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화 (80/186)

80

모두를 살리기엔 조금 모자라지만 괜찮았다. 이걸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물약밖에 만들지 못하는 치료 마법사지만 태리의 말대로 이건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장갑을 벗은 그녀가 바닥에 있던 뾰족한 돌조각으로 손을 그어 피를 냈다. 선혈이 묻어 나오길 가만히 기다리더니 피가 맺히자 주저 없이 손가락을 통의 표면에 갖다 대고 신중히 글자를 써 넣는다.

침묵의 장막 효과로 말로 된 스펠은 뱉을 수 없었지만 글자로 된 주문은 새길 수 있었다.

그것에 심상찮음을 느끼고 몰려든 주변의 마법사들이 붉은 글자의 뜻을 알아보고 경악하기 시작했다.

“뭐 하는 짓이냐, 브리짓. 그만둬라!”

“이런 짓을 하면 빈사 상태가 될 거야! 여기선 아무도 널 제대로 돌봐 주지 못 한단 말이다!”

“어쩔 수 없어. 기사들을 살려야 되니까. 저대로 놔두면 쟤들은 다 죽어.”

“아무리 그래도 누가 이런 주문을 새기나!”

뱀의 혀와도 같은 글씨들이 모여 완성되는 글자는 마나번(mana-burn). 마법사의 몸속, 코어의 밑바닥에 잠재된 마나까지 모조리 불태워 발현하고자 하는 마법을 최대치로 증폭시키는 마법사의 폭주.

즉, 자기희생 주문이었다.

“내가 전부 다 회복시켜 버리겠어. 저놈들 남김없이 다 살려 버린다.”

그리고 마법사가 이렇게까지 하는 까닭은 다른 게 없다. 그 누구보다도 열렬하고 치열하게 살겠다는 결심을 했고 뒤는 돌아보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과거, 재앙이 몰아닥치던 숲의 한복판에 서서 그럼에도 무언가를 해내야만 했던 그 시절의 각오처럼.

“으으! 전부 다 살려 버린다!”

목소리와 눈빛은 광기에 차 있었지만 대사만큼은 무척이나 의롭다. 자폭할 모든 준비를 끝마친 브리짓이 다시 태리의 앞으로 다가왔다.

“브리, 난 이렇게까지 하란 뜻이 아니었어. 너 대체 뭘 하려는 거야.”

“힘을 보태려고 하는 거 아니야. 난 애매한 건 싫어.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제대로 해야 직성이 풀려. 불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면 여기서부터 있는 힘껏 달려서 최고로 멋지게 꼬라박고 오겠어.”

내일 없이 오늘만 사는 사람의 패기도 이보다 더 비장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유언을 남기는 듯한 말투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더니 그녀는 옴짝달싹 못 하는 태리의 옆구리 쪽 홀스터에서 총을 꺼내 갔다.

“네 거 빌려 간다.”

총을 가져가서 뭘 하려고? 그다음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어야 하는 질문은 이어지지 못했다. 돌진하는 작은 태풍처럼 소리를 지르고 전장의 한복판으로 질주한 브리짓의 행동이 결국 대답이 되었으니까.

“고자 목은 내가 딴다! 새치기하지 말고 이거나 먹어라!”

그녀가 이를 악물고 하늘 높이, 왕묘의 천장으로 물약이 가득 담긴 탱크 통을 던져 올렸다. 그리고 그것이 정점에 이른 순간 장전된 총을 두 손으로 잡고 힘껏 방아쇠를 당겼다.

펑!

쇠를 뚫는 총소리가 울리면서 하늘에서 물약이 분수처럼 사방으로 흩어져 퍼졌다.

* * *

쐐기 모양으로 내리쳐진 기사의 검이 거인의 정강이와 장딴지의 이음새 부분을 정확하게 찌르고 지나간다. 이어진 마무리 칼질에는 기어코 골렘의 허벅지를 박살을 내 놓았다.

‘저런 괴물 같은 놈.’

벌써 몇 개째 골렘을 부숴 놓은 건지 리치는 더 이상 수를 세는 것을 그만뒀다.

녀석의 주변이 골렘들의 잔해들로 인해 돌무더기를 이루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왕은 빠른 종결을 위해 마나를 펑펑 꺼내 쓰며 쉴 틈을 주지 않도록 더더욱 기세를 몰아붙였다.

