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2화 (92/186)

92

“그리 지루한 말을 내 앞에서 끝까지 꾹꾹 눌러서 하는 사람은 그 아이밖에 없소. 모두들 내가 귀찮아하는 걸 알아서 간략히 하거나 생략하거든.” 

“아…… 그런 줄은 몰랐어요.”

“괜찮소, 지금은 오히려 기쁘니까. 나도 그만한 격식을 갖춰야 할 텐데. 어디 보자…… 세상의 모든 신비로움은 이라리스로부터. 이렇게 하는 게 맞던가?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희미해서.”

미안하지만 동작까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면서 황제는 찌푸린 웃음으로 양해를 구했지만, 태리는 외려 그녀의 이야기에 놀라고 말았다.

오래전의 일이다. 그렇다는 건 그녀가 이전에 이자리스 왕가의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대대로 이자리스의 왕족들은 타국과의 교류가 무척이나 적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녀가 만났을 왕족의 일원이 누구일지도 설핏 짐작이 갔다.

황제가 실리안과 친분이 있었다는 얘기는 사실이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약소하지만 선물을 준비해 왔어요.”

태리는 침착하게 그녀가 빼어 내 준 의자에 앉은 뒤, 맞은편에 자리한 황제에게 예티의 털로 짠 목도리를 선물했다.

보온성이 높을 뿐 아니라, 냉기에 강한 저항력을 가진 특별한 능력치가 덧대어진 물품이었다.

“제국은 조금 춥다고 들어서요. 혹시 마도구가 내키지 않으신다면 거절하셔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을 거예요.”

“전혀.”

신의 힘을 기원으로 건국되었기에 발로란은 마법을 폐단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자리스를 좋지 않게 보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그곳의 우두머리인 황제는 태리의 선물을 몹시 기쁘게 받아들였다.

“나는 따로 준비한 것이 없는데. 대신 내가 가장 아끼는 곳을 보여 준 걸로 값을 치릅시다. 내가 이곳에 누군가를 데려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니.”

가장 좋아하는 곳. 여기를 말하는 건가? 크고 아름답다는 것은 알겠지만 그래 봤자 온실일 뿐인데.

태리는 머리 위를 덮은 나무의 푸른 이파리를 보다가 고개를 내렸다.

“온실 가꾸기에 취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온실이라기보단 오랑제리라 부르는 것이 더 맞소.”

“오랑제리요?”

“오렌지 나무가 있는 성이랄까.”

온실. 자신에겐 익숙하나 이 세계에선 익숙하지 않은 형태의 기능적인 공간. 태리는 자신이 초대받은 이 공간을 그 정도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것을 온실이 아닌 오랑제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오렌지 나무의 성. 그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의미인지 갸우뚱했을 때 황제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이 궁은 중앙대륙에서 유일하게 궁전 안에서 오렌지 나무를 기르고 있는 곳이오. 최초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제는 유일한 곳이 되었지.”

“멋지네요.”

“멋지고말고요. 사계절 내내 따뜻한 날씨가 지속되는 남쪽이 아니라면 오렌지 나무는 기르기가 아주 힘든 과수요.”

본인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탓일까. 달의 뒷면 같았던 황제의 눈빛은 화사한 미소와 어우러져 어느새 달의 앞면처럼 밝아졌다.

“공주도 잘 알지 않던가. 이자리스에는 이보다 더 일찍부터 오렌지 나무가 있었잖소.”

그, 그래요? 난 모르는데. 오렌지 나무는커녕 귤나무도 제주도나 가야 겨우 볼 수 있는 곳에서 살다 왔는데.

당황스러움이 기습처럼 찾아들었지만 다행히도 황제는 자기 말을 하느라 넘어갔다.

“나처럼 이만한 온실을 공들여 지은 것도 아니었소. 그저 성의 앞뜰에, 장미원 한 편에……. 온도도, 습도도, 토양도 맞추기 어려웠을 텐데. 그 모든 걸 해낸 건 마법이었겠지. 마법사란 참 대단한 존재요.”

“그랬, 나요.”

“적어도 내겐 그렇소. 매일을 상상 속에 살면서도 오늘은 또 무슨 즐거운 일을 해 볼까 끝없이 골몰하는. 그러니 나중엔 무엇을 해도 놀랍지 않고 이해하게 되더군. 그래, 너는 마법사였지, 하고 말이오.”

다시 한번 은연중에 드러나는 특정 인물과의 친분에 태리는 황제가 간단히 흘리는 단어 하나하나에조차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신경이 곤두서서 막 입 안으로 잘라 넣은 고기의 식감이 질기게 느껴졌다.

“실은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오렌지 나무란 걸 보게 되게 된 것도 이자리스에서였소. 그 전에는 그림책으로만 보고, 어쩌다가 가끔 남국의 상인들이 가져오는 열매로만 맛보았지. 그렇게까지 큰 나무인지도 몰랐소.”

