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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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장의 잠옷 차림에 속이 훤히 비치고 움푹 파인 쇄골과 동그란 어깨의 절반이 그대로 드러났다. 

태리가 화들짝 놀라며 얼른 상체를 추슬러 감췄지만, 클로드는 그 뒤로도 꽤 오랫동안 말이 끊긴 상태 그대로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부끄러움이 해일처럼 밀려온 태리는 얼굴을 푹 숙여 감췄다.

저쪽에서 별일 아닌 것처럼 넘어가 주면 그녀도 덩달아서 그런 척 연기할 수 있을 텐데, 눈앞의 남자는 혼자 시간이 정지된 사람처럼 고장이 나서 멈춰 있었다. 그러니 태연한 척하고 싶어도 의식이 될 수밖에.

창피해, 창피하고 부끄러워 죽겠어. 쪼그린 채로 무릎에 얼굴을 숨기고 한참을 뭉그적거렸다. 그녀가 다시 빼꼼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발등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감각 때문이었다.

“……?”

차가운 타일 바닥을 디디고 있던 발이 왜 갑자기 따뜻해졌나 싶었더니 커다란 남자의 손바닥이 그것을 감싸듯이 덮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 못지않게 긴 시간 정신적으로 방황을 했던 클로드는 여전히 귀 끝이 붉은 채로, 잠옷 밑으로 빠져나와 있는 그녀의 맨발을 제 손으로 데우고 있었다.

“맨발이었는지 몰라서…….”

말 속에 담긴 미안함은 커다란 손에 의해 달궈지고 있는 발만큼이나 따뜻했다. 발바닥으로 밟고 있는 타일의 찬기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따끈따끈하고 아늑하다.

제 손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발이 믿기지 않는 건지 클로드가 덮고만 있던 손을 살짝 오므려 발 전체를 거의 감싸 잡듯이 쥐었다.

단숨에 양 발이 화끈화끈해진 태리가 안절부절못하며 변명했다.

“안시가 막 달려들어서 슬리퍼를 챙길 여유가 없었잖아요. 급하게 나오다가 벗겨졌나 봐요.”

그러니 이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소리였는데. 클로드는 붙여 둔 손을 떼지 못하고 더 꽉 손안에 쥐었다.

발바닥의 연한 살을 은근하게 파고들어 오는 굵은 손가락의 감촉 때문에 태리는 몰아치는 듯한 싱숭생숭한 마음을 도저히 다룰 수가 없다.

두 사람이 그러고 있는 사이 건물 아래 수풀을 샅샅이 뒤지던 근위병들의 군화 소리가 어느새 멀리로 사그라져 갔다.

대신 창문을 콩콩 두드리는 안시의 뾰족한 눈초리가 따라붙어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던 두 사람은 후다닥 정신을 차리듯 떨어졌다.

태리가 먼저 클로드를 일으켜 세우며 테라스 바깥쪽으로 그의 등을 떠밀었다.

“아무도 없을 때 얼른 빠져나가요. 몰래 온 거라 들키면 곤란한 거죠?”

“아니요, 들켜도 괜찮은데.”

발각되든 말든, 그래서 황제가 노하든 말든 클로드는 진심으로 관심도 없고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

엇나가는 기질이야 이미 어린 시절부터 충분히 보여 줬고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쫓아내거나 자른다고 하면 그거야말로 그로선 대환영인 처사가 될 테니.

그래, 제발 이 기회에 자신을 좀 팽 하고 버려 줬으면 싶었다.

지금 아예 대놓고 걸리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닐지도 모르겠는데. 그러나 이미 한 차례 수색을 끝내고 지나간 병사들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항상 몸조심해야 돼요.”

배짱을 부리는 그에게 태리는 떽 하고 귀여운 주의를 주더니 다시금 그를 돌려보내기 위해 등을 밀었다.

미적대며 가기 싫은 티를 내던 클로드는 그녀가 춥다고 손을 호호 불자 테라스의 높은 난관을 쉽게 넘어 아래로 휙 뛰어내렸다.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추락하다가 다치지는 않았을까 싶어 태리는 재빨리 난간으로 달려가 허리를 걸치고 아래를 살펴본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뒷걸음질로 걸어가며 그녀를 향해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 순간 안시가 문을 열고 ‘공주님, 이제 그만!’ 하고 잡아당기지 않았다면 태리는 아마도 그를 따라 오랫동안 손을 흔들고 있었을 것이다.

빼꼼히 내보였던 공주의 하얀 팔은 펄럭이는 소맷자락 속에서 두어 번 정도 흔들리다가 누군가에 끌어당김에 의해 금세 사라져 버렸다.

천천히 뒤로 걸어가며 그곳을 바라보고 있던 클로드의 다리가 도중에 딱 멈춰 섰다.

추워서 들어갔나 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밀려드는 아쉬움은 감출 길이 없다. 흐릿한 불빛 아래에서 우두커니 서 있던 그가 다시 정면을 바라보고 제대로 걸음을 옮겼다.

“아, 맞다. 그거 못 물어봤는데.”

언제 한번 우리 가족들이랑 식사 안 할래요? 그걸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헤어질 때도 여긴 이자리스보다 훨씬 추운 곳이니까 새벽엔 화로에 불이 꺼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그 말로 마무리했어야 했고.

정신이 팔려서 열심히 준비해 온 말들을 하나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나왔다.

“이런 한심한.”

천 너머로 희미하게 드러나는 실루엣 앞에서 한순간에 바보가 되었달까.

그런 주제에 그 가느다란 몸 선이 눈 안에 박혀서 걷다가 멈추고, 걷다가 멈추게 되었다.

미치겠네.

