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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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네가 그 공주와 잘 지내 준 덕분에 큰불로 번지진 않았다고 생각하곤 있단다.”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 총명한 눈빛이 지그시 응시하는 게 느껴진다. 클로드는 급격하게 마음속의 무언가가 불편해졌다. 어깃장이 놓아지는 것처럼.

그리고 좋지 않은 예감은 적중했다.

“공주는 어떠니? 듣기론 대재앙이라고 하던데.”

대재앙? 클로드가 고개를 확 치켜들었다.

“누가 그런 소릴 합니까.”

“오거스 백작의 말솜씨지.”

그 빌어먹을 발닦개 개자식이.

“아니요. 그분은 세상에서 가장 공주다운 사람입니다.”

“낭만적인 이야기구나.”

“또한 제가 이제까지 보아 온 왕족 중에 가장 왕족답습니다. 지혜롭고 용감합니다.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세 치 혀만 놀리는 간신배의 목은 제가 배어 드릴 수 있는데요.”

백작의 모가지를 수거해 오고 싶다는 의미로 클로드가 음산하게 목소리를 깔자 황제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오해가 있는 모양이야. 아무래도 차관보는 네가 마법사들에게 관대하게 구는 모습이 싫었던 모양이지.”

하지만 본인은 이해한다는 듯 황제는 우아하게 입가를 폈다.

“넌 마음이 여린 아이니까 누구에라도 독하게 굴지 못한다는 걸 안다. 알기에 질책하지 않았던 거고. 하지만 클로드, 그곳에서 너무 긴 시간이 소요되어선 안 돼. 알겠니?”

은근한 압박이 서린 당부에 클로드는 고요히 어금니를 맞물었다. 이 늦은 시간에 굳이 자신을 부른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 같았다.

단속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도 했는데…… 그건 조금 더 두고 볼 테니 섣부르게 꺼내 네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마.”

“기분은 여기 오기 전부터 이미 상했습니다.”

“그럼 풀도록 하렴. 나 역시 함부로 대하기 위해 공주를 초대한 게 아니니.”

“그럼 왜 별궁으로 보내신 겁니까. 내빈이면 폐하의 곁에 자리를 마련해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다들 반대했단다. 마법사같이 무시무시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존재를 어떻게 내가 기거하는 궁에 두냐 하던데?”

“뭐라고요?”

목을 잘라서 쳐야 할 놈이 한둘이 아니다. 아무리 마법을 기피하는 성향을 가졌다 해도 공주는 일국의 후계자고, 제국에서 초대한 손님이었다.

격분한 클로드가 그에 대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자 황제는 이번에도 쓴 미소로 응답했다.

“저런, 공주와 정이 든 모양인데 자기 세력 하나 없는 곳에서 힘없고 연약한 왕녀가 어찌하겠니. 외롭고 힘들어도 혼자 견뎌 내야지.”

이 이상의 비호는 없을 것임을 간접적으로 듣고 나자, 클로드는 거기서 더 실랑이를 하는 대신 그만 의자를 밀치고 일어섰다.

“갑니다.”

“얘야.”

“주무십시오.”

“그런 태도는 도움이 안 돼.”

“그냥 필요해서 하는 겁니다.”

“그래도 내 앞에선 그렇게 멋대로 일어나선 안 된다는 걸 알 만한 나이는 아니니?”

“예, 알 만한 나이입니다. 벌을 주시려면 맘대로 하십시오. 따로 반성할 예정은 없지만.”

할 수 있는 최고의 무례를 당당하게 던진 클로드는 더 대화하는 것조차도 싫다는 듯이 그대로 걸어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에 성난 감정이 한껏 실려 있어서 황제가 어깨를 깜짝하고 움찔했다.

“세상에나.”

“아이고.”

그리고 거기에 덩달아 움찔한 사람은 이제껏 내내 방 한구석의 소파에 조용히 앉아 있던 공작, 클로드의 아버지였다.

“피, 피, 피곤해서 저럴 겁니다, 폐하.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제가, 제가 나가서 잘 얘기해 보겠습니다.”

“오라버니. 그 집 막내는 여전히 반항아스럽군요.”

