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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앞마당에 이동 좌표가 찍힌 초대형 워프 마법진이 가동될 준비를 마쳤다.
그 주변을 뱅 둘러싸고 있는 것은 마차 한 대와 무리 지어 있는 성기사들. 신의 교단임을 뜻하는 깃발과 발로란의 국기를 함께 올려놓아 제국 수도로 가는 행렬임을 드러내고 있다.
왕묘 토벌이 성공적으로 완수되고 난 몇 주 뒤, 봄의 어느 날, 황제의 정식 초청장이 이자리스로 날아들었다.
조금 더 늦추거나 당기는 조율의 여지도 없이 정확한 날짜가 박힌 편지에는 공주의 귀환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이 기회에 이웃 나라로서 돈독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초대에 응해 달라는 그럴싸한 명목이 적혀 있었다.
마법사를 제국으로 불러들이는 것에 많은 제국의 신하들이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었음에도 편지에는 그러한 뉘앙스는 일언반구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의전 행렬의 책임자로 임명받은 것은 총독인 클로드.
공주의 호위 임무와 함께 황궁으로의 일시 복귀를 명령받은 그는 오늘 새벽녘부터 일찌감치 일어나 떠날 채비를 점검하고 또 점검하고 있는 중이었다.
끼익.
한참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가 불현듯 번잡스러워지는 호텔 입구 쪽으로 반갑게 시선을 들었다.
두꺼운 여행용 망토를 두른 공주가 자박자박 계단을 밟고 내려오고, 그 뒤로 육각형의 짐 가방을 몇 개씩이나 든 직원들이 줄지어 뒤따른다.
태리를 보자마자 당장에 다가가려 했던 클로드는 여러 사람이 주는 눈치에 행동을 저지당하고 대신 마차의 문을 열어 주는 것으로 넘치는 반가움을 드러냈다.
“타십시오.”
“웬 마차예요?”
“워프로 이동할 수 있는 위치가 이자리스와 발로란의 국경선까지라고 들었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편히 마차를 타고 움직이실 수 있도록 따로 준비했습니다.”
좀 더 친근하고 사적인 얘기들을 나누고 싶었지만 둘 사이를 경계하며 감시하는 눈총들이 보통 따가운 게 아니다.
이렇게 살기가 퍽퍽해서야. 클로드는 최대한 사무적인 어투를 구사하려 애썼다.
“그렇구나, 고마워요.”
하지만 감사를 표하는 태리의 작은 미소 조각에 얼굴 근육이 스르륵 풀어져서 표정이 흐트러지는 것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디딤대를 밟고 올라가는 태리의 등으로 시선이 정처 없이 쫓아가려는데, 돌연 칼칼한 인상의 여성이 사이로 끼어들며 그의 맹목적인 시야를 끊어 냈다.
“국경선 너머는 타국의 영토이니 워프의 좌표를 그곳으로 설정한 겁니다. 우리는 누구들과는 달리 허락 없이 남의 땅으로 들어가진 않거든요.”
“아…… 지배인도 같이 있었군.”
“예, 저도 있었습니다. 아까부터 쭉 있었지요. 총독께서 공주님만 바라보고 있어서 몰랐겠지만요.”
“그쪽이 함께 가는가.”
“예, 공주님은 제가 모십니다. 수행 인원을 더 늘리고 싶었지만 다수의 마법사들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 숲의 방어에 공백이 생긴다고 공주님께서 반대하셨습니다. 뭐, 저는 주의해야 할 대상이 꼭 숲에만 있다고 여기진 않았지만요.”
“그래도 다행이군.”
“무엇이 말이지요?”
“함께 가는 게 그쪽이라는 것. 자네는 강하잖나.”
흐음. 환술의 마녀 안시는 그 말의 진의를 꿰뚫듯이 클로드를 잠시 응시하더니 이내 싹 굳은 입가로 말했다.
“아첨을 하시는군요.”
“이게 무슨 아첨……. 나는 지금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 마차에 같이 타는 건 안 됩니다.”
