기 바뀌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바뀐 장소가 어디냐는 질문에 차라리 죽여 달라며 입을 꾹 닫는 시종장을 노려보느라 눈알이 아직까지도 살짝 따끔따끔하고 아팠다.
“어디로 끌려가서 무슨 짓을 당했습니까.”
고모에 대한 신뢰가 모래알보다도 작고 희미해서 어휘의 선택조차 과격하다. 태리는 햇살이 잘 드는 퇴창 앞 소파에 파묻히며 별일 아니라는 듯 편안하게 말했다.
“나쁜 짓 같은 건 전혀 당하지 않았어요.”
“어딜 은근슬쩍 만졌다거나 음흉한 눈빛을 보낸다거나.”
“그냥 만나서 밥 조금 먹고. 그리고…… 오랑제리에 갔었어요.”
“오랑제리, 그 동굴에 말입니까?”
“동굴?”
곧장 어디인지를 알아차린 낌새라 혹시 그곳에 얽힌 일화를 그가 알고 있는 것인가 싶어서 기대감이 늘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뒷말은 영 다른 소리였다.
“황제의 동굴이요. 다들 그렇게 부릅니다. 우울할 때 처박혀 계시는 곳이거든요. 그곳에 들어가 있을 때의 고모님은 기분이 바닥을 기기 때문에 절대 아무도 건드리지 않습니다. 혼자 들어갔다가 스스로 다시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죠.”
“그랬구나…….”
“근데 찝찝하게 하필이면 그곳으로 데려갔단 말입니까?”
“네, 단둘이 있었어요.”
단둘이? 그 말에 클로드의 눈썹이 욕심 많은 후궁처럼 단숨에 치켜 올라가더니 태리의 무릎 앞에 주저앉아선 그녀의 팔을 잡고 좌우로 돌려 가며 몸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정말 나쁜 짓 같은 거, 당하지 않았습니까?”
“뭘 생각하는 거예요.”
“뭐든 간에.”
“나쁜 짓 같은 건 하나도 없었어요. 아, 중간에 약간 폭언은 있었던 같아요. 나한테 낙관주의를 고집하는 멍청이라고 폭언했어요.”
기분이 살짝 나빴던 부분에 살을 붙여서 고자질을 했더니, 클로드는 즉시 성대를 긁으며 ‘본인이나 잘할 것이지!’라고 대신 화를 내 주었다. 덕분에 남아 있던 불쾌감의 찌꺼기마저 깨끗이 다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유익한 만남이었어요. 먹던 밥을 절반이나 남기고 중간에 박차고 나오긴 했는데 꽤 소득이 있었단 말이에요. 일단 나를 왜 보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아요.”
“공주님을 협박하려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우리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을 수도 있겠단 느낌이 들었거든요. 단지 방식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것뿐.”
그럴 리가 있겠냐며 이해하지 못하는 클로드에게 태리가 물었다.
“황제께서 처음 당신을 이자리스로 보낼 때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해요?”
“예, 지키라고 했었죠.”
이게 마지막이란다, 클로드. 너에게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야. 군대를 꾸려 이자리스로 가렴. 가서 그곳을 지켜라. 지켜서 내게로 가져오너라. 알겠니?
당시의 고모는 그것이 황제로서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라고 했었다. 성공하면 더는 네 약점을 가지고 억지로 붙잡아 놓는 일 없이 자유롭게 놓아주겠다고.
대신 이자리스를 지키는 일에 전력으로 투구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질리도록 당부하던 그 음성을 잊지 못한다.
땅이라면 그동안 발밑에 산더미처럼 쌓이도록 가져다주었는데도, 아직까지도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에 클로드는 학을 뗐었다.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조건에 반항하지 못하고 총독의 임명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처음 공주님께서 제안했었던 계약을 제가 거절하지 않았던 겁니다.”
“드래곤을 잡으면 땅의 소유권을 넘긴다고 했었죠.”
“네, 영토를 넘겨받으면 고모님께 넘기고 전 자유를 얻어도 되고, 아니면 제가 들고 있다가 그분의 비위를 거스르며 괴롭힐 수도 있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 코딱지만 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제국의 핵심 병력인 성기사단의 절반 이상이 클로드의 뒤를 따라 빠져나갔다. 대규모의 병력 이동은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지만 황제는 사람들의 반발을 무릅쓰면서까지 그것을 용인해 주었다.
“연유는 알 수 없지만 그곳에 상당한 집착이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아니면 정복자의 야욕일 수도 있고요. 이자리스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지배당하지 않았던 땅이니까요.”