방긋 꺾인 눈웃음으로 농담을 던져 오지만, 공작은 차마 자신의 누이를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몇 번이나 연거푸 클로드를 대신해 사죄의 말을 입에 올린 뒤 아들을 붙잡으러 후다닥 뛰어나갔다.

“흠, 여유가 없어 보이는구나, 클로드.”

시계가 자정을 넘어가 어느새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이오리아는 조금의 피로감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되레 생생해 보였다.

방금 막 새롭게 발견한 무언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그나마 있던 잠기운마저 싹 달아났다.

“여유는 없는데 눈빛은 살아 있고…….”

그녀의 뛰어난 조카는 늘 삶이 지루한 것처럼 권태로운 눈빛을 가진 아이였다. 하기 싫은 걸 평생 억지로 하면서 살아가려니 그랬나. 하지만 지금은 야수의 심장처럼 팔딱팔딱 뛰고 있다.

“전에 없이 진지하고.”

안경을 벗으며 황제가 빙그레 웃었다.

* * *

키가 훤칠한 막내아들의 걸음걸이가 얼마나 빠른지 공작은 체면이고 체통이고 모두 내던진 채 숨을 헐떡거리며 황궁 복도를 헐레벌떡 달렸다.

“클로드! 클로드! 아들! 우리 막둥아!”

이름으로 부를 때는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무시하던 아들은 그가 ‘막둥아!’라는 필살기에 가까운 호칭으로 외치자 제자리에서 경직되어 멈춰 섰다.

“밖에서는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요. 진짜……!”

공작의 눈에는 아직도 마냥 어린아이 같은데 아들은 본인을 그렇게 취급하는 것을 극도로 질색했다.

“이게 몇 달 만에 보는 거냐, 응? 어디 상한 곳은 없나 보자. 얼굴부터―”

“아, 좀 이러지 마십시오. 없어요, 없다니까!”

황제에겐 잘 타일러서 얘기해 보겠다더니 정작 아들을 붙잡은 공작은 그의 볼을 양손으로 붙잡곤 어디 상한 곳은 없는지 들여다보기에 바빴다.

아, 젠장. 클로드는 아버지의 손을 재차 뿌리쳐 내며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고 노력했다. 뿌리치는 게 안 될 때면 그냥 매달고 걷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자신이 오늘 도착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비단 아버지뿐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건강히 잘 지내신 것 같습니다. 늘 그렇듯이.”

“그럼! 널 보지 못하는 것 빼곤 아무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형은…… 없죠?”

“아, 미리엘은―”

적어도 형은 이 자리에 없다. 그나마 형이라도 없어서 참 다행이다. 그런 생각으로 클로드가 한결 마음을 놓으려던 순간이었다.

“클로드!”

불빛을 뚫고 치렁치렁한 예복을 흩날리는 남자가 코너를 돌아 나타나더니 별똥별처럼 그의 가슴팍 안으로 단숨에 확 뛰어들었다.

“억……!”

“내 동생! 우리 막내! 드디어 돌아왔구나! 킁킁, 이게 무슨 냄새야? 애기 냄새인가?”

“미쳤나.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형이 벽난로 앞에서 책 읽어 줬을 때 나던 그 냄새인가?”

“그냥 땀이다, 땀!”

자리를 지키고 선 시종들과 병사들이 힐끗거리며 소란스러운 세 부자를 쳐다보았다. 아하, 소문난 동생 바보 성하님이네, 하고 아는 체하는 말소리도 섞여 있었다.

아, 진짜!

창피함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클로드는 들러붙는 형을 떨쳐 내려 애쓰며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가족들이 사람들 앞에서 이럴 때마다 기사로서 살아온 강철 같은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부탁인데 제발 이러지 좀 마. 나 벌써 스물여섯 살이야. 형…….”

“그래, 내 동생은 아직도 그것밖에 안 됐어. 너무 어리다고. 그런데 맨날 혼자서 먼 타지에서 고생만 하고.”

동생보다 딱 머리통 하나 크기만큼 작은 형은 말끝마다 이미 글썽거림이 방울방울 매달려 있었다.

“하아. 바빠 죽겠는데.”

