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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돌아와, 멍청아! 어서!”
몸 안에 있는 혈액에서 삼분의 일 이상의 피를 잃으면 인간은 죽는다. 이즈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살리려면 갖고 있는 약을 쏟아서 당장 치료부터 해 줘야 했다. 그럴 만한 시간을 저 빌어먹을 시체가 허용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대로 놔두면 그는 죽게 되어 있었다.
“후우…….”
하지만 클로드는 돌아가지 않고, 어질어질한 시야 너머로 왕과의 남은 거리를 눈대중으로 짐작했다.
달렸으면 고작 몇 발자국.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으면 수초 내로 돌파하겠지만 지금은 검을 들고 서 있는 것조차도 버겁다.
그럼에도 그가 전진을 택하며 한 발을 떼자 왕이 흠칫하고 놀라며 눈을 커다랗게 키웠다.
‘저걸 맞고 움직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아니, 뭐야. 이제야 신성력을 쓴다고……?!’
기사의 몸 전체에 희미하고 얇은 빛 테두리가 덧씌워져 있었다.
보나마나 신의 가호. 흑마법에 저항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어 수단이자 마력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힘이기에 단번에 구분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전투 내내 마검사처럼 굴던 녀석이 죽음에 임박해서야 성기사로서의 본분을 챙긴다니, 보는 이로선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자유롭게 다룰 수는 없는 상태인 건가? 그렇다면 더더욱 이상하군. 본인의 신성력을 제어도 못 하는 녀석이 신성 기사단의 단장이라니?’
대체 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마법사를 상대하는 이런 방식의 싸움은 어디에서 배워 왔는지도 당황스럽고.
어지러운 정신머리를 챙겨 모아 왕은 침착하게 마지막 회유를 시도했다.
“숨이 붙어 있을 때 그만 멈추지 그러나. 지금 돌아가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뒤늦게 발휘되긴 했으나, 스스로 조절도 안 되는 그런 어설픈 신성력으로는 리치의 흑마법을 견뎌 낼 수 없다. 목숨이 끊기는 시간을 조금 지연이나 해 주는 정도면 몰라도.
그러나 클로드는 그 연장된 시간을 뒤로 돌아가는 데에 쓰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소모했다.
찌익―
칼끝에 의지한 발이 땅에 끌리는 소리였다.
“미쳤군, 미쳤어.”
“…….”
호흡이 거칠다.
뒤에서는 이즈가 계속해서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고, 시야는 사물이 두세 개로 나뉘어 보일 정도로 흔들린다. 그러나 클로드는 도리어 지금의 자신에겐 앞으로 나아가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차피 저주받은 몸이고 기왕 흘린 피.
이 몸으로 살아서 되돌아가기란 이미 불가능하다.
손아귀에 힘을 실은 그가 다시 가슴 위까지 칼을 들어 올리자 질겁한 왕이 황급히 따돌렸던 말들을 불러들였다.
어설픈 회피는 버리고 최단 거리인 직선으로 나아가며 정면에서 충돌한다.
가로막으면 있는 힘을 다해 쓰러트리고 한 걸음. 다시 기력을 끌어모아 두 토막으로 가르듯 길게 썰어 버리고 또 다시 한 걸음. 최후의 최후까지 남아 있는 힘과 정신을 모조리 쏟아부었다.
한 걸음이라도 더, 여기서 한 발자국만 더.
“허…….”
사력을 다해 악착같이 걸어 기어코 자신의 앞까지 도착한 만신창이의 기사를 보고 왕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핏줄이 터진 눈동자는 태양처럼 붉었고 그에 반해 생기가 빠져나간 얼굴은 밀랍처럼 창백했다. 등에서부터 흘러내린 피의 족적은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 처참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것만 보아도 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는지를 짐작하겠는데 심지어 그 핏자국은 반듯하고 곧게 뻗어 있기까지 하다.
오는 동안 한 번이라도 정신을 놓았다면 죽었을 텐데 그는 벼랑 끝에 선 채로 살아 있었다. 살아서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곧 쓰러질 듯 간당간당해 보이는 적에게 그가 진심으로 감탄 어린 찬사를 보냈다.
“마법사도 아닌 자에게 이 정도의 감상을 느껴 보긴 처음이로군. 보통 지독한 게 아니었어. 마법사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 점이 참 아쉽군그래.”
“…….”
“누가 이리 싸우라고 가르친 건지 물어봐도 되겠나. 이건 기사의 방법이 아니야, 그렇지?”
누구로부터 싸우는 법을 배웠는가. 그 질문에 클로드는 자연스럽게 한 사람을 떠올려 냈다.
이제까지 그의 인생에는 수많은 스승들이 존재했었지만 지금의 그를 움직이게 하는 사람은 그녀가 분명했다.
“공주님께 훈련받았습니다.”
“누구라고?”
“목숨까지 걸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그게 사실이고 진실이었다. 그를 이만큼이나 성장시킨 건 그녀였다.
버겁고 불가능해 보이는 사냥을 도맡을 때마다 그녀는 끈질기게 옆에 붙어선 몇 번이고 지치는 법 없이 말했다.
넌 할 수 있고, 넌 모든 것을 다 가질 거고, 간절히 원하는 게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결국엔 다 이뤄 낼 거라고.
보이는 것과 달리 제 인생이 그리 대단하지 않음을 거듭해서 말했음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에게 강해지는 법에 대해 가르치고 또 가르쳤다.
― 무엇이든 결국 당신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거예요. 난 알아요, 그냥 알아요. 분명히 알아요. 그러니까 앞으로 얼마나 강한 적을 만난다고 해도 물러설 필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