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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공주를 풀어 주라니. 그게 뭔 해괴한 소리인지. 리치는 정신이 띵해졌다.
“누가 공주를 가뒀다고. 나는 이 험지로부터 우리 공주를 보호하고 있는 것이지!”
“가둔 겁니다.”
“내 입장에선 보호야!”
“제 입장에선 가둔 겁니다.”
점잖지만 팽팽한 말대꾸다. 왕이 버럭 성을 냈다.
“뭔가 큰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나는 우리 공주의 몇 대손 위의 선조로. 핏줄부터가 같은 편이니라. 천생부터 우린 가족이란 말이다. 그런데 어디 근본도 모르는 기사 따위가 가족 일에 참견이야! 내가 공주의 보호자다!”
“아니요, 공주님은 우리의 편이며 이 토벌대의 총사령관이고 지금은 제가 보호자입니다. 풀어 주시죠.”
“뭣이?”
고분고분 대답하던 놈의 눈빛이 다시금 맹수의 그것으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진액을 통째로 들이부은 것 같은 진심에 리치는 기가 막히면서도 동시에 어라? 하고 뇌리 속에 새로운 가정을 떠올렸다. 설마 하는 심정에 뒤편으로 제쳐 두고 한 번도 펼쳐 보지 않았던 상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놈의 전투력이 이렇게까지 급상승한 기점은 자신이 공주를 묶어 두었던 그 순간부터였었지.
그럼, 설마. 아니, 진짜로 설마.
격노한 왕의 삿대질이 클로드의 얼굴을 향해 버벅거렸다.
“너, 이놈! 너…… 너, 너 혹시!”
우리 공주를? 까지 뱉을 뻔했다가 뜨거운 것에 입술이라도 덴 사람처럼 얼른 다물었다. 사실이건 아니건 절대 소리로도 내고 싶지 않았다.
마법사 순수 혈통 집안에 감히 기사와도 같은 더러운 불순물이 섞인다니, 결코 안 될 노릇이다. 그 꼴을 자신이 어찌 본단 말인가.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 결합은 결사반대였다. 이미 흙에 덮인 지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건 정말로 안 된다.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녀석의 표정이 살짝 풀리면서 눈 밑이 발그레해지는 게 소리로 내지 않았어도 충분히 알아들은 것 같았다.
네가 감히 우리 공주를. 왕의 눈 코 입이 시집살이를 벼르는 혹독한 시어머니처럼 매서워지더니 원래 하려 했던 모든 말을 다 집어치우곤 단호한 한마디를 내뱉게 되었다.
“허락 못 해!”
“……!”
“절대 안 돼!”
작두로 무를 써는 호된 꾸지람이었다. 클로드는 물론이고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한 이즈마저도 덩달아 움찔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어째서 다들…… 왜…….”
겨우 쥐어짜 낸 목소리가 신음처럼 고통스럽게 들렸다.
“왜…… 안 됩니까.”
맞아도 맞아도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무쇠처럼 굴더니 허락 못 한다는 소리에 클로드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다가 안쓰럽게 접혔다. 입술 새로 흘러나온 한숨도 듣기에 아팠다.
“검밖에 모르는 아둔하고 멍청한 녀석에게 뭘 믿고 우리 귀한 공주를 준단 말이냐. 기사 놈이 커서 뭐가 될 수 있다고. 기사가 커 봤자 기사지!”
골수까지 마법사 우월주의로 뻣뻣하게 염색되어 있는 대마법사의 극한의 차별 발언이었다. 명예와 정의를 목숨으로 여기는 발로란의 기사로서 항의할 만도 했지만 클로드는 또 다시 처연하게 눈꺼풀이 잠겼다.
“저는…….”
커서 무엇이 될 것이냐. 제국의 젊은 영웅으로 추앙받는 그의 장래 희망은 조용하고 편안한 삶이었다. 아무도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고 영웅으로 살길 강요하지 않는 그런 평화로운 삶. 힘을 쓰지 않고 숨기고 살아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순박한 일상.
굳이 거기에 이름을 붙이자면 장기 백수인데…….
하지만 이름이 그럴 뿐이지 내용은 그리 불성실하지 않다. 그저 좋아하는 사람과 매일매일을 따뜻하게 보내고 싶은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저는.”