냉철하고 정이 없으며 간교하기가 메두사가 따로 없다고 불리는 제국의 황제다. 그런데 대관절 지금 눈앞에서 나긋나긋한 어조로 봄볕 같은 말씨를 구사하고 있는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지.

준비된 가면 같은 건가? 태리는 까닭 없이 느껴지는 불안함을 계속해서 안고 가는 대신 보일락 말락 하는 황제의 의중을 제 쪽에서 먼저 잘라서 드러내 보였다.

“그걸 보여 준 사람이 제 아버지인가요?”

“맞소. 오렌지 빛의 눈을 가진 님프처럼 몹시 아름다운 왕이었지. 지금의 그대처럼.”

그런데 회심의 일격치곤 수긍이 너무 쉽고 빠르다.

접시에서 움직이던 태리의 손이 약한 충격에 멈춰 섰다.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홀로 상념을 거니는 듯한 말투를 놓지 않고 있었다.

“대체 어떤 마법을 부리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가 내게 씨앗을 나눠 줬소. 그러면서 말했지. 적절히 환경만 맞춰 주면 마법 같은 건 할 줄 몰라도 된다고. 나 혼자서도 잘 돌볼 수 있을 거라고.”

“…….”

“후훗, 발로란이 얼마나 서늘한 곳인지를 전혀 모르는 남자였소.”

“그게 이곳에 있는 나무들인가요?”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머리 위를 가리키자, 황제가 어쩜 그런 귀여운 상상을 하냐는 듯 어깨를 흔들며 아하하, 하고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그럴 리가. 난 그리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오. 그가 준 씨앗은 진작에 썩었소. 나무를 가꾸며 살 수 있는 인생이 되기까지 너무 긴 시간이 걸려서 어쩔 수 없었소.”

“그런데 버리지는 않았군요.”

“......!”

“썩었지만 버리진 않으신 거예요. 그렇죠?”

빈틈을 찾아 한 번 박고, 연달아 두 번을 박자 비로소 황제의 눈가에 처음으로 어긋남이 포착되었다. 능선을 넘어가는 구름처럼 술술 나오던 말도 그쳤다.

실리안에 대한 어떤 추억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이만한 공간으로까지 만들어 곁에 두고 있는 사람. 태리는 이전에도 그녀와 비슷한 인물을 한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도서관을 만든 드래곤. 그 어린 소년이 꼭 이와 닮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와 비슷한 감정이 그녀에게도 있지 않을까 하는 짐작이 조심스럽게 들었다.

“좋아했던 사람인가요?”

봐주지 않고 또 한 번 깊숙한 부분까지 짚고 들어가는 질문에 황제가 재밌다는 듯이 눈으로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지체 없는 태리의 유창함 때문이었을까. 미소만 남아 있던 얼굴 위에 변화가 오는 것 같더니 으음, 하고 목을 굵게 울리는 침음이 흘렀다.

“좋아……했으나. 그 감정을 현실로 이루어 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련을 겪어야 하는 법이오, 공주.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것을 견뎌야 하고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하기도 하지. 그러니 좋아했다, 그리 쉽게 인정하고 떠들고 다닐 수는 없는 법 아니겠소.”

그렇군. 부정하지 않는다. 비밀로 묻어 둔 과거형이지만 어쨌든 받아들였다. 진중해진 눈매에 사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보였다.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물론.”

“전…… 황제께서 말하는 그분에 대해 사실 잘 몰라요. 기억이 없거든요. 아예 모른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그야 공주는 너무 어렸으니까. 하지만 그건 불행 중 다행 아니오? 기억이 없으니, 없는 만큼 덜 슬퍼해도 죄가 되진 않겠지.”

따뜻한 건지 차가운 건지 알 수 없는 위로를 건넨 황제는 ‘왜, 그래도 궁금한가?’ 하고 되묻더니 느릿하게 미간을 더듬으며 태리가 알지 못하는 실리안에 대한 이야기를 소곤거려 주었다.

“불행은 아주 많고 행복은 몇 없던 시절에 난 이자리스에 머물렀던 적이 있소. 공주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지. 그러니까 공주처럼 내가 공주였던 시절에 그를 만난 거요.”

선황제가 유언 없이 숨을 거두고 발로란에는 그 자식들 사이에 잔인한 황위 다툼이 벌어졌었다.

형제를 제거할 힘이 없다면 도망쳐야 했었던 시절이다. 잡히면 죽을 테니 과거의 이오리아도 그렇게 살기 위해 국경을 넘었었다.

그 간당간당한 경계 너머가 악마의 하수인들이 산다고 소문난 이자리스라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가족의 손에 죽는 것보단 악마의 손에 죽었다고 하면 차라리 덜 비극적일 것 같아서 넘어간 길이었다.

옷은 찢어져 엉망인 채로. 팔다리는 마구 긁혀 성한 곳이 없고 머리는 산발에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그렇게 미친 여자처럼 며칠을 숲속에서 헤맸다.

― 소, 손대지 마! 나는 대제국 발로란의 황녀 이오리아다!

― 이거라도 먹을래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