“내가 언제 같이 탄다고 했지. 그런 건 생각만 했어, 생각만!”
“그러니까 그런 생각도 하지 마시란 말입니다.”
같이 타고 가고 싶어 죽겠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건 클로드 본인도 이미 잘 있고 있다. 그래서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하고 몰래 생각만 하고 티도 하나도 안 냈는데!
안시가 성큼 붙어 서선 낮아진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두 분 사이에 이상한 말들이 나도는 거 아시지요? 술에 취한 총독이 우리 호텔에서 나오는 걸 봤다는 소문도 있단 말입니다!”
“그건 소문이 아니고 사실이잖아.”
“조용히 하세요! 누구의 혼사를 방해하려고!”
방해하긴 누가 방해해. 그 혼사는 내가 해. 내가 다 한다고…….
우물거리는 잇새로 쏟아 내고 싶은 항변들이 차고 넘치게 많았지만 클로드는 억지로 꾹 삼켜 냈다.
대신 쌩하고 올라가려는 안시의 뒤꽁무니를 쭈뼛거리는 손으로 붙잡아 커다란 옷 가방을 조용히 내밀었다.
“뭔가요.”
“공주님께서 수도에서 착용하실 만한 옷과 장신구다. 예전에 차림새를 걱정하셨던 기억이 있어서. 필요하시다면 써도 된다.”
“그런 걸 이렇게 빨리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을 텐데요.”
“그냥, 어쩌다 보니 운이 좋아서.”
거짓말. 수도에 있는 형에게 편지를 몇 통씩이나 보내 구해 달라고 갖은 떼를 써서 받아 낸 것들이다. 하지만 절대로, 절대로 그런 말은 일절 꺼내지 않았다.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안시가 마차에 타고 떠나는 인원 모두가 거대한 마법진 위에 오르자, 대기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하나둘 워프진에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배웅을 위해 몰려든 이들이 바람개비처럼 마법봉을 흔든다.
심심한데 나도 따라갈까 보다 하고 알짱대는 이즈를 홱 밀쳐 낸 브리짓이 공주를 깍듯이 모시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허풍과도 같은 실제 무용담이 성기사들의 귀를 연신 따갑게 만들었다.
“만약에 거기서 내 친구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바로 전쟁이야. 나는 공동묘지에서 귀신도 때려잡은 위인이다 이 말이야. 비록 백 대쯤 얻어맞고 겨우 한 대 때렸지만 아, 때리기만 하면 내가 이긴 거 아니겠어?”
저놈의 극성맞은 왱알왱알.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해 주고 싶지만, 현재 공주가 끌려가는 곳이 발로란의 수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기에 기사들은 잠자코 브리짓의 쉼 없는 꾸중을 견뎌 냈다.
마법을 이단으로 취급하는 신의 나라.
그런 곳에 마법 왕국의 공주가 간다.
저들이 애지중지하며 어쩔 줄 모르는 소중한 파랑새가.
와글거리며 한시도 혀를 가만 놔두지 않았던 마법사들은 태리가 ‘모두들 배웅 와 줘서 고마워요. 자, 이제 모두 조용히.’라고 말하자 한순간에 온순한 양처럼 다들 얌전해졌다.
알 수 없는 선과 기호, 도형들로 가득 찼던 워프진에 마침내 마지막 빛이 들어오고, 공주를 태운 마차와 기사들이 증발하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국경을 넘으면 오래 걸릴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마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신속하게 앞길을 내달렸다.
어떻게 이렇게 좁고 외진 오솔길까지 판판한 도로로 포장해서 다져 놓은 건지, 수도로 통하는 모든 길은 마차의 폭과 바퀴의 규격에 맞춰 말끔히 닦여 있었다.
덕분에 말들은 피로를 거의 느끼지 못하고 힘껏 달렸고, 거기에 더해 지나가면서 마주친 작은 영지에조차 멈추지 않고 직행했으니 여정의 속도는 무척 빠른 편이었다.
태리는 마차 안에서 도시락을 열었다.
