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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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구원받지 못한 것들은 어둠이 부르는 자리로 끌려오라!”

건방진 도전자들에게 리치가 보여 준 다음 수는 언데드의 소환이었다. 아직 그만한 여력이 남아 있었다는 것에도 놀라웠지만 불러낸 정체는 그보다 더 경악스럽다.

바닥에서 젤리 같은 덩어리들이 뭉쳐서 올라오는 것 같더니 점차 자라나, 흑발갈퀴를 뽐내는 여러 필의 검은 말들이 되었다.

검은 말이라니. 술렁이며 긴장한 사람들은 형태를 인식한 즉시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렸다.

왕묘의 마지막 지하층까지 내려오는 동안 그들이 수없이 베어 넘겼던 데스나이트들이 타고 있었던 그것들. 주인을 잃은 바로 그 짐승들.

“내가 너희들의 텅 빈 가슴에 원한과 복수심을 일깨워 주마.”

왕은 슬픔에 잠긴 짐승들을 그대로 놔두지 않고 주인을 잃은 상실감을 자극해 현혹시켰다.

말들의 몸 테두리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흰자위가 보일 정도로 눈이 새하얗게 까뒤집히면서 콧김을 거칠게 내뿜고 흥분하기 시작한다.

자신들의 새 주인으로 삼기라도 한듯 왕의 앞을 첩첩이 가로막은 말들은 쇠로 된 말발굽으로 땅을 긁어 대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준비를 마쳤다.

서슬 퍼런 광경에 지켜보던 이들은 탄식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골렘과는 또 다른 종류의 장애물이었다.

“직선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너희는 절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라.”

모두가 절망스러워하는 가운데에서도 클로드는 냉담히 흐르는 구름처럼 남은 성기사들을 모아 말들이 일정 선 너머로 뚫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다 됐는가.”

“예.”

왕은 그가 지시를 끝마칠 때까지 신사적으로 기다려 주는 관용을 보인다. 그러나 클로드가 묵직한 긍정의 답을 올린 순간 더 이상의 기다림 없이 ‘격돌’을 의미하는 손가락을 정확하게 앞으로 뻗었다.

히이잉!

“멈추지 말고 뛰어!”

무작정 돌진하는 네발짐승에게 날아간 첫 공격은 여러 갈래로 퍼지는 이즈의 분산 사격. 엘프만이 가능한 기민한 발놀림으로 램프가 달린 벽등과 장식들을 밟고 뛰어오른 그가 여러 개의 화살을 난사했다.

주문받은 대로 목표물을 정해서 맞히려 하지 않고 공간을 통제하는 데 열중하자 말들이 화살 비를 피해 특정 지점으로 몰려들었다.

활로가 좁아진 만큼 클로드 역시 쉽게 그들의 먹잇감이 될 위험이 커졌지만 그것조차 이미 각오한 부분이다.

클로드는 자신을 찍어 내리기 위해 높이 치켜든 말의 앞발을 허리를 굽혀서 피해 냈다. 그러면서 숙인 자세 그대로 굴러서 빠져나가며 뒷다리의 두꺼운 연골을 갈라냈고, 곧장 몸을 돌려 또 다른 놈의 몸통 박치기를 헛수고로 만든 뒤 일어나서 연속으로 두 번을 내려치고 또 내려쳤다.

‘최대한 빠른 공속에 집중한다.’

미치광이가 된 말들 사이에서 압사당하지 않으려면 심장이 부셔질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자신의 검술에 담겨 있던 모든 복잡한 동작과 자세, 심지어 생각까지도 전부 빼기로 마음먹었다.

그저 눈으로 보고 칼을 휘두르는 것으로 행동의 과정을 최대한으로 간결하게 줄여 낸다.

여러 가지를 어설프게 하는 대신 단순한 한 가지를 정확하고 빠르게 여러 번을 해냈다. 같은 동작이 거듭되면 그 동작에는 당연히 가속도가 붙게 되어 있다. 그 결과, 베기 동작과 막기 동작 사이의 지연 시간이 맹렬한 기세로 줄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빨리 달려올 수 있는 거지?’

