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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궁의 내실은 놀라울 정도로 눈부시고 넓고 화려했다. 가구와 집기는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마감을 자랑하고 엉덩이에 깔고 앉은 침대의 이불은 실크처럼 부드러워서 손가락으로 쓸면 미끈미끈할 정도였다.
거기에 이 모든 것들이 마법의 사용 없이 오로지 사람의 손과 기술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생경하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도 이제 마법사가 다 됐나 봐. 이런 게 신기하다니까?’
잠옷 차림으로 갈아입은 태리는 약간 쌀쌀한 날씨에 카디건을 걸치고 벽난로 근처에 앉아서 손을 쬐었다.
시녀장을 따라 밖으로 나갔었던 안시가 금세 다시 총총거리며 문을 열고 돌아왔다.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
“왔어? 뭐라고 해?”
“별것 아닙니다. 식사는 몇 시에 내어 드리는지, 사람은 어떻게 부르는지 같은 걸 알려 주더군요. 필요한 게 있으면 욕실이나 침대에 달린 설렁줄을 당겨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화가 났어?”
“그냥요. 태도가 불쾌합니다. 차라리 무시를 한다면 덜 빈정 상하겠습니다. 여기 인간들은 저를 무슨 가까이 오면 터질 폭탄인 것마냥 멀찍이 떨어져서 상대하더군요. 눈도 안 마주치고 목소리도 떨면서요.”
“아아. 안시가 무서웠나 보네.”
“네, 기분 나쁜 지점이 바로 그겁니다. 전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요.”
“하지만 우린 마법사니까.”
“이건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이나 다름없어요. 공주님께도 그런 태도라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거기에다가 헷갈리게 한꺼번에 너무 여러 가지를 이야기했다고 또 툴툴거리더니, 정리하다 만 짐 가방을 다시 천천히 풀어 가며 안시는 태리에게 가장 중요한 말을 전했다.
“참. 그리고 공주님께서 결정하셔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황제가 내일 오찬을 함께 하자고 권유해 왔는데 참석하실 건지 여쭙고 의사를 알려 달라더군요.”
“음.”
“가실 건가요?”
“말이 권유지 사실 선택 사항이 없는 거 아닐까?”
“흥, 알 게 뭐여요. 내키지 않으시면 안 가는 거지요. 공주님의 마음이 제일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쌓인 해묵은 감정도 해소하고 이만 서로 잘 지내보자는 것이 이곳에서의 공식적인 볼일이지만 사실은 태리도, 황제도 그것보다는 사적인 일에 더 목적을 두었다.
직접 만나서 해결 보아야 할 담판 거리가 수십 가지였으니.
“아니야, 만날게. 함께 식사하고 싶다고 전해 줘.”
태리의 승낙이 염려되면서도 어쩔 수 없음을 알았는지 안시가 머리를 끄덕인다.
자신이 다녀올 테니 그만 일찍 잠자리에 드시라는 의미로 그녀가 창가로 다가가 두꺼운 암막 커튼의 가장자리를 끌어 잡았을 때였다.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공주님, 어서 옷장 안으로 들어가 계세요!”
순식간에 머리에서 긴 비녀를 뽑아낸 그녀가 창문을 등으로 가로막곤 날카로운 마력을 확 뿜어냈다.
태리는 놀라서 그 말대로 황급히 옷장 속으로 숨어들어 가려다가 창문 너머로 왔다 갔다 하는 실루엣을 발견하곤 도중에 멈춰 섰다.
“잠깐만, 안시.”
“자객입니다! 어서 몸을 피하세요! 제가 정리할 테니, 어서요!”
“아니, 저건 자객이 아니야. 내 생각에 저건……”
“그림자 속박!”
……클로드일 것 같은데.
만류하듯 손을 내저었지만 안시의 지팡이는 이미 창문에 비치는 인물의 그림자를 지목해 꽁꽁 묶었다.
덜컹!