낮잠을 자는 안시를 가만히 살피다가 슬그머니 마차의 창문을 밀어 연다. 바깥 풍경 사이로 움직이는 말 등 위에서 말린 고기를 뜯는 기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를 찾듯, 그 사이를 두리번거리자 곧 경쾌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클로드가 창문 옆으로 붙어 섰다.
“길 위에서 식사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이대로 가면 달이 올라오는 시간쯤에는 도착할 수 있다고 했죠?”
“아마도. 자정을 넘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긴 여행으로 피곤하시겠지만 날이 밝을 때 입성하면 몰려드는 불편한 시선들을 모두 받으셔야 할 겁니다. 그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
“알아요. 난 피곤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황제의 손님이라곤 하나 반마도주의 국가에서 마법사의 출입을 반기지 않을 것이란 건 누구라도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마법에 얼마나 적대적인지 한때는 애먼 여성들을 마녀로 몰아 죽이기도 했었던 나라. 마법을 그런 곳에 갖다 붙여 사용할 만큼 발로란에서 마법이 가진 뜻은 어둠과 악마, 그릇되고 사악하며 잘못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눈에 덜 뜨일 수 있다면 다소 고되더라도 한밤중의 도착이 차라리 더 나은 이유였다.
피곤한 거야 쉬면 되는 거고 팡파르를 불며 환영해 주지 않는 거야 서운함 축에도 들지 못하니까.
오히려 난 되도록 관심 가져 주지 않았으면 좋겠는걸. 태리가 방울토마토를 왕창 입 안에 넣고 고개를 끄덕대며 우물거렸다.
클로드는 마차와 똑같은 속도로 말을 몰며 그녀의 옆모습을 조심스럽게 훔쳐보았다.
냠냠 씹을 때마다 부풀어 오르는 뺨이 복숭앗빛이다. 성실한 손놀림으로 도시락 속의 음식을 깨끗하게 비워 나가는 모습이 꼭 양 볼에 씨앗을 잔뜩 숨겨 넣는 다람쥐 같았다.
‘잔머리도 예쁘잖아…….’
귀 옆을 빠져나온 몇 가닥의 머리칼조차도 예뻐 보인다.
하지만 ‘잔머리가 참 예쁘네요.’라고 말하면 이상한 취급을 받을 게 분명하니 말고삐를 꾹 쥔 채 ‘머리가 많이 길었네요.’라는 말로 애써 돌려 이야기했다.
눈을 감고 잠든 척 상황을 주시하던 안시가 그 꼴을 보다 못해 눈꺼풀을 확 들어 올렸다.
“정말이지, 제가 따라오길 백 번 천 번 잘한 것 같군요.”
꼭 산적이 토끼 머리띠를 하고 디저트 가게에 가서 당근 케이크를 포장해 가는 장면을 본 기분이다. 무자비한 정복 황제의 오른팔 주제에 감히 공주님께 저런 내숭이라니.
“안시, 안 잤어?”
“잘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 이보세요, 총독님. 매정하게 굴든지 싹싹하게 빌든지 하나만 하시죠. 노선을 분명히 해야지, 흑백 전쟁에 회색분자는 아니 될 말이란 거 모르십니까?”
따끔한 지적에 움찔한 클로드가 당황해서 눈썹을 덮은 앞머리를 이마 위로 쓸어 넘겼다. 안시는 그걸 또 못마땅하게 쳐다보다가 한마디를 더했다.
“그 앞머리는 왜 자꾸 뻗치는 겁니까.”
“눈을 가리는 게 답답해서 내가 자꾸 만지다 보니까…….”
“으이그, 그럼 진작 정리했어야지요.”
“안 그래도 가면 자를 거다.”
“용모는 항상 단정하게 유지하세요.”
“알았다고.”
장래 희망이 백수인 현 제국의 영웅, 후 세계의 영웅. 그런데 이렇게 혼나고 있다. 태리는 소리를 죽여 몰래 웃었다.
왜냐하면 안시가 일부러 저런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니까. 정이 들까 봐 괜히 화를 내고, 틱틱거리면서 애쓰는 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