왕은 설핏 굳은 채로 새파랗게 질렸다. 이 정도로 끈질기게, 이 정도로 한계까지 끌어 올린 검의 속도가 사람의 손으로 가능하리라곤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다. 평소 기사란 족속을 괄시하던 마법사로서의 오만도 그 순간만큼은 고개를 숙였다.

압도적인 실력 차이도 아니고 비등한 수준의 적을 혼자 떼로 맞이하는데도 그는 똑같은 패턴의 연속 공격만으로도 무리의 일각을 돌풍처럼 일그러트리고 넘어섰다.

뛰어올라서 베고, 그 기세를 받아 또 베고, 다시 또 베기를 강공격으로 지속해 나간다.

말의 등줄기를 가르며 아래로 떨어진 그가 다시 앞으로 튀어 올랐을 때 속도는 전보다 더 빠르게 불어나 있었다.

‘이건 도무지…….’

마법사의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법은 아무리 애를 써도 준비 시간을 무한으로 줄일 수는 없다. 반면에 가속도를 받은 기사의 신속함은 그의 몸과 정신력이 받쳐 주는 한 끝없는 탄력을 받고 있었다.

그 돌파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냐면, 전진을 막기 위해 수십 개의 저항 마법을 던졌음에도 마법 캐스팅이 완료됐을 시점에는 클로드가 이미 그 표적 지점을 넘어선 경우가 허다했다는 것이다. 조금만 더 앞부분에 마법을 썼다면 맞았을 텐데 매번 간발의 차로 비껴 나갔다.

‘이런!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서 어디를 타격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된다. 거리가 지나치게 빠르게 좁혀지고 있어. 정신 나간 놈이 아주 작정을 했군.’

그나마 말들이 적당히 훼방을 놓아 주고 있어서 이만한 수준이지 그마저도 없었다면 일사천리로 뚫렸을 길이다.

어쩔 수 없는 차선책으로 왕은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유령마를 소환하는 데에 전력을 다했다.

그로 인해 말들로 이루어진 두 번째 장벽이 세워지고, 세 번째 장벽을 만들어 내는 데까지 성공했을 즈음이었다.

“바, 방금 총독이 뭘 한 거야?!”

장내에 때 아닌 놀라움과 탄성의 목소리가 불길처럼 치솟았다.

“성기사가 저런 기술을 쓸 수 있다고?”

“저거 마법사들이 걸어 줬던 추진력의 증가인지 뭔지 그거 아니야? 방금 완전 마법 같았다고!”

“단장……?”

눈을 감고 소모된 마나를 끌어모으고 있었던 왕은 소란스러운 말소리에 눈꺼풀이 번쩍 치켜 올라갔다.

힘을 주고 정면을 바라보니 거친 말발굽 사이를 회피하며 움직이던 클로드가 어느 순간부터인지 거의 제재를 받지 않고 그 틈을 관통하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다! 저건 단순한 관통이 아니다!’

경악스러운 구경꾼들의 말대로 그의 움직임은 확실히 달라졌다.

뭔가가 등을 밀어 주는 것처럼 갑자기 쑤욱 전진했다가, 조금 쉬고 또다시 힘을 채워 앞으로 쑤욱 한 번에 밀려 나오는 듯한 형상이다.

무엇을 보아도 더 이상은 놀라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그 광경 앞에선 속절없이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저런 건 마법이 아니야. 마법은 저런 식으로 구동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무슨 힘이란 말인가?’

모두가 마법 같다고 놀라워하는 그것은 소드 마스터들이 사용하는 일종의 무장해제 기술. 돌진을 이용해 상대의 공격을 무효화시키는 극비의 제압술이었다.

태리가 보았다면 해맑은 미소로 ‘우와, 벌써 공속 관련 패시브 스킬을 익혔네요! 아주 잘했어요!’라고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이라도 어떻게든 해 줬겠지만 불행히도 이 중에는 그녀만 한 지식을 가진 인재가 없었다.

클로드는 무의식중에 습득해서 본인이 하면서도 이걸 어떻게 해내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상태였고, 당사자가 모르는 걸 검술에 무지한 왕이 알 리 없었으며 오히려 마법사인 그의 입장으로서는 세계가 뒤집히는 것 같은 충격을 겪었을 뿐이다.

