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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리스에 방문하게 된 첫 제국인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하고 귀한 일인 줄 그때의 자신이 알았더라면 그렇게까지 어깨를 움츠리고 경계하며 걷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몰랐기에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왕국에 적응하게 되기까지 이오리아는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보살펴 주는 남자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못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남자의 이름은 실리안 소네티. 동화 속 세상 같은 이 도시를 다스리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미혼의 왕.
정말 아름다운 남자였다. 일평생 그보다 더 아름다움에 가까운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했을 정도로. 어떠한 아름다움을 눈앞에 가져온다고 해도 그 앞에서는 무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러면서도 티끌만 한 결점조차 묻지 않은 사람이었다. 평생을 정쟁과 권력 다툼의 아귀 판에서 기어 다녔던 자신과는 단 하나의 접점조차 없는 남자였다.
“금발에, 아름답고 총명하고. 원하는 건 뭐든 해낼 수 있는 뛰어난 왕이었소. 내게는 은인이지만 그런 걸 보면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틀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소.”
“광란의 마법사 말인가요?”
“확실히 그가 가진 건 미쳤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재능이었으니까. 궁금한 게 생기면 어떻게든 해답을 찾아냈고 새로운 뭔가를 끊임없이 만들어서 보여 주기도 했소. 그런데도 아주아주 따스하고 선량하며…… 허영과 탐욕으로만 가득 찼던 황궁에서 살아온 나를 처음으로 울린 사람이기도 하오.”
감정이 북받치는지 황제는 하던 말을 잇지 못하고 쓴 커피를 머금었다.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이오리아는 지금도 때때로 외로운 밤이 되면 그와 함께했었던 짧디짧은 과거를 떠올리곤 했다.
원망과 복수심으로 괴로워하는 머리를 토닥여 주던 온기 어린 손과, 비가 내려 꼼짝없이 갇혀 버렸을 때는 그 비가 그친 후에 어떻게 지낼지를 상상해 보자며 차분하게 책을 읽어 주던 목소리. 또 흙 한 번 만져 본 적 없는 황녀의 손에 삽을 쥐여 주고 오렌지 나무에 대해 열띠게 설명하던 그 눈부신 미소도.
그것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녀가 나고 자란 황실에는 그와 같은 순수함이 없었다. 선의도 없었고 진심도 없었다. 자기 욕심을 위해 태어난 지 백일 된 아기를 단두대에 끌어낸 다음날 전당 대회에서 인권을 외치는 그런 시대였다.
그것을 세계의 전부로 알고 살았던 여자에게 그 남자는 생애 처음 위안과 위로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자신을 울린 사람이었다.
커피의 쓴맛이 습기 어린 눈동자를 잠재워 주고 나서야 황제는 다시 입을 뗐다.
“난 그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언젠가 아주 대단한 일을 이뤄 낼 거라고 믿었소. 결과적으론 큰 실수를 저지르는 것으로 끝났지만 그래도 그를 떠올릴 때면 가슴이 아리오. 대체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까를 고민하면서.”
태리는 고요히 경청하며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절대 악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실리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니.
달의 뒷면에서 앞면으로 뒤바뀌었던 그녀의 눈동자는 어느덧 깨끗한 어둠으로까지 도달해 있었다. 울고 싶은데 그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의 눈동자 같기도 했다.
“그런데 왜 다시 발로란으로 돌아오신 거죠? 그러지 않아도 됐을 것 같은데.”
계속 머물렀다면 실리안과 황제는 어떠한 관계가 됐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만약의 가정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거니까.
슬픈 눈으로 찻잔의 손잡이를 어루만지던 황제가 입을 올려 빙그레 웃었다.
“자신이 외로운 사람인지를 확인하고 싶다면 사랑을 받아 보면 되는 것 아니겠소. 이자리스에서 난 애정에 대해 배웠고 동시에 내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이었는지도 알게 되었소. 그랬기에 떠난 거요. 나의 초라함을 깨닫게 되어서.”
그것이 어떤 마음인지, 어떤 감정이었는지 느껴 본 바가 있었기에 태리는 그 고백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 역시 이곳에서 사랑을 받고 나서야 스스로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대충 눌러앉아 버리는 방법도 있긴 했을 거요. 그런데 난 그런 성격이 못 되었소. 적당히 손해 보고 적당히 부끄러워하면서 살 수가 없는 여자였소.”
“그럼 그게 마지막이었던 건가요?”
“만난 것은.”
떠날 때 영영 작별을 하겠다고 작심하고 발로란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러 명의 형제들과 어린 조카들. 그리고 자신을 조롱하고 반항하던 신하들을 모두 제압해 정점에 올라섰을 때에는 돌아가기에 너무 늦은 뒤였다.
당당한 모습으로 재회하려 했을 때에는 그가 이 세상에 없었다. 남은 건 그에 대한 기억과 시들어 버린 씨앗 몇 개뿐이었다.
“그렇게 될 줄 몰랐소. 헤어지는 날이 있으면 언젠가 재회할 날도 있을 거라고 안일하게 굴었소. 내 잘못이오. 때로는 늦은 것도 잘못이 되지.”
그래서 이 성대한 오랑제리를 지었다. 그를 잃고 대신 무엇을 얻었느냐고 질문받을 날이 오면 적어도 그 순간에 내놓을 만한 것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양손에 얻게 된 부과 권력을 아낌없이 쏟아 이 유리성을 완성시키고, 차디찬 제국의 땅에 작은 싹을 틔워 울창하게 가꾸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런 뒤에는 매일 같이 찾아와 물을 주며 생각했다.
