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놓쳤어.’
은신이 발동되기 전에 끊었어야 했는데. 초고속 연산이 가능한 대마법사의 능력은 총알보다도 더 빠르게 작용했다. 예상이 맞는다면 아마 관까지 도달하는 거리에 필요한 마나의 양까지도 정확하게 분배를 해 놓았을 것이다.
‘괜찮아. 지면서…… 이기는 전략을 쓰면 돼.’
우선은 투명인간처럼 은신해서 움직이고 있는 왕의 위치를 파악하는 게 급선무. 그녀는 근처의 커다란 횃불을 발로 밟아 꺼트려 일부러 실내에 뿌연 연기를 퍼트렸다.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탁해지긴 했으나, 지금 쫓기고 있는 사람은 제 쪽이 아니니 상관없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흰 연기 사이로 뭔가가 움직이는 듯한 이질적인 흐름이 확인되는 족족 그녀의 총이 불을 뿜어냈다.
도주의 흔적을 일직선으로 따라가며 세 번의 격발. 진행 경로를 추측해 먼저 바닥으로 쏘아 낸 공포탄과도 같은 두 발. 벽 쪽으로 크게 우회해 들어가며 측면으로 불시에 들이닥친 연발.
끊이지 않는 총소리가 심장을 달달 졸이게 만들 정도였다. 사방팔방에서 연속으로 꼬리를 물고 달려드는 총알에 놀란 건지 느릿하게 흐르던 연기의 흐름이 빨라졌다. 기겁한 왕이 속력을 내 뛰고 있다는 증거였다.
탄약이 발사될 때마다 터지는 열기와 가스가 눈앞을 더 뿌옇게 물들여 갔고 그럴수록 투명화 상태인 왕의 움직임은 점점 더 선명하고 또렷하게 분간된다.
근처의 석고상이나 장식물로 엇나갔었던 태리의 조준이 서서히 명중률을 올려 가기 시작했다.
온통 하얗게 변한 시야 속으로 탄환이 무섭게 연기를 헤치고 추격해 들어온다.
헉헉거리며 뛰는 왕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이성과 상식이 마비되는 듯한 혼란을 겪었다.
‘무슨 저런…… 저런 힘이 센 마법사가 다 있지?!’
어처구니가 없음을 넘어서서 이건 공포였다. 마법사 중의 마법사라 자부할 수 있는 이자리스의 소네티 왕족들은 사격은 고사하고 체술과 맨손 격투에조차 능한 이가 없었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쭉 그렇게 살아왔고 그게 정상적이며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고 의문을 제기할 것도 없이 마법사란 본래가 그런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성장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그런데 지금 공주가 보여 주는 움직임은 전혀 마법사의 그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훈련과 경험으로 길러 낸 단단한 신체와 지구력, 사냥꾼 못지않은 날쌘 발놀림과 기사를 흉내 내는 듯한 과감한 밀어붙이기. 거기에 숱한 연습을 거쳐 피부처럼 손에 익은 무기는 지팡이가 아니다.
힘에 능력치를 전부 몰아 넣은 것만 같은 마법사의 기운이었다. 하긴 1초에 네다섯 발씩 나가는 저런 살인적인 무기가 있는데 지팡이 같은 게 무슨 대수인가 싶기는 하다.
연기 때문에 은신이 무용지물이 되자, 그는 괜한 마나를 소모하는 대신에 그냥 은신술을 풀어 버렸다. 총알을 피하느라 허겁지겁 달렸더니 숨이 꼴깍꼴깍 넘어갈 것처럼 벅찼다. 고작 얼마나 뛰었다고.
“허억, 허억. 고, 공주…… 이래서 네게 지팡이가 없었구나.”
“지팡이가 없어도 마법을 부릴 줄 알아야 된다고 해서요. 처음부터 없이 싸우는 법을 연습했어요.”
“그렇, 허억, 지. 아주 잘했다. 지팡이에 의지하는 습관을 들여선 안 되지. 매우 훌륭, 헉헉, 하도다.”
