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95/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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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총독께서 궁정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아, 폐하를 알현하러 오신 건가요?” 

“아니. 내가 그분을 왜 보나, 볼일이 없는데. 백작이야 폐하의 발닦개를 자처하니 이 주변에서 노닥거리는 게 일상이겠다만. 생각이 있는 일반 사람들은 일 없이 그분을 귀찮게 하지 않는다.”

“발닦개라뇨! 저는 어디까지나 폐하를 극진히 보필하는 겁니다!”

“그게 그 말이지. 폐하의 총애 좀 받아 보겠다고 입이 닳도록 혓바닥을 놀려 대는 걸 그럼 발닦개 취급 말고 무슨 취급을 해야 하나. 뭐, 딸랑이?”

“총독!”

“정신이 드니까 이제야 그 건방진 소공작 소리가 쏙 들어갔군.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아까처럼 깐족대면 그땐 백작의 목을 뽑아 버릴 줄 알아.”

매운맛을 조절도 없이 쏴 갈기자 열기가 번진 백작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일찍부터 분위기를 읽은 사람들은 누구도 나서서 그를 돕거나 변호해 주지 않았다.

상대는 하늘같이 높은 황제에게도 겁 없이 머리를 들이밀며 자기 할 말을 다 하고 산다는 이 나라 최고의 성기사였다.

능력은 출중, 성격은 까탈. 뛰어난 용모를 지녔지만 그것을 전쟁터에서 피를 흩뿌리는 데에 소비했고 훈장을 산더미로 받아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공적을 쌓아 올린 인물이었다.

그런 인간이 적대감을 사방으로 분출하며 윽박지르면서 겁주는데 머저리가 아니고서야 나설 리가.

자세히 알고 보면 사실 굉장히 좋은 사람이라는 소문도 돌긴 했지만, 그건 자세히 봐야 알 수 있는 거고. 보통은 자세히 볼 수 있을 만큼 그와 친해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분위기가 한없이 험상궂은 쪽으로 흘러갈 즈음이었다. 상황을 반전시키듯 가벼운 구두 소리가 그의 주의를 끌기 시작했다.

내부 지리가 서투른지 시종의 뒤를 따라 조심조심 걷는 듯한 여자의 구두 소리였고, 그것이 홀의 커다란 돔 천장을 스치듯이 울린다.

새가 부리 끝으로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는 것 같은 아주 작고 사소한 자극이었는데, 클로드가 만들어 냈던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그 순간에 즉시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인상 쓰고 겁주던 놈이 흐물흐물해지니, 사람들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너도 나도 뱉었다. 그러면서도 이제 막 홀로 들어서는 낯선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특별히 화려한 옷을 걸치거나 큰 동작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도 아니고 드높은 직함이나 신분 같은 걸 밝힌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유 없이 눈길이 쏠리게 되었다.

그녀가 한 걸음씩 가까워져 올 때마다 사람들은 까닭 없이 가슴이 술렁거리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아니, 정확히는 설렘이라고 해야 하나.

귀 옆에 나비 핀을 꽂은 채 짙은 금발 머리를 차분하게 내린 공주는 걸음걸음마다 꽃처럼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나, 나를 보고 웃어 주는 건가? 얼빠진 귀족들이 되도않는 착각에 휩싸여 얼이 나갈 즈음, 그녀가 정답은 이쪽이라는 듯 마침내 한 사람의 앞에서 멈춰 섰다.

좀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을 겁먹이는 데에 전력을 불태웠던 그 까탈스러운 기사의 앞이었다.

“간밤. 간밤에……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공주님.”

다른 이들처럼 마찬가지로 단단히 고장이 난 것 같은 그는 심지어 어리숙한 태도로 말까지 더듬고 있었다.

태리는 함박웃음을 여전히 지우지 못한 채로 크게 두 번을 끄덕거렸다.

실은 멀리서 클로드의 뒷모습을 봤을 때부터 이미 웃음이 났었다.

