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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어려운 관계네. 그녀가 먹던 것을 관두고 창가에 팔꿈치를 기대며 완전히 창밖으로 몸을 돌렸다.
혼쭐나느라 우울하게 쳐져 있던 클로드의 안색이 단번에 밝아졌다.
“있잖아요.”
“말씀하십시오.”
“그쪽 황제에 대해 물어봐도 돼요? 당신 고모 말이에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이런 복잡하고 어려운 관계를 만든 장본인.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녀는 클로드를 이자리스로 보낸 사람이었다. 지금은 또 자신을 불러들이고자 하고 있고.
그럼에도 태리가 그 인물에 대하여 쥐고 있는 정보는 극히 드물었다.
클로드의 고모라는 것과 대륙을 집어삼킨 철혈의 정복 군주라는 것. 또 조카의 약점을 쥐고 그를 본인의 영토 확장의 야욕에 선봉장으로 줄곧 세워 온 사람이라는 것 정도였다.
“어떤 사람이에요, 도대체?”
“그분은.”
어렵게 서두를 열고 꽤 길게 고민하던 클로드는 한참 후에야 뜻밖의 평가를 내놓았다.
“현명하고 공명정대한 군주입니다. 한 시대의 주인으로서 이름을 남길 만한 분이죠. 이자리스에는 물론 파렴치한으로 여겨지겠지만 적어도 발로란에 있어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 명의 인간으로 본다면 그냥 지독하고 냉정한 사람일 뿐입니다.”
황제로서의 평판은 높지만 인간으로서의 품평은 좋지 않다.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태리에게 클로드는 발로란의 황실 비화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전해 주었다. 지금의 황제가 보위에 오르기 전에 어떤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제겐 할아버지가 되시는 선황 폐하에겐 제 아버지와 고모님을 제외하고도 자식이 열셋이 더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모님께서 황제가 되기 전에 그 열셋을 모두 살해했죠.”
“……!”
자신의 위에 있던 열세 명의 형제를 처단한 막내 황녀. 그나마 피붙이라고 살려 둔 건 같은 배에서 태어난 오라비 하나뿐이었다.
“그나마 제 아버지를 살려 둔 건 어머니가 같은 동복 남매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아마 없을 겁니다.”
뭐랄까, 조선 시대 킬방원의 왕자의 난 같은 이야기였다. 태리는 괜히 으슬으슬해지는 팔뚝을 문질렀다.
“그분은 발로란의 역사상 가장 많은 지지와 사랑을 받은 황제로 기록될 테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반대파와 추문을 거느린 황제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중적이고 복잡하신 분이죠.”
자신도 무엇이라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다는 듯 클로드는 난감함을 담아 눈썹을 좁혔다. 그러더니 불현듯 노선을 분명히 하라는 안시의 말이 떠올랐는지 허겁지겁 덧붙였다.
“하지만 저는 싫어합니다, 그분. 취향도 안 맞고 성향도 다르고 불편하고 아주 귀찮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성가신 사람이고.”
“그런 말, 함부로 하면 큰일 날 것 같은데요. 들어 보니까 엄청 무서운 사람 같다고요.”
“무서워도 이미 여러 번 많이 했습니다. 앞에 가서도 벌써 수없이 했는데.”
“당신 목숨이 여러 개예요?”
“마음에 안 들면 자르면 될 거 아닙니까. 아니면 쫓아내든가.”
자신을 황제와 동류로 엮지 말라며 질색팔색하는 태도에 맞은편에서 안시가 볼을 실룩거리며 흐뭇해하는 것을 봤다.
못 살아. 눈치를 주는 태리의 귓가로 클로드의 마지막 말이 흘러들어 왔다.
“그런 분이 자꾸만 공주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게 저는 어쩐지 꺼림칙합니다. 조심하십시오.”
전과는 다른 염려와 걱정이 서린 당부였다.
* * *
달빛을 뚫고 달린 마차는 자정을 코앞에 두고 웅장하게 늘어선 성벽을 통과해서 들어왔다.