숨이 벅찬 것과는 별개로 왕은 태리의 반듯한 대답에 가슴이 벅차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애초에 지팡이란 보다 정확한 마법의 구현을 위한 보조구이지 필수품이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그것에 의존해선 도구 없이는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발목에 늘 잡혀 왔었다.
어찌 내 나라에 이런 훌륭한 자손이 나왔단 말인가. 이것은 복이다. 이것이야말로 나라를 빛낼 참된 복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겐 썩 좋지 않은 우수함이로구나.’
은신을 이용해 편하고 안전하게 라이프 베슬을 회수해 가겠다는 계획에는 변수가 생겼다. 공주가 저런 유의 마법사일 줄은 몰랐으니까.
거기에다가 직전에 클로드를 상대했던 것과는 색깔이 완전히 달라서, 강하긴 했지만 그래도 정직하고 올곧았던 기사의 검과 달리 그녀의 공격에는 설명할 수 없는 교묘한 느낌이 있었다.
방금도 일부러 허수를 섞은 총격을 가해 그로 하여금 한 턴을 더 버티게 했다는 것을 안다. 아슬아슬하게 엇나간 몇 방들이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이었다는 소리였다. 그로 인해 그는 속임수까지 간파하며 이동해야만 하는 과제를 떠안았다.
‘끄응…….’
문제는 그의 몸 상태가 딱 한 번의 공격만 더 허용하면 픽 하고 쓰러질 수준까지 왔다는 것.
불사의 언데드라지만 다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침의 수준이 바닥까지 다다라 생명력이 제로가 되면 라이프 베슬 안으로 강제 복귀를 당해 오랫동안 회복하는 기간을 거쳐야만 되살아나게 되는 법칙이다.
‘뭐, 그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만.’
하지만 일이 그렇게 되면 초침은 공주의 손에 뺏길 수밖에 없었다. 무방비하게 잠든 몸을 뒤지는 건 식은 죽 먹기가 될 테니.
그는 최대한 지친 기색을 내며 엄살을 부리다가, 마음이 약해진 태리가 숨을 돌릴 짬을 내준 그 사이에 재빨리 에어커터(air-cutter) 마법을 날렸다.
“……!”
표창처럼 얇게 짓눌린 공기가 얼굴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태리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다. 긴 총열이 충격을 대신 받아 내면서 금속으로 된 샷건이 두 동강으로 반듯하게 잘려서 미끄러졌다.
성가시게 만들었던 무기를 제거해 버리면서 동시에 공주의 허점을 찌른 기습이었다.
‘후훗, 당황했겠지? 진작에 이렇게 할 것을!’
하지만 이게 웬걸. 당황하긴 개뿔.
그가 바로 다음 순간에 목격한 것은 손도끼를 뽑아 들고 투우사처럼 그에게로 달려오는 예쁘장한 공주였다.
절단된 총을 미련 없이 휙 내던진 그녀는 곧장 도끼를 빼어 들곤 그것을 양손으로 잡고 들이받을 것처럼 직선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어, 으아, 으어억!”
오는 경로에 거치적거리며 방해가 되는 골렘의 잔해들을 마구마구 거침없이 밟아 오르며, 그 힘과 탄력으로 관절 부분을 강타해 장애물을 없애 버리기도 하는 위협적인 모습.
깔끔하게 썰린 총의 단면과 달리 도끼에 의해 파괴된 부위들은 맹수가 송곳니를 박아 강제로 끊어 낸 힘줄처럼 거칠고 울퉁불퉁하며 살벌했다.
‘헉! 도, 도망쳐야 해!’
등줄기로 섬뜩함을 느낀 왕은 그 길로 냅다 뛰어 얼마 남지 않은 목적지를 향해 미친 듯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관 뚜껑 위에 반짝이는 크리스털이 보인다. 저것만 잡으면 끝이다. 그러면 된다. 목표 지점이 코앞이라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전력 질주라는 것을 해 보았다. 눈썹이 휘날린다는 게 무엇인지 살아서도 해 보지 못한 경험을 죽어서 해 보게 된 것이다.
“잡았다!”
크리스털의 감촉이 손바닥을 따끔하게 찌르고, 그와는 상반되게 발밑으로 푹신한 쿠션 같은 이물감이 동시다발적으로 파고들었다.