그런 이유로 그 역시도 이자리스의 소유권을 탐냈었다. 그 정도로 고모님을 성가시게 만들 수 있는 도구를 손안에 얻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야 더는 중요치 않아졌지만…….
무슨 상념에 잠겼는지 조용해진 태리에게 클로드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뗐다.
“혹시 계약에 대한 의향이 바뀌셨습니까?”
이자리스의 주인 자리를 넘기겠다는 계약. 그가 아는 공주는 한 입으로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녀가 조국에 들이는 애정은 진실되었으며 또한 매우 깊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그것을 쉽게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으리라고도 여겨지지 않았다.
“없던 일로 해도 됩니다. 솔직히 저는 없던 일로 하고 싶습니다.”
“아니요. 난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러나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태리는 담백하게 부정했다.
“내 결심에는 변함이 없어요. 약속한 그 순간이 오면 당신에게 줄 거예요. 원래 그렇게 되도록 결정되어 있으니까. 그런 건 바꿀 수 없는 거니까. 단지 당신이 그걸 황제께 그대로 가져다가 바치는 구조가 되지는 않기를 바랐었죠. 그런데……”
예전에는 그 일이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 당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태리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어쩌면’에 두었었던 가능성에 대한 의문을 다시 제기했다.
“우리 둘 다 황제의 의중을 잘못 짚었을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당신을 보낼 때 분명히 지키라고 했었다면서요? 지키는 것과 단순히 가지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죠.”
“억지로 구분하자면 그렇지만.”
클로드는 황제의 탐욕스러운 인간성에 대해 겪을 만큼 겪은 사람이었다. 다른 표현이라도 누군가에게는 같은 의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분에게는 그 둘의 차이가 없습니다.”
“있을 수도 있잖아요.”
“있을 리 없습니다.”
“아니요, 난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분명히 있을 것 같아요.”
“공주님.”
“물어보지 않았잖아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정말로 바라는 게 무엇인지 이제까지 한 번도, 누구도, 그 사람한테 제대로 질문한 적 없었잖아요.”
“…….”
“난 그걸 물어보고 싶어요. 그 생각을 들어 봐야겠어요.”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일단 황제가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고 인정하도록 만들어야만 한다.
그녀가 낙관하지 말라고 서슴없이 폭언한 것에는 태리를 어떠한 적수로도 여기지 않는 듯한 태도가 담겨져 있었다.
그저 보호받아야 할 힘없는 공주. 제국의 비호가 없으면 진작에 어떻게 됐을 나라의 가여운 후계자. 의중이나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계획을 세워 나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대.
절대 그렇지 않음을, 그쪽과 생각을 나눌 수 있을 만큼 동등한 라이벌임을 증명하기 위해 태리는 가히 황제의 코털이라도 뽑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자꾸 당신을 첩자로 이용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시간이 없으니까 그냥 물어볼게요.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되지만 거짓말만 하지 말아 줘요. 알겠죠?”
제국과 황제에 대해 그녀가 알고 있는 바는 거의 백지상태에 가까웠기에 일단은 클로드를 통해 급한 정보부터 구하려 했다. 일급 기밀 같은 건 아니고 적당히 필요한 상식 정도로.
그런데 대체 무슨 질문이 나올 것으로 예상을 했는지 클로드는 상심 어린 표정으로 선수 쳐 대답했다.
“폐하의 도장이 어디 있는지 같은 건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을 주면 어떻게든 훔쳐 내 올 테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런 건 필요 없어요. 그러다가 참수형이라도 당하고 싶어서 그래요?!”
뭔 그런 과격한 수법을. 진심일 게 분명한 그에게 태리는 농담 말라며, 절대 상상으로도 시도할 생각 말라고 찰싹 어깨를 때리곤 현재 이곳의 정세에 관한 설명을 부탁했다.
“정세요?”
“권력 구도 같은 거요. 나한테 이런 말 했었잖아요. 황제는 많은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만큼 반대파도 많이 거느리고 있다고. 그 말은 궁정의 모두가 그분을 지지한다는 뜻은 아닌 거잖아요.”
“아아.”
그제야 물음의 의도를 파악한 클로드가 태리의 발아래에 양반다리를 하고 털썩 주저앉으며 끄덕였다. 그 바람에 올려 둔 앞머리가 다시 내려와 이마를 간질였는데 태리가 제 머리에 있던 핀을 빼내어 꽂아 주었다.
난데없이 제 머리에 올라온 나비 핀에 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편했는지 빼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