제 손으로 저버린 상실에 대하여.
이것으로 보상이 되는지에 대하여.
“…….”
태리는 대답 없이 손안에 쥐고 있었던 식기를 모두 접시에 내려놓곤 얼마간 복잡해진 생각을 정리했다. 사연이 이렇게 깊게 얽혀 있을 줄은 몰랐다.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고민하던 그녀는 한참 뒤에야 다시 말문을 열었다.
“폐하를 이해할 수가 없네요. 좋아했던 남자의 흔적을 그렇게 짓밟나요?”
차갑게 제련된 한마디였다. 덩달아 식사를 멈췄던 황제는 당연히 멈칫했고 다시 유연하게 찻잔을 흔들었다.
“아까부터 느꼈는데 상당히 직설적이오, 공주.”
“마음이 급해서요. 지나간 추억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이 더 급한 사람도 세상에는 많거든요.”
“물론 그렇겠지. 이해하오.”
“폐하께선 이자리스에 군대를 파견한 장본인 아니신가요. 그것이 정복군이 아닌 보호군이었다는 순진한 변명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사단의 점거는 불법입니다. 폐하께서 보내신 세력으로 인해 마법사들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어요.”
발로란에 발로란의 자존심이 있듯, 이자리스에도 이자리스의 자존심이 있다.
그곳은 수많은 나라들이 건국과 멸망을 반복했던 천여 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주인이 바뀌지 않았던 땅이다. 그랬기에 침략에 대한 정신적인 충격이 더욱 컸다.
“엉덩이를 붙이고 버텨서 흡수 통일이라도 기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영토를 한 줌도 내어 주지 않을 겁니다.”
이 말을 하려고 왔음을 밝히자 황제의 표정은 말라붙은 껍질처럼 딱딱하게 변했다. 당연히 이게 맞다. 과거에 어떠한 사연이 있었건 지금은 서로가 완전히 대척점에 서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하던 눈가가 잔파도 치듯 흔들리더니 결국엔 우스꽝스러움으로 변했다.
“아직 순수하구려. 용기는 지나치게 넘치고. 행운을 빈다고 말해 주고 싶지만 상황에 맞지 않는 걸 고집하다간 더 큰 후회를 하게 될 거요.”
뭐? 마치 철부지를 타이르는 듯한 발언에 태리는 울컥했다.
“우리 땅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물론 의미만으로는 더없이 옳겠지. 하지만 스스로 알아서 하지 못했잖소. 내가 손을 내밀지 않았더라면 이자리스는 진작에 사라지고 없었을 것이란 것. 모르지 않잖소?”
“그건.”
“낙관주의를 경계하도록 하시오. 그것은 인간이 가지는 최고의 우매함이오. 낭떠러지 앞에 서면 없던 날개가 생겨날 거라고 착각하게 되거든, 바로 공주처럼.”
“신을 섬기는 분치고는 무척이나 현실성을 강조하시는군요.”
“신? 난 한 번도 신에게 기적을 바란 적이 없소. 자신의 삶은 자기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거요. 매일 같이 반복했던 기도는 언제나 나 자신을 위한 염원이었소. 오늘도 내일도 지금과 같이 변함없기를.”
두 다리를 언제나 현실에 굳건히 붙이고 살았다는 황제는 찌르는 듯한 어조로 태리를 공격했다. 분노할 대상을 잘못 짚은 게 아니냐면서. 똑바로 보고 판단하라면서.
“나는 그곳에 내가 가진 말 중 가장 강하고 훌륭했던 나의 조카를 보냈소. 제일 좋은 패를 이자리스에 준 거요. 왜일까, 보잘 것 없는 땅덩어리가 탐나서? 그러기엔 공주, 난 이미 차고 넘칠 정도의 영토를 가졌소. 거기에 이자리스를 보탠다 해서 내 위상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요.”
“…….”
“잘 생각하시오. 난 가지려는 게 아니요. 지키려는 거지. 이미 이자리스에는 많은 것들이 사라졌소. 되찾을 수 없다면 지켜 내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소.”
태리는 그 지점에서 되받아치지 못하고 침묵했다. 황제가 완강한 주장으로 밀어붙였을 때 그녀는 머릿속으로 부강한 제국에 비해 자신은 이자리스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고 있었다.
그녀가 가진 것은 그곳을 구하고 싶다는 동기. 그것도 아주 강력한 동기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황제의 눈 속에 자신 못지않은 동기가 보여서 당황한 것이다.
그건 마치 정말로 그곳을 소중히 여겨서 놓지 못하고 있는 구슬픈 사람의 얼굴이었으니까.
‘이거, 서로 갖고 있는 정보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대체 뭐지?’
대화 속에서 미묘하게 느껴지는 어긋남 때문에 태리가 계속해서 말을 못 하고 있자, 그것을 원망으로 해석한 황제가 자조적으로 이야기했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사는 것은 아니니, 내 방식을 존중해 달란 염치없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오. 어차피 복수란 건 어딜 가나 환영받지 못 하는 일이니.”
복수?
“왕과 나라를 동시에 잃은 당신들이 누굴 탓해야 할까……. 탓해야 할 대상이 없다면, 그래서 갈 곳을 잃은 원망들이 어디론가 가야 한다면 내게 퍼부어도 좋다는 말이오.”
점점 더 이해의 난이도가 올라가고 있다. 태리는 무례를 무릅쓰고 손을 뻗어 황제의 말을 급작스럽게 멈춰 세웠다.
“제가 알지 못하는 뭔가 다른 것을 알고 계신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