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86)

88

황제의 친조카, 성검을 하사받은 고위 성기사, 제국 제일검, 발로란에 수많은 업적과 승리를 가져다준 무패의 전설이자 수천 기의 기마 군단이 뒤따르는 신성 기사단의 사령관. 

어느 한 군데 과장되거나 부풀려서 쌓아 올린 허튼 명성들이 아니다.

신분으로도, 지위로도, 실력으로도 그는 발로란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기사였다. 황실 근위대장이나 국경수비대의 장군들조차도 감히 견줄 수 없는 수준에 서 있다.

그런데도 재미있는 점은 이 남자가 그런 것들을 뽐내고 다니는 성격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렇게나 강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평화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니.

그런 이유로 그는 황궁 안에서 그 지고하신 황제 폐하와 가장 많이, 또 가장 살벌하게 부딪히는 인물이었다.

“언제 주무시나.”

“예, 예?!”

“폐하께선 대체 언제 주무시는 거냐고 말했다.”

불만과 피로가 꽉 박힌 말투에 시종장은 딴생각을 하다가 벌에 쏘인 것처럼 화들짝 놀라 상체를 곧추세웠다. 아름답고 강한 성기사의 눈썹이 짜증으로 은근하게 구겨져 있었다.

“나이가 들면 취침 시간이 일러진다는데 폐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소리인가 보지.”

“아시다시피 과로가 일상이신 분이라…….”

“아무리 그래도 이 시간에 잠은 안 자고 멀리서 온 사람을 오라 가라 멋대로 부르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명령이라고 생각하나.”

“헉! 어, 어, 어찌 감히 폐하께 그런 불손한 언동을 하십니까!”

“난 아직 내 아버지에게도 왔다고 인사드리지 못했어.”

“데본셔 공작께서도 지금 폐하와 함께 계십니다. 그럼 이곳으로 오시는 게 맞지 않습니까.”

“그거 나 하나 불러들이겠다고 내 가족까지 인질로 잡았단 소리 아니야.”

“아닙니다!”

“아니긴.”

제 가족까지 붙잡혀 있단 소리에 지금껏 나름 잔잔하게 흔들렸던 어깨의 망토가 과격하게 들썩이더니 클로드의 걸음이 완전히 제어를 잃고 거칠게 전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조금도 기사스럽다거나 귀공자답지 않았다.

집무실 앞에서 입장을 허가받은 그는 성가신 예법을 대충 해치워 버린 다음, 신경질적으로 무장을 훌훌 던져서 벗곤 방 안으로 밀고 들어가 버렸다.

그가 버려둔 무기들을 시종장이 허겁지겁 주워서 챙겨 든 사이 쾅! 하는 문소리가 울렸다.

“어서 오려무나. 오랜만이구나, 조카야.”

“…….”

“일어나렴. 그리 바닥에 무릎을 대고 있을 필요 없어. 넌 그런 허례허식 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 않잖니.”

“……발로란의.”

“어머?”

“바래지 않는 거룩한 빛, 고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를 대하는 최고의 격식이 담긴 인사법. 그것의 마지막 한 글자까지 꾸역꾸역 씹어서 끝까지 뱉어 내는 클로드의 싸늘한 발음에 발로란의 황제, 이오리아는 실바람 같은 숨으로 빙그레 웃었다.

‘화를 내고 있네.’

착하고 다정한 녀석이 돌아오자마자 제게 화를 내고 있었다. 뭐, 언제나 제게는 좀체 좋은 표정을 보여 준 적이 없는 녀석이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평소보다 그러한 점이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오리아가 고개를 끄덕여 그의 인사를 받았다.

“잘 지냈니?”

“못 지내진 않았습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몸만. 마음은 아니지만.”

“그럼 쉬지 그러셨습니까. 늦은 시간까지 호출하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누차 말씀드리지만 업무량을 적당히 조절하십시오.”

“궁금한 게 많아서 얼른 너에게 듣고 싶었어. 겸사겸사 얼굴도 서둘러서 보고.”

클로드를 일으켜 가까운 테이블 앞으로 앉혀 두고 황제는 얇은 은테로 이루어진 안경을 꺼내 썼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까맣고 긴 물결 머리에, 마찬가지로 새까만 속눈썹, 클로드가 가진 것보다 더 짙고 어두운 회색빛의 눈동자.

황제의 서늘한 외모는 은테두리의 안경이 더해져 더욱 지적이고 고독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피곤해서 그런지 까칠하구나. 하지만 네게 비난받은 게 억울해서라도 그냥은 못 돌려보내지. 일벌레 황제답게 일 얘기부터 할까.”

여러 장의 종이를 뒤적이며 그녀가 클로드를 보며 괜찮겠냐는 듯한 의미로 물었다. 종이들은 전부 그동안 클로드가 이자리스의 총독으로서 지속적으로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들이었다.

“마음대로 하시죠.”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던 이자리스 점령 건은 공주의 귀환으로 인해 완전히 물거품이 되었다.

다시 말해 황제의 초기 계획이 보기 좋게 실패했다는 이야기다. 클로드는 그 점이 찝찝했으나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네가 해 온 것들을 쭉 보았는데 그쪽에서의 행정 처리가 다소 소극적인 편이더구나.”

“유난스럽지 않게 자연스러운 질서를 잡고자 하는 주의니까요.”

“기사단의 힘이 이자리스 구석까지 미치지 않는 건 아니고?”

“물론. 절반의 지역까지는 닿지 않습니다.”

“절반이라면 구시가지를 말하는 거니?”

“이주해 온 제국민들과 이자리스의 토착 마법사들 사이에는 여전히 서로를 배척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생활권을 분리하지 않으면 제국민의 보호를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구시가지는 제 관할이 아닙니다.”