꾸벅꾸벅 졸던 태리는 색다른 풍경에 잠이 확 달아나 일어나 앉았다. 창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자 전혀 다른 도시의 밤공기가 피부를 휩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발로란의 수도이자 정의의 여신 아가사가 세상에 직접 강림했었던 곳이라는 지역. 희미한 달빛조차도 도시의 격과 위엄을 감추지 못한다.
석조 건물들은 모두 규격화되어 반듯반듯하고 정렬된 모양새였고, 교차로마다 팻말이 촘촘하게 세워져서 방향을 가리킨다. 거리의 너비는 이지라스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고 넓었으며, 공공건물로 보이는 듯한 장소에는 예외 없이 왼팔에는 천칭 저울을 오른손에는 칼을 든 여신의 동상이 이교도를 징벌하는 천사처럼 우뚝 서 있었다.
쓰레기 한 톨, 낙엽 한 닢 떨어져 있지 않은 청결한 길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리는 밖에서 억양이 다른 대륙 공통어가 들려오자 내밀었던 고개를 얼른 안으로 집어넣었다.
말을 멈춰 서게 하는 신호다. 굴러가던 마차의 바퀴가 그 자리에서 정지했다.
붉은 휘장을 감은 여러 명의 병사들이 등불을 치켜들며 클로드에게로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신성 기사단장님. 황궁 근위대입니다. 도착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모시러 왔습니다.”
“근위대 누구.”
“부대장 라칸입니다.”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소속을 밝힌 병사들의 얼굴을 맞이한 클로드는 그들의 생김새를 유심히 구별한 후에야 딱딱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의 거취를 안내하러 왔나.”
“예, 일찍부터 동쪽 별관으로 모시라는 폐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부터는 저희가 호위할 테니 마차를 넘겨주시지요.”
“뭐? 내가 왜.”
“예?”
“너희들을 뭘 믿고 넘겨.”
“저희는 폐하의 명을 받고……”
“뭘 믿고 넘기냐고.”
“아니, 저희는…….”
험상궂은 분위기로 인상을 쓰자 병사들은 지레 겁을 먹었다. 이자리스에서부터 함께 따라온 기사들은 그런 클로드가 익숙한 듯 ‘이 양반이 또 이러네’ 하는 표정으로 하나둘씩 나서서 그를 만류했다.
“단장, 이러다가 또 우리 근위대랑 싸움 납니다. 저놈들이 돌아가서 고자질 안 하겠습니까? 많이 당했으면서도 또 그러신다!”
“서로 소속이 다르면 싸움 좀 날 수도 있지. 왜, 쫄았냐?”
“아, 좀! 항상 단장이 먼저 시비 걸잖아요!”
“우리는 신성 기사단이다.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아.”
“하지만 저쪽은 황실 근위대입니다. 건드리면 뒤탈이 생기고요?”
“그리고 이건 시비가 아니다. 신뢰가 안 가서 그러는 거야.”
“신뢰를 줘 보세요. 황제 폐하의 직속 호위군인데.”
“그 황제 폐하를 못 믿어.”
“아이고, 근위대가 무슨 공주님을 납치하려는 것도 아니고요.”
“납치할 수도 있지. 그걸 어떻게 믿어, 내가!”
“예? 왜죠?”
“……그, 그야.”
엄청 예쁘니까!
말로는 못 하고 눈동자로 쏟아 낸 본심에 기사들이 하나같이 전부 다 어이가 없다면서, 그래 네 맘대로 하라면서 떨어져 나갔다.
절대 이 마차만은 넘겨주지 않겠다고 클로드가 엄포를 놓는 통에 근위대의 병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더욱 쩔쩔맨다.
결국 보다 못한 태리가 마차의 문을 열고 솔선수범하여 내렸다.
문고리가 돌아가고, 계단을 밟는 그 작은 소리를 어떻게 또 들은 건지 말 등에서 훌쩍 떨어진 클로드가 순식간에 다가와 땅을 디디려는 그녀를 만류했다.