당황한 상대가 벗어나려 하다가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림자가 묶이면 그 범위를 벗어나서는 몸이 움직이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가까이 올 순 있지만 멀리 도망가지는 못한다.
“네 이놈! 정체를 당장……!”
“안시, 그만 그만. 클로드야, 클로드라고.”
“네에?”
자정을 넘긴 시간에 공주님 방 창문에 들러붙은 자객이 내가 아는 그놈이라니. 안시는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기가 막혀 얼이 나갔고, 태리는 그 사이에 속박을 풀어 준 뒤 창문을 밀어젖혔다.
예상대로 당황한 표정의 클로드가 테라스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조용히 두드리려고 했는데…….”
태리는 손가락을 세워 쉿 하고 입막음을 시킨 뒤 얼른 튀어나와 맨발로 테라스의 차가운 타일 바닥을 밟았다. 그러곤 ‘저놈이, 저놈이!’ 하면서 입을 벌리고 선 안시를 막기 위해 열고 나왔던 창문을 얼른 뒤에서 닫아 버렸다.
휴우, 안도를 숨을 돌리자 클로드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왜 왔느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먼저 변명 같은 해명을 이야기했다.
“늦은 줄 아는데 불이 켜져 있어서. 무사히 잘 들어갔는지 꼭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고집을 부리던 아까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근심이 담긴 한숨과 안도감이 섞인 숨소리가 연하게 섞여 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구나, 하는.
또다시 이상하게 두근거리는 맥박을 감추려 태리는 괜히 카디건의 앞섶을 여미며 자신을 꽁꽁 방어했다. 열이 오른 따뜻한 입김이 밤공기에 뭉게뭉게 피어올라 대신 마음을 전달했다.
“잘 들어왔어요. 당신 말대로 늦게 도착해서 여러 사람에게 괴롭힘당하지도 않았고 조용히 도착했어요.”
“별다른 일은?”
없었는데. 태리는 머리를 좌우로 내저으려다가 방금 전의 약속을 떠올리곤 입을 벙긋했다.
“……아. 당신이 없는 사이에 일이 한 가지 생기긴 했네요. 내일 황제와 오찬을 함께 하기로 했어요.”
“통보였습니까?”
“그럴 리가요. 의향을 물어본 거죠. 난 가겠다고 대답했고.”
괜한 도전을 받아들였다고 화를 내려나 싶었는데 의외로 클로드의 반응은 얌전했다. 그가 살며시 미간을 찡그리더니 오히려 예상 밖의 지점에서 발끈했다.
“오찬이라니. 제일 날씨가 좋을 때 공주님을 자기 혼자 독점하겠다는 소리 아닙니까? 인간이 염치도 없이.”
“그 인간이 제국의 황제라는 사실을 명심해요.”
“자기 혼자 공주님을 붙들고 있겠다는데 내가 지금…….”
“미워하지 말란 소리는 안 해요. 그런데 이렇게 큰 소리로 욕하지만 마요. 누가 들을까 봐 무섭다고요.”
아무리 황제의 피붙이라지만 이러다가 모욕죄 비슷한 걸로 처벌이라도 받게 될까 두렵다. 태리의 거듭된 당부에 클로드는 머릿속에 가득 찬 불만을 억지로 눌러 냈다.
양어깨를 감싸 쥐는 그의 동작에서 심란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고모님이 지껄이는 말을 일일이 다 들어 주고 있을 필욘 없습니다. 공주님은 그분과 동등하게 무례해도 되는 사이입니다.”
“알고만 있을게요.”
“그리고.”
“……?”
“원한다면 지금 돌아가도 돼요.”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시작해야 할 의무 같은 건 없습니다. 상대를 해 줘야 할지 말지의 자유만 있는 겁니다. 져 주고 들어가야 할 이유도 없고.”
움츠러들지 마, 너는 네 의지대로 하면 돼. 그 말은 황제와 식사를 함께 할 건지 말 건지는 공주님의 마음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던 안시의 툴툴거림과도 무척이나 비슷했다.