“저는 뭐!”
“……최선을 다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평생토록 깊이 아끼겠습니다.”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순수한 진심을 고르고 골라, 다듬고 다듬어 유리구슬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꺼내 놓는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것처럼 아련한 바람이 서려 있었고 그만큼이나 영문 모를 애틋함도 전해졌다.
“남들 다 하는 입에 발린 소리 아닌가. 고작 그런 걸로 어딜.”
그러나 결사반대파인 리치는 재고도 없이 곧바로 퇴짜를 놓았다. 마법사와 기사는 태생부터가 상극이기 때문이 이건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궁합이라고.
“…….”
풀이 죽은 클로드의 고개가 아래로 푹 수그러졌다.
‘저놈, 지금 상처를 받았어?’
그 모습이 세상에 어찌나 애달파 보이던지, 방금 전까지 그리 냉철하게 칼을 쑤셔 대던 녀석이 안 된다는 그의 한 마디에 곧 쓰러질 것 같은 꽃처럼 시들시들하게 흔들렸다.
때 아닌 양심통이 콕콕 쑤셔 와서 왕은 어이없음에 목이 막혔다.
‘이, 이건 진짜 내가 악당이 된 것 같은 느낌이잖은가. 분명히 맞는 말만 했는데 어째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지. 여긴 내 집이고 우리 공주야. 가만히 잘 자고 있던 날 쳐들어온 건 저 사악한 기사 놈이라고!’
놈이 한평생 자신에게 여자란 공주밖에 없는 것처럼 굴고 있었지만. 순간의 감정에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다해 스스로를 추스른다.
‘이 몸은 사자왕 준 발데마르 소네티다.’
자신은 이자리스 역사상 가장 위엄 넘치고 용맹했던 마법사 왕이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마음을 다잡은 그가 양팔을 날개처럼 펼치며 위엄 있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상대를 겁주기 위해 두 발로 일어나 몸집을 늘리는 레서판다 같았다.
“자,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어서 오거라! 힘껏 덤벼라! 누가 진정한 공주의 보호자인지를 이 자리에서 증명하겠노라! 나를 넘어선다면 네놈들이 그렇게나 가뒀다고 모함 중인 우리의 공주를 저곳에서 풀어 주지.”
팔 아래에서 여러 겹의 마법진들이 동시에 생성되었다. 모양과 수식이 모두 다른 별도의 마법들이다. 한 번에 하나씩 구현해 내기도 어려운 것을 한꺼번에 여러 개나 성공시켰다.
사이클을 무시하고 일을 벌인 탓에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것처럼 미세한 어지럼증이 돌았지만, 객기를 부릴 때는 이 정도쯤은 되어야 한다 여기고 밀어붙였다.
어떠냐. 이제 좀 내가 무서워 벌벌 떨겠지. 출사표를 던진 그는 당당한 자세로 기사와 궁수를 바라보았다.
‘으응?’
그런데 놈들은 이번에도 떨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쫄지도 않았고. 오히려 희망이라도 얻은 것처럼 기뻐하며 좋아한다. 얼굴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좋아해? 지금 살짝 웃었어……? 웃었다고? 이게 기쁜가? 제 놈들 죽을 자리를 마련했는데? 저거 순 미친놈들이 아닌가.’
활대를 손바닥에 탁탁 내려치며 은발의 엘프가 씨익 입가를 찢었다.
“진짜지? 시체, 너 분명히 약속했다.”
“시체라니!”
“공주님과 함께 마법사들도 같이 풀어 주시죠.”
“그래, 그거 받고 하나 더해.”
“뭘…… 그거 받고 하나 더인가! 이게 도박인 줄 아느냐!”
“쯧, 에이, 아쉽네. 안 넘어오잖아? 은근슬쩍 할 만했는데.”
“음.”
두 녀석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 눈빛을 교환했다. 그것만으로도 주고받는 대화가 훤히 읽히는 것 같았다.
‘받아들여야 하는 제안이다.’
‘나도 알아.’
‘후방을 맡아 줄 수 있나.’
‘어렵지 않지.’
이게 이렇게까지 해석이 잘 된다는 건 놈들이 본인들의 의욕을 전혀 숨기고 있지 않기 때문.