라이프 베슬을 되찾았다는 기쁨에 제자리에서 덩실덩실 움직이던 왕은 연속해서 푹푹 밟혀 들어가는 발아래를 서서히 이상하게 느끼다가 웬 퀴퀴한 냄새를 맡고 코를 킁킁 씰룩댔다.
“어디서 히드라의 침 냄새가…….”
늪지대의 강자인 히드라의 어금니에는 살상력이 강력한 독샘이 위치해 있다. 피부에 조금만 튀어도 삽시간에 스며들어 죽음으로 몰고 가는. 아주 지독하고 고약한 냄새가 특징인.
늪이라곤 있을 리 없는 지하 묘지에 어째서 그 냄새가 나는 건지, 왕은 천천히 턱을 내려 일그러진 눈으로 자신의 발밑을 확인했다.
“으어.”
양발이 모두 알록달록한 버섯 모양의 마도구 안에 파묻혀 있었다. 한두 개도 아니고 족히 일고여덟은 넘어 보이는데, 뛰어오면서 그것들의 절반을 이미 밟아 버린 상태였다.
누르면 터지는 간단한 원리인 모양이지만 그 안에 든 것이 간단하지가 않은 게, 이미 독기가 분출되어 무릎까지 타고 올라온 상황이다. 신경과 근육이 바스러지며 양다리가 후들거렸다.
세상 끝까지 쫓아올 것처럼 맹렬히 추격하던 공주는 그가 버섯을 밟는 것을 본 순간, 모든 투지를 내려놓곤 여유로운 속도로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
“아아, 이런.”
애초부터 이것을 노렸군.
추격이 아니라 몰이였나.
독의 정화를 시도하기엔 코어 안의 마나가 동이 났고, 고집 피워서 버티기엔 몸이 완전히 엉망진창이다. 서서히 몸속으로 잠식해 들어가는 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내가 당했군, 당했어.”
하체부터 점진적으로 육체가 바스러져 검은 연기로 되돌아간다. 어느새 코앞까지 도달한 태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도끼를 들고 몰아붙였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말했다.
“뺏어…… 아니, 받아 가요.”
영리한 수를 썼으면서도 미안해하는 눈치.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던 왕은 조용히 자그마한 머리통 위로 손을 뻗었다.
무서움에 태리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지만 커다란 손은 그저 톡톡 그녀의 정수리를 매만지듯이 두드렸다.
“공주의 의지는 충분히 증명되었다. 부디 이 땅을 잘 돌보아 다오.”
거대 공동을 울리는 묵직한 음성을 끝으로 검은 연기가 라이프 베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안에서 앞으로 그는 수백 년 동안의 긴 회복 기간을 거쳐야만 다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아무런 힘도,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한 채.
감사합니다, 부디 안녕히. 태리가 용기를 내어 입을 뗐을 때 왕의 모습은 얼굴의 형태만이 남아 흐릿해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너를 만나게 되어 자신이 무척이나 기뻤음을 마지막 미소로 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왕묘의 전 지역 돌파, 모든 언데드 전멸, 통로 완전 개방이라는 업적을 올린 언데드 토벌대는 그렇게 출정 사흘 만에 최종적으로 리치를 무찌르고 왕묘에 숨겨져 있던 지하 수로의 열쇠를 획득해 냈다.
수로를 개방하는 열쇠의 정체는 벽시계의 초침. 공주가 떨리는 손으로 비어 있는 나사에 그것을 끼워 넣자, 오랜 시간 멈춰 있던 시계가 풍차처럼 천천히 돌아가며 새로운 길을 열어 냈다. 그 너머에서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성기사들을 이끌고 가장 혁혁한 업적을 올리는 데 일조한 기사단장은 자신의 피가 묻은 흰 망토를 용맹한 사자왕의 석관 위에 올리고 무릎을 꿇은 뒤 한 손을 가슴에 얹었다. 그의 뒤로 기사들이 똑같이 자세로 수그리고, 왕의 안식을 비는 마법사들의 훌쩍거림이 잇달았다.
“…….”
태리는 그 앞에 가만히 서서 뭉클한 마음으로 물드는 감정을 몰아내려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