“들어가 계십시오.”
“들어갈 거예요. 근데 이 말은 하려고요. 나 그냥 보내 줘요.”
“안 됩니다. 사자의 주둥이에 머리를 집어넣는 꼴이란 말입니다.”
“그럼 난 어디로 가요?”
명색이 초청받은 국빈인데 아무 곳에나 가서 신세를 질 순 없다. 태리는 내가 갈 곳이 있느냐, 하고 무심코 질문했다가 이어 나오는 남자의 쭈뼛쭈뼛한 대답에 소리 없는 웃음을 삼켰다.
“우리 집, 아니, 공작저……라고 내가 살던 곳이 있는데.”
우리 집이라고 말하려다가 허둥대며 정정하는 게 더 어설펐다.
“황궁은 겉만 화려하고 좋아 보이는 겁니다. 5백 년도 더 넘은 낡고 오래된 건물에다가 화재도 두 번씩이나 났던 거 모르죠? 공작저는 그보다 더 오래되긴 했지만 적어도 화재는 한 번도 난 적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당신 집에 가자는 거죠?”
“고, 공작, 공작저요.”
“당신이 자꾸 고집을 피우면 우린 오해받을 거예요.”
“오해가 무슨 대수라고.”
“나한테 그건 약점이 될지도 모르고요.”
“……그럼 궁까지 데려다주겠습니다.”
“그래도 오해 사지.”
난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이 턱 끝까지 치달았지만 클로드는 주먹을 꾹 쥐고 참았다. 여기서 헤어진다고 하니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애가 닳는데 그걸 풀어놓을 길이 아무 곳에도 없었다.
팔을 움켜쥔 손아귀에 강한 힘이 들어왔다.
“그럼 한 번만 오해 사 줘.”
“…….”
“낯선 곳에서 조심하려 한다는 거 알아. 먼 길 오느라 피곤하다는 것도 알고. 곤란한 상황에 엮이고 싶지 않은 것도 다 아는데…… 그냥…… 나 한 번만 봐줘. 데려다만 줄게. 앞까지 데려다주고 잘 자라는 말만 할 거라고.”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나온 조심스러운 고집에 태리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울렁거리는 듯한 느낌을 겪었다.
이 바보가 왜 자꾸 데려다준대. 놔두고 자기는 자기 갈 길 가야지.
처음 만났을 때도 이 물러 터지게 착한 주인공은 뭐야 했는데, 이제는 그 바보 때문에 가슴이 울렁거리는 지경에 다다랐다.
태리는 입술을 일자로 꼭 사리문 채 단 한 번 고개를 내젓고는 그를 두고 마차 안으로 다시 올라타 버렸다. 명백한 거절이었고 그로써 공주의 뜻은 황제의 안내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잠시 지체되었던 마차의 바퀴는 다시 고요한 밤길을 내달려 위엄이 넘치는 궁의 정문 너머로 사라졌다.
근위대의 손에 맡겨져 황제가 마련해 준 별궁까지 무사히 인도되는 동안 태리는 황궁 안의 모든 것들을 눈에 담았다.
이자리스와는 너무나도 다른 질서 있고 정갈한 모습의 그것들에게서 황제의 힘과 제국의 힘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리고 몹시 외로웠다.
* * *
태리가 떠나고 한동안 그 자리에 붙박여 남았던 클로드는 그 역시 예고 없이 떨어진 황명에 붙잡혀 직후에 곧바로 궁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장거리 여행으로 인해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신발임에도 복도에 깔린 사치스러운 융단을 뚜벅뚜벅 밟는 발걸음에는 전혀 서슴거림이 없다.
본래라면 앞에서 먼저 안내하며 가야 할 시종장은 클로드의 커다란 보폭에 뒤처져서, 긴 다리를 스치며 흔들리는 그의 푸른 망토를 힐끔힐끔 훔쳐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