자신을 이기면 공주를 풀어 준다는 제안이 이렇게까지 자극적일 줄 몰랐던 왕은 당황해하며 그들과의 거리를 아예 멀찌감치 벌렸다. 방의 막다른 곳, 들어온 입구와 정반대, 시간이 멈춰진 벽시계가 있는 곳까지 물러나선 등을 딱 갖다 붙였다.
이전에 위험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애초에 유효 거리와 등을 내주지 않겠다는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와 같은 움직임을 지켜보며 클로드는 잠시 눈빛이 깊어졌다.
‘이 싸움이 이렇게까지 힘든 건 마법이 발동되는 간격이 너무 짧기 때문이다.’
왕의 마법은 처음부터 줄곧 쉼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전 마법과 다음 마법 사이의 지체 시간이 거의 없으니 허점을 파고들 수가 없고 따라서 버티는 것에만 주력을 다 할 수밖에 없었던 연유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지 끊이지 않고 쏟아지던 그의 마법들은 서서히 드문드문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그가 닥치는 대로 골렘을 부수며 압박하고 이즈가 후방으로 돌아 암살을 시도했을 때 그 점을 온전히 확신했다.
‘가깝게 다가갔을 때 가장 크게 반응했었던가.’
왕의 안정적인 밸런스가 처음으로 무너졌었던 순간이다. 계산이 꼬여 헛발질을 하게 된 사람처럼 그는 급하게 대응했고 줄곧 건재했었던 자세를 던지고 격렬한 호통마저 쳤었다.
비록 그 헛발질에도 그들의 공격은 막혔지만 그 지점에서 가장 큰 반응이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든 이쪽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태도 같았지…….’
왕이 벌린 간격은 곧 그가 다음 마법을 준비하는 시간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 거리를 극한까지 좁혀 보는 게 어떨지. 한 발을 앞으로 나선 클로드가 이즈의 어깨에 짤막히 손을 올렸다가 떼며 말했다.
“근접전으로 승부수를 띄워야겠다.”
“우리가 먼저 다가가자고?”
“그래, 그것도 최대한 가깝게 붙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전처럼 빠른 공격은 하지 못할 거다.”
“그래서 내가 해야 될 일은 뭔데.”
“맞추지 않아도 되니 화살로 왕이 응수할 수 있는 범위를 좁혀 봐. 아니면 흐름을 끊든지.”
“좁혀서 어떻게 하려고?”
“모든 공격이 내게 집중될 수 있도록.”
“……자폭이냐? 나야 기쁘지만 현명한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럴 리가. 너만 기쁜 일은 나도 하지 않아.”
말은 그렇게도 해도 이즈는 클로드가 어떤 전략을 세웠는지 대강 짐작한 눈치였다. 그걸 말로 표현하거나 어떠한 경우로도 안다는 티를 내지 않는 것은 그 부분조차 그들이 신중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상대가 아니니까.
“그걸 언제까지 하면 되는데.”
“내가 왕의 앞에 도달할 때까지.”
“너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어.”
“어차피 기회는 한 번만 있으면 된다.”
계획처럼 만만한 전략이 아니라는 것을 통렬히 꼬집었음에도 클로드는 아랑곳없이 검을 들고 출격할 준비를 했다.
“진짜로 죽어도 난 몰라. 난 분명히 구하러 안 간다고 했다.”
“뒤를 부탁한다.”
여러 방면으로 눈엣가시이긴 하지만 그래도 난 놈은 확실히 난 놈. 이즈는 그것만은 인정하겠다는 뜻으로 활을 들었다.
“……좋아, 지원한다.”
한 번이라도 넘어서면 왕은 공주를 풀어 준다고 약속했다. 그것만으로도 클로드는 덤벼들 의욕이 충만하다.
또한 그게 아니더라도 그는 이 순간을 뛰어넘고 싶었다.
모두가 듣기만 해도 눈에 불을 켜며 반대부터 하고 나서는 그 감정. 그가 바라게 된 사람과의 관계.
언제부터인가 그는 그것에 대한 자격을 얻고 싶어졌으니까.
사소하고 쓸모없는 귀퉁이라도 좋았다. 작은 가능성이라도 허락해 준다면 지금 이 순간 스스로를 던질 가치가 충분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