정말 왔네. 불렀더니 진짜로 왔어. 그런 생각이 들어서. 더불어 오는 내내 조마조마했던 마음도 그를 발견한 순간 안정감을 되찾았다.

시종의 손에서 그의 손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며 태리는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재빨리 속삭였다.

“오늘 굉장히 근사해요.”

“……!”

듣자마자 얕은 기침을 하며 쿨럭거리는 게 변함없이 그다운 반응이다.

칭찬했더니 쑥스러운가 보네. 하지만 진짠걸. 태리는 그의 멀끔한 모습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었다.

이자리스에서는 언제나 편한 차림이었으니까. 오늘처럼 각이 반듯하게 잡힌 궁중 예복과 이마까지 드러내 올린 머리가 이렇게까지 잘 어울리는 남자인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이마가 너무 예뻐. 여기 있는 남자 여자를 다 합쳐서 제일 예쁜 이마다.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은데. 귀 끝이 붉어져 시선을 회피하는 그를 향해 그녀가 뒤꿈치를 높이 치켜들었을 때였다.

“그러니까 이분이 마법사, 아, 아니, 공주님이셨군요.”

“세상에나, 이렇게나 아름다울 줄이야…….”

“어떻게 마법사가 이런 모습을……”

태리는 이미 오고 가는 길에 심심치 않게 제국의 귀족들을 드문드문 마주쳤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그들과의 큰 마찰은 없었지만 태도는 대부분 비슷한 편이었다.

마법사에 대해 어떤 외모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 건지 처음에는 자신의 정체를 알고 크게 놀란 뒤, 곧 눈치를 보거나 적대적으로 돌아서거나 두려워하며 회피한다.

눈치를 보는 쪽은 불편한데 황제 때문에 내색은 못 하고 억지로 태연한 척 연기하는 것이고, 적대적인 사람들은 대놓고 자신을 꺼리는 자들이다. 이도 저도 아닌 쪽은 그녀를 살아 움직이는 이단인 듯, 공포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 무리는 보아하니 후자가 월등하게 압도적인 듯했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연기도 어설프다.

태리는 얕은 끄덕임이나 적당히 친절한 눈빛 등으로 호의적이지 않은 그들을 상대했고, 정신이 돌아온 클로드가 그마저도 필요하지 않도록 곧 중간에서 차단해 버렸다.

“공주님은 약속이 있으시다.”

그러니까 짜증 나게 하지 말고, 성가시게 하지 말고, 귀찮게 들러붙지 말고 썩 꺼지라는 몹시 고압적인 말투.

“하지만, 단장님.”

사람들이 움찔한 찰나에 얼른 그녀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했던 그의 앞으로 시종이 황급히 뛰어들었다.

“어디로 가시는지요? 약속이 있으시다는 말은 사전에 듣지를 못하여…….”

“나.”

“예?”

“나랑 약속 있다고. 왜, 그럼 안 되나.”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실례지만 어디로 가시는지. 공주님의 안전을 위해 정확한 행선지를 알려 주시면 만일의 사태에서도 대비할 수 있을 겁니다.”

“폐하께서 그런 식으로 감시하라고 하던가.”

“그런 게 아니오라…….”

“내가 같이 가니까 위험할 일 없어.”

감시와 보호를 애매하게 에둘러서 원하는 걸 얻어 가는 그딴 뻔한 속임수. 말했지만 황제의 전매특허다.

좋게 말한다고 다 좋은 의미가 되는 줄 아나. 클로드는 황제께서 공주가 어디로 걌냐고 묻는다면 신경 끄라고 대답해 주면 된다고 말해 시종을 기함하게 만들고는, 더 꼬리가 잡히기 전에 얼른 태리의 손목을 잡고 홀의 입구로 쭉쭉 걸어갔다.