이전에도 여러 번 클로드의 노림수가 상당히 마검사스러운 부분이 있다고 느꼈었기에 결코 우연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이놈에게 싸우는 법을 가르쳤다.’

이런 방식은 대체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운 건가. 이런 공격이 통할 거라고 누가 그에게 확신을 심어 줬지?

틀림없이 그를 성장시킨 인물이 있을 것이다.

경종과도 같은 엘프의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두 번째도 무너졌다! 나머진 무시하고 그냥 가! 계속 달려! 남은 건 마지막 저지선뿐이다! 좌측을 노려!”

쯧. 저, 저 또 다른 성가신 녀석.

차분히 생각할 틈도 없다. 말 등을 밟고 뛰어다니며 쉼 없이 화살을 튕기는 엘프가 천리안과도 같은 시력으로 클로드에게 가야 할 방향을 계속해서 일러 주고 있었다.

“노움 이 자식들 뭐 하냐! 빨리빨리 운디네랑 손잡고 밑바닥을 진흙으로 만들어 버리라고! 엉?!”

깡패 같은 엘프의 소환질에 땅 정령과 물 정령이 합심해 영차영차 구호를 외치며 지면 위를 뽈뽈뽈 굴러다닌다. 같은 요정이라고 구박받으면서도 열심히 일하는 정령체들의 온순함에 험악한 말들의 발목은 속수무책으로 밑으로 푹푹 빠졌다.

“끄응. 좋지 않아, 정말로 좋지 않아.”

왕은 골치 아파지는 이마를 두드렸다.

거리가 너무 순식간에 좁혀지고 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놔두자니 따라잡히는 거야 시간문제일 테고, 무시무시한 광역마법을 쏟아부어 저지시키자니 왕묘가 훼손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냥 져 줄까 싶기도 했지만 왕실에 몇백 년 만에 태어난 귀한 공주인데 저런 날도둑놈에게 호락호락 허락해 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최후의 수단으로 써먹을 게 몇 가지 없는데. 에잉, 밖에서 만났으면 손쉽게 끝내 줬을 것을.”

무덤이 무너지면 안 된다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어떠한 상황이 와도 이곳만큼은 망가뜨릴 수 없다. 모두가 무사하고 ‘클로드’만이 망가지는 최적의 방안을 찾기 위해 몰두했던 왕의 눈이 찰나 무언가를 목격하고 갑자기 번쩍 뜨였다.

마지막 장벽을 넘어선 클로드가 바닥을 구르며 등에 옅은 상처를 입은 순간이었다.

왕의 목구멍에서 가장 리치다운 흑마법 주문이 쏜살같이 끌려 나왔다.

“암흑의 낙인!”

클로드의 한쪽 눈 밑에 붉은 갈퀴 문양이 섬뜩하게 그려졌다. 마치 해골의 손 같은.

“……!”

일어나자마자 또다시 전력 질주하려 했던 클로드는 불현듯 축축하게 젖어 가는 등을 느끼곤 처음으로 제자리에 멈춰 섰다.

유령마들의 억센 힘에 밀려 넘어졌을 때 등 쪽이 쓸려서 열상을 입었다. 하지만 심한 상처도 아니었고 통증도 참을 만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혈 향이 콧속을 찌를 정도로 그 부위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등을 덮은 순백의 망토가 붉게 물들어 발밑으로 피 웅덩이가 뚝뚝 고여 가는 게 보일 정도였다.

‘출혈이 멈추지 않는다.’

동시에 체온과 기력이 바닥까지 곤두박질치며 손발이 얼음장처럼 둔해진다. 생생했던 팔다리도 갑자기 물속에 잠긴 것처럼 가라앉았다. 지혈이 되지 않는 등을 억지로 감싸고 있자니 다급한 이즈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건 저주야, 언데드의 저주라고! 젠장, 당장 돌아와!”

흑마법으로 인한 과다 출혈의 저주. 부상을 완벽하게 치유하지 못하는 한 몸 상태를 계속해서 악화시키며 종내엔 다량의 혈액을 쏟아 내게 해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마법이었다.

상처가 없거나 다치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었겠지만 클로드는 등 부분을 제외하고도 오는 내내 수없이 많은 찰과상을 입은 상태였다. 한 번의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는 데에도 심각한 현기증이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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