심호흡을 하며 은근한 열기가 어려 있는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정신 나간 상상 좀 하지 마. 죽고 싶어? 스스로를 향해 험악하게 겁박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뻐근한 증상은 가시지 않았다.

* * *

“어서 오십시오, 공주님. 폐하께서 응접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오찬을 준비하라 하셔서 그곳으로 이동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앞장서도 될는지요.”

“그래요.”

황제가 기다리고 있는 다른 어딘가로 정중한 안내를 받아 걸어가며 태리는 황궁의 이모저모를 꼼꼼하게 감상했다.

오는 내내 거쳐 온 방과 복도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모두 훌륭했다. 제국의 권세를 드러내면서도 위엄이 돋보이는 장식들의 향연이다.

게다가 어디를 가도 마주치게 되는 고용인들은 몸에 밴 깔끔함이 흡사 군대와도 같아서, 군더더기 없는 정렬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각하도록 만든다.

일부러 이런 것들을 시간을 주고 보고 느끼도록 의도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황궁의 모든 것들이 실과 바늘처럼 맞물려 있었다.

그러나 태리는 딱히 눈앞의 광경들에 위축이 되진 않았다. 인상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황제 앞에서 주눅이 들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녀가 걱정되는 것은 이로부터 느껴지는 흐름이었다.

직접 제국에 들어와 보고 나니 느껴지는 분명한 실체.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

확실히 이번 세대에 대륙의 주인으로서 낙점받은 국가는 발로란이라는 것.

대세나 흐름이라는 것은 일단 한번 어떠한 경향성으로 굳어지고 나면 역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더욱 승부를 내기가 까다로웠다.

‘내가 잘할 수 있으려나.’

게임 밖에서 보았던 황제는 그저 클로드를 이자리스로 보내 사건의 발단을 마련해 준 데에 그치는 평면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게임 속의 그녀는 자신의 형제를 죽이고 권력을 잡은 냉철한 군주이자, 눈독 들였던 나라의 후계자를 제집에 불러들여 함께 식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속이 복잡한 사람이다.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가 새로 맞춘 드레스의 소매를 힘주어 꽉 그러잡았을 때였다. 규칙적인 걸음걸이로 길을 인도하던 시종이 야외로 통하는 회랑 앞에서 멈춰 섰다.

“이 회랑을 따라 꺾으면 바로 정원입니다. 그 정원의 온실에서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혼자 가야 한다는 건가요?”

평범한 어조의 특별하지 않은 질문이었는데 시종은 태리의 눈길을 받자 겁을 먹은 것처럼 어깨를 훅 움츠렸다.

하, 그녀가 답답한 한숨을 쉬었다.

“겁을 주려는 게 아니라 그냥 묻는 질문이었어요.”

“죄, 죄송합니다! 공주님 이외의 다른 사람은 출입을 금하셨습니다!”

다른 사람 없이 오직 공주만 들어오라. 그건 다시 말하면 아무도 없이 단둘이 독대를 하자는 것 같은데.

“사전에 이런 얘기는 없었던 것 같은데.”

“자, 장소가 변경된 건 저희에게도 지금 막 전달된 명령이라…….”

“음.”

태리가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못마땅해하자 시종은 된서리를 맞은 것처럼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무슨 끔찍한 마법이라도 당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건 뭐, 대체 마법사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어떻게 잘못 박혀 있는 건지. 태리가 알았으니 물러가 보라는 손짓을 하자 시종이 잽싸게 예의를 차리곤 들어왔던 길로 후다닥 달아나 버렸다.

“일대일 미팅이라…….”

자신을 데리고 시험이라도 해 보는 걸까. 호랑이 굴에 혼자 들어올 수 있나 없나 테스트?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잠시 이 만남의 손익을 따져 보던 태리는 이내 파도와도 같은 걸음걸이로 정원을 향해 척척 나아갔다.

그리고 곧 병렬로 가지런히 정리된 화단 가운데에서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아름다운 유리온실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서 작은 탄성을 흘렸다.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단순할 거라고 생각했던 온실은 대성당의 돔처럼 장식적인 지붕을 머리에 얹고, 키가 큰 침엽수를 모두 품을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층고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유리로 지어진 작은 성 같은 모양새였다.

여기로 들어가는 게 맞는 건가? 입구로 보이는 듯한 근처에서 몇 분을 서성거렸더니, 안에서 누군가가 먼저 문을 열고 마중을 나왔다.

“어서 오시오, 공주. 입구는 이곳이오.”

“……!”

풍성하고 윤기 있는 긴 흑발 때문이었을까. 친히 문을 열고 나와 반겨 주는 여성에 대한 첫인상은 매혹적인 검은 독수리였다.

자신을 지그시 응시하는 짙은 회색빛의 눈동자에서 태리는 무심코 달을 떠올려 냈다. 공허하면서도 어두운 달의 뒷면.

“안으로 들어오면 따뜻할 텐데.”

“아.”

황제의 기품 있는 예복 소매가 안쪽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태리는 살짝 얼이 나갔었던 정신을 황급히 제자리로 되돌렸다.

빠른 동작으로 온실로 들어간 그녀는 연습해 온 대로 드레스 끝을 살며시 잡고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발로란의 바래지 않는 거룩한 빛, 고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손수 문을 열어 준 것도 모자라 태리를 위해 앉을 의자까지 빼 주고 있던 황제는 흐트러짐 없는 공주의 격식에 작게 놀라며 고마워했다.

“그런 재미없는 인사말까지 익혀 왔을 줄은 몰랐는데. 공주의 배려심에 고마움을 표하오. 한데 그건 클로드에게 배운 건가?”

으익, 어떻게 알았지. 태리가 뜨끔한 속내를 감췄지만 황제는 코를 울리며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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