당연하다는 듯이 공주를 데려가는 그의 태도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황제의 가장 큰 칼이자, 정복 전쟁의 지휘관이었던 남자가 제국에게 맞서기 위해 찾아온 공주의 손을 저리 붙잡고 떠나 버리다니.

말도 안 돼……. 누군가의 경악 어린 탄식을 귀 뒤로 들으며 태리는 클로드의 보폭에 맞추기 위해 허겁지겁 다리를 움직였다.

그는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상당한 무게의 입구를 한 손으로 쉽게 밀고 나오자, 눈 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이렇게 나와 버려도 돼요?”

“더 있다가는 제가 못 견딜 것 같아서.”

속 보이는 인간들의 호들갑에 함께 어울려 주는 일은 사양하고 싶다. 거기에 태리를 발견하자마자 희번덕거리는 더러운 눈깔들이라니. 그대로 놔뒀으면 필시 그녀에게 치근덕거렸을 게 분명했다.

“눈들이 다 더러웠습니다.”

“나한테요?”

“그럼 다른 사람이 또 있습니까.”

“아닐걸요. 거기서 제일 예쁜 사람은 당신이었어요.”

관심이 있었다면 그쪽이었을 텐데. 하지만 클로드는 무슨 이상한 말을 하냐는 듯 예쁜 건 너, 그녀 하나뿐이었다고 아주 당당하게 큰 소리로 말했다.

“다른 놈들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거는.”

“나갈 때까지도 모두 다 공주님만 봤다고요.”

“그거야―”

네가 날 납치하다시피 들고 튀었으니까 말이지. 정략결혼을 앞두고 야반도주하는 남녀를 보는 것처럼 다들 경악해서 눈을 못 떼던데.

하지만 그의 행동이 나쁘지 않았던 터라 태리는 굳이 말하지 않고 흐지부지 끝맺었다.

“그런데 우리 지금 어디로 가요? 갈 곳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잖아요.”

약속이 있다는 건 사실이었지만 정확히 어디를 가기로 한 건 아니었다. 가려고 하면 어디든 갈 수 있긴 했지만 황제의 손아귀에서 자유롭기는 힘들다.

지금도 사방에서 느껴지는 시선들이 무수히 많았다. 수백 명이 망원경에 눈을 대고 이쪽을 몰래 쳐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랄까. 방금 지나온 수풀 뒤로도 사람일 것 같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클로드도 알고 있는지 만만한 돌멩이가 보이면 그쪽으로 가차 없이 차 버린다. 그러면서도 길을 헤매지 않고 정확히 그녀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었다.

“제가 아는 곳이 있습니다. 보안만큼은 남부럽지 않은 곳이죠. 무소불위의 힘일지라도 그곳은 침범하지 못합니다.”

“멀어요?”

“아니요, 아주 가깝습니다.”

그러더니 문득 걸음을 그치곤 그녀를 돌아보았다.

“조금 더 빨리 걸을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도 충분히 빨랐는데 얼마나 더 빨라야 하는 건지. 하지만 태리는 안 된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럼요. 난 달릴 수도 있어요.”

각오를 보여 주듯 속치마가 밟히지 않도록 드레스 자락을 찔끔 들어 보이는 동작에 클로드의 눈동자가 즐겁게 반으로 접힌다.

강한 바람이 불었고 올려 두었던 그의 앞머리가 흐트러져 내려왔다. 그것을 한 손으로 대충 쓸어 올려 처리하는 그의 얼굴에는 어느덧 시원스러운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이 모습만큼이나 한여름의 햇살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게 또 있을까.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 태리가 눈을 깜빡였을 무렵 그가 잡고 있던 손을 고쳐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클로드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던 여름 바람이 이번에는 그녀의 뺨을 쌩쌩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 방향으로 얼마만큼 빠르게 달렸는지도 모른다. 이끄는 대로 힘껏 달려 나가며 태리는 발목까지 올려 잡은 드레스를 꼭 쥐었다.

정말 한낮의 야반도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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