구시가지는 마법사들의 영역이며 더 나아가 이젠 완벽히 공주의 영향권 아래에 속해 버리게 된 지역이다. 클로드는 그 점을 에둘러 전했다. 자신은 그곳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듣기론 구시가지도 꽤 많이 재건된 것 같던데.”

황제가 콧날의 안경을 추켜올리며 피폐했던 초창기에 비해 몰라보게 달라진 구시가지의 지도를 언급했다.

“예, 많은 재건 작업이 있었습니다.”

태리가 돌아온 후부터 구시가지에서는 수십여 개가 넘는 재건 작업이 진행되어 왔다.

부서진 길을 새로 포장하고, 낙후한 하수도 시설을 재정비하고, 끊긴 다리를 복원했다. 떠난 사람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폐가를 수리했으며 곳곳에 등불을 달아 어두운 분위기와 치안을 개선했다.

모두 그가 아닌 그녀가 한 일이었다. 그녀는 숲으로 몬스터 사냥을 가는 날이 아니면 바쁘게 구시가지를 돌아다니며 피해 복구 상황을 확인하고 다녔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일일이 들어 가며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문제가 되는 것들이 있으면 직접 조사해서 해결하는 일도 부지기수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매일을 그렇게 열심히.

불쑥 밀려드는 안쓰러움에 클로드가 무심코 침묵에 잠겼을 때였다. 머리 위로 군더더기 없는 깨끗한 말씨가 떨어졌다.

“그래, 잘했다.”

잘했다? 클로드의 눈썹이 즉각 삐뚜름해졌다.

“저한테 하신 말씀이십니까?”

“앞으로도 잘하렴. 계속. 믿고 있으니까.”

계속?

이 짓을 계속하라고?

이자리스를 복속시키는 데에 그는 총독으로서 실패했다. 임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넌 됐으니 그만두라고, 안 시킬 줄 알았는데 계속 더 잘해 보라니. 하, 제발.

클로드가 항의하듯이 되받아쳤다.

“그만두고 싶습니다.”

“무엇을?”

“총독이요. 원하시는 만큼의 능력이 안 되는데 왜 자꾸 그 직책을 제게 맡기시려는 겁니까.”

원래도 싫었지만, 이젠 정말 더 하기 싫었다. 이 일만 끝나면 자유롭게 놓아주겠다던 황제의 약속이고 나발이고 간에 다 필요 없다. 그는 더는 이자리스와, 마법사들과 그리고 태리와 척을 지는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능력을 쓰고 싶지 않은 거 아니니? 네가 그곳에서 마음이 꽤 물렁해졌다는 건 나도 안다. 그런 걸로 나를 속일 순 없어. 모른 척해 달라는 말이라면 몰라도.”

“속인 적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겨지는걸. 아, 걱정 말렴. 속였든 속이지 않았든 어차피 나는 모른 척할 생각이었단다. 그러니 너는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시늉만 하면 되는 거야.”

“아니요.”

“아니다?”

“이젠 못 합니다.”

“클로드.”

“정말 못 하겠습니다, 저는.”

네가 기사단을 이끌어 주면, 전쟁만 나가 주면, 저 영토를 가져다주면, 이것만 해 주면, 저것만 해 주면…… 하면서 조건을 달아서 질질 끌어오던 황제는 어느 날 갑자기 그를 불러다 앉혀 두고 명령했다.

가서 이자리스를 지켜 내게로 가져오라고.

그것만 완수하면 그때는 너의 비밀에 대해 평생 침묵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유롭게 살도록 놔주겠다면서. 이것이 진짜 마지막 명령이라면서.

그런 이유로 클로드는 두말없이 이자리스로 떠났었다. 총독을 하라기에 그 역시도 받아들였고 시키는 대로 숲의 마수들로부터 그곳을 지켜 내 왔다.

처음 태리의 계약을 받아들인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순순히 땅을 양도받으면 손쉽게 황제에게 가져다주고 이 지긋지긋한 노예 생활을 끝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정말 더는 못 하겠습니다.”

이제 더는 못 하겠다. 하고 싶지가 않다. 의지도 자신도 없었다.

“다스리는 게 힘들다면 제국 사람들을 조금 더 데려가렴. 널 따라 그쪽으로 이주해 갈 귀족들은 언제나 많을 테니.”

“그 방법은 이미 실패했잖습니까!”

“어머.”

탁자를 한 손으로 내려치며 클로드는 정면에서 황제의 의견에 반박했다.

문화적인 흡수 정책. 그건 이오리아가 이자리스에 가장 먼저 시행하도록 지시한 첫 번째 정책이었다.

제국민들을 대량으로 그곳으로 이주시켜 제국의 문화를 느끼도록 해 주고, 그들이 그것에 압도당하게 하는 심리적인 방식을 꾀한 것이다.

힘으로 대륙을 통일한, 뼛속까지 제국주의스러운 정책이었지만 세상에는 뜻대로 되는 게 있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

문화적인 압도? 글쎄, 과연 마법사들도 그렇게 생각해 줄까?

클로드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강제적인 이주는 도움이 안 될 거라고 처음부터 간언을 드렸습니다.”

마법사들은 태리가 오기 전에도 지금처럼 폐허에 틀어박혀서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살아갔다.

그리하여 그들이 남긴 뛰어난 발명도, 기술도, 연구도 여전히 제국의 것이 아닌 이자리스의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대체 무슨 압도란 말인가.

“그 방법은 불필요한 반발만 일으킨다고 몇 번이나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지금도―”

“공주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

“그쪽에 시기적절하게 공주가 돌아왔지. 그 공주가 마른 장작에 불씨를 붙였다고 생각했는데, 난.”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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