둘 다 이렇게나 황제가 못마땅하고 이렇게나 나를 감싸고돌아서 어찌할 건지. 이러다가 응석받이가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태리는 카디건을 여미고 있던 한 손을 풀어 클로드의 팔뚝에 올리고 토닥토닥 두드렸다.
보니까 여기 오기 전에 어떤 화가 나는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혹은 누굴 만났든.
미세하게 구겨진 미간에서 평소와는 다른 반항심과 저항심이 느껴졌다. 먹이를 주는 팔이라 해도 비위에 거슬리면 덥석 물 것 같은 늑대처럼.
하지만 토닥이는 손길에 그는 온순해진다. 제게만 길들여진 성격 나쁜 짐승을 쓰다듬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절대 황제로부터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이 말을 하려고 왔겠지.
내가 자신의 고모 앞에 끌려가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울게 되거나 속상해서 상처 입을까 봐.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가도 된다는 말을 해 주려고 왔겠지. 원한다면 그렇게 해 주려고.
하지만 태리는 그로부터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그녀야말로 황제에게 할 말이 아주 많았으니까. 따져야 할 얘기가 트럭째로 쌓여 있어서라도 절대 이대로 순순히 돌아가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황제가 두렵지 않은 건 아니고, 사실은 무섭기도 하지만 열받는 감정이 공포심을 이겼다.
팔뚝을 두드리던 동작을 멈춘 그녀가 클로드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오찬 약속은 12시예요. 그때라도 좋으면―”
“갈게요.”
“…….”
“가도 된다면.”
사실 조금 겁이 나는데 와 줄래? 차마 소리 내지 못하고 눈으로 전한 부탁에 클로드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 말이 꼭 ‘내가 널 지켜 줄게. 너만 좋다면.’ 그렇게 들려서. 태리는 흐트러지는 표정을 감추듯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서 처음 고백을 받았던 그때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몰랐었다. 받아들일 수도 밀어낼 수도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만약 지금 그가 한 번 더 제게 좋아한다고 말해 준다면 이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아무리 애써도 활짝 벌어지는 마음을 태리는 다시금 카디건을 꼭 여며서 감춰 냈다.
“오지 말라고 했어도 갈 궁리를 했을 텐데 오라고 했으니까 꼭 갈 겁니다. 지금 당장 여기서 데리고 나가 달라고 해도 그렇게 할 거고.”
하여간 진짜 성실하다니까. 태리가 피시시 새어 나오는 웃음과 함께 조그맣게 속삭였다.
“일단 좀 있어 보다가 영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 바로 말할게요. 그리고…… 앗, 앉아요!”
“왜 갑자기……”
“쉿!”
작은 목소리에 홀려서 태리에게 가깝게 다가갔던 클로드는 별안간 제 팔을 잡고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에 이끌려 동시에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말없이 테라스 아래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지?
살며시 철창 아래를 눈여겨보니, 근위병들이 램프를 밝게 치켜들고 주변을 정찰하듯이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때 아닌 수색과 정찰이라니. 누구의 지시로 인한 것이며, 누구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저러는 것인지 알 만하다.
간접적인 경고와 압박. 그의 고모가 잘 써먹는 수법이었다. 나이를 먹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더니 정말 심할 정도로 여전하다.
그가 태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말했다.
“공주님 때문에 저러는 게 아닙니다. 아마도 저를 찾는…… 것 같은데…….”
그러나 낮과 밤이 다르듯 앉고 난 전과 후의 시야 역시 달라졌다.
상황 파악을 하고 다시 태리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그가 보게 된 광경은 무척이나 대수여서, 말끝이 흔들리고 머릿속이 새빨갛게 물들었을 정도다.
다급히 그를 끌어 내리느라 두 손으로 잡고 있던 카디건을 모두 놓아 버린 태리의 가슴팍이 밤공기에 훤히 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