내가 더 키도 크고 힘도 센데. 빌어먹을 나이가 어려서. 그것도 열 살이나 어려서.

손수 기저귀를 갈아 가며 자신을 업어서 키웠다고 자랑하는 형 앞에서 다 큰 성인 남자임을 강조해 봤자다. 클로드는 자신이 이 집안의 막둥이라는 사실이 이리도 비참할 수가 없었다. 형은 지금도 동생이 귀여워 죽으려고 했으니까.

“이제 집에 가는 거야?”

“아니. 난 들를 곳이 있어.”

“모처럼 오붓하게 우리 셋이서 함께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는 정말 기쁠 거다.”

“아니요, 전 볼일이―”

“아아, 오늘은 심야 예배가 있어서 안 되는데 어떡하지. 그냥 몰래 빠져나갈까?”

“아니, 난 지금 안 간다고! 갈 데 있다고!”

내가 몇 번을 말 해! 사람 말을 어디로 들어 먹는 건지. 클로드가 버럭 성을 냈지만 형과 아버지는 전혀 상처를 받은 듯한 표정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소중한 막둥이와의 재회에 마음이 흐물흐물해져 있었다.

“하, 뭘 자꾸 웃어요. 사람이 화를 내는데.”

“다 커서 저렇게 화도 낼 줄 알고.”

“기뻐서 그러지.”

아으. 클로드가 앓듯이 이마를 짚으며 두 사람을 모두 제게서 밀어 냈다. 무시하고 제 갈 길로 떠나려고 하는데 미리엘이 폭탄과도 같은 질문을 떨어트렸다.

“그런데 클로드, 너의 공주님은 어디에 계시니? 네가 편지로 하도 부탁을 해서. 내가 그분을 위한 드레스와 장신구를 잔뜩 마련…… 으브븝!”

“형, 제블 즈응흐 해…….”

“공주? 드레스? 편지?”

아버지가 형제 사이에 오고 간 짧은 대화로부터 맥락을 유추하기 전에 클로드는 황급히 미리엘의 입을 틀어막곤 눈으로 협박을 한 뒤, 도망치듯 자리에서 돌아섰다.

“집에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갑니다.”

“막둥아!”

“……그렇게 부르시면 앞으로는 절대 알은척 안 합니다.”

“막―”

“집에도 안 들어갈 겁니다. 영원히.”

“크, 클로드야, 어딜 가려는 거냐. 혹시 별궁에 가려는 건 아니겠지?”

부리나케 정신이 든 사람처럼 공작이 클로드를 붙잡았다.

“거긴 가면 안 된다. 가면 폐하께서 싫어하실 거다. 널 주시하고 계신 게 틀림없어.”

“그래도 가야 됩니다.”

주시야 어차피 지금 이 순간에도 당하고 있을 텐데. 이제 와서 그런 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리고 또…….

“제가 같이 와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그걸 믿고 여기까지 온 사람입니다. 가야 됩니다.”

잘 들어갔는지 확인도 해 보지 않고 어떻게 혼자 낯선 곳에 두나.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단호하게 가족들의 만류를 끊어 내고 클로드는 서둘러 복도를 뛰어갔다.

먼 곳의 점으로 작게 묻혀 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잠시 후 서로를 바라본 공작과 미리엘은 뭔가에 감동받은 듯 비슷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녀석.”

“벌써 다 컸네요.”

“혼자 좋아하고 있는…… 그런 건가? 이그, 미리엘. 눈물 좀 닦아라.”

“조금 고인 것뿐인데요, 아버지.”

고였다기엔 너무나도 글썽글썽했지만 미리엘이 가볍게 제 눈 밑을 톡톡 두드리자 옅은 빛 무리가 일면서 그 주위가 순식간에 뽀송뽀송해졌다.

신성력을 이용한 고위 성직자의 힘이었다.

“그럼 이제 우린 어떡해야 할까요?”

건조해진 눈가에 붓으로 그린 듯한 실금 같은 눈웃음이 매달렸다. 그 웃음이 장식적인 황제의 집무실 문 언저리에 머물렀다가 더 생긋하고 접힌다.

“그러게 말이다. 어찌해야 할지.”

공작이 곁에서 시름에 잠긴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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