여기서 자신을 막지 못하면 뒤에 있는 사람들이 다칠 테니 기사는 체력이 바닥이 나도 절대 물러설 수 없을 터였다. 부상자의 수는 이미 과반을 넘었고 마법사들을 그를 지원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쯤에서 끝을 내고 놈을 포획하면 깔끔한 그림.

분명 그런 그림인데…….

‘지나치게 잘 버티고 있지 않은가.’

아까부터 그게 좀 잘 안 되고 있었다.

“아니, 이게, 이런 게 아닌데.”

난감함에 왕은 머리를 긁적였다.

초반에 저 성기사라는 놈이 어째선지 신성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길래 그도 몸을 사리며 신중하게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쳤다.

죽음을 넘어온 언데드의 몸이었기에 신의 기적으로 피해를 입힌다면 그게 가장 골치가 아팠으니.

그런데 황당하게도 놈은 신성력을 한 방울도 쓰지 않았고, 순수한 검술만으로 저리 질리게도 버티더니 결국엔 상대하던 그까지 덩달아 기력을 빠지게 만들었다.

괜히 시간만 끌어서 공격 습성만 읽히고 마나만 소모하게 된 꼴이다.

지면을 쿵 하고 울리며 골렘의 다른 쪽 무릎마저 꿇리는 것을 보고 왕은 징그러운 표정이 되었다.

“적당히 좀 부숴라, 적당히! 그거 하나 만들 때마다 마나가 얼마나 쑥쑥 빠져나가는지 아느냐!”

무한 재생시킬 수 있는 게 골렘의 장점이라지만 그건 마법사의 마나가 허락하는 한에서다. 솔직히 이제는 슬슬 무리가 오고 있는 참이었다.

또 새로 만들까 말까 그가 고민하고 있는 사이, 녀석이 골렘을 완벽하게 처형하기 위해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어이쿠, 기어이 망가뜨리는구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목이 날아가는 것을 손 놓고 바라보는데 순간 녀석의 번뜩이는 시선과 마주쳤다. 여기까지 온 이상 더더욱 물불을 가리지 않겠다는 결연함이 서린 얼굴.

놈은 단순히 눈앞의 것을 노리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골렘의 머리통을 일섬에 베서 날려 버린 뒤 그 자세 그대로 앞으로 쏘아지듯이 튕겨져 왔다. 그로선 엄두도 내지 못할 엄청난 신체 능력이었다.

“이런……!”

체격 차이가 심하게 나기 때문에 마법사는 기사와 근접전을 하게 되면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왕은 재빨리 발밑의 땅을 내리쳐 대지의 균열을 내는 충격파를 퍼트렸다. 진동 때문에 녀석의 이동이 어려워진 틈을 타 손바닥을 날 모양으로 그어 공기로 응축된 부메랑을 그에게로 보낸다.

주춤했던 기사는 제자리에서 살짝 뛰어오르더니 공중에서 방어했다.

“그걸 또 막아?”

놈이 자꾸만 한계를 조금씩 뛰어넘으니 이젠 그도 슬슬 오기가 피어난다. 과연 어디까지 버티는지 지켜보고 싶은 충동도 생겨났다.

그리고 그런 기대에 부응하듯 방어를 하던 칼이 단숨에 안으로 접혀 검기를 방출한다. 푸른 오러가 급하게 세운 투명 실드의 표면을 강타하고 지나갔다. 마법과 검기가 부딪치며 지잉 하고 울리는 파동에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분명 다 지쳐 가는 것을 확인했는데. 어디서 나오는 지구력이지?’

고단한 몸에서부터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을 게 틀림없는데도 속도와 위력이 전혀 깎인 것 같지가 않다.

패배가 확실한 상황임에도 녀석이 굽히지 않고 덤벼드는 바람에 왕은 그로부터 자잘한 피해를 입었다. 불사가 아닌 몸이었다면 상당히 힘들었을 정도로.

다시 한번 단단하게 다져진 검기가 실드에 직격하고, 또 직격하고, 요동치고, 파사삭 금을 만들었다.

거기에 즉각적인 위협을 느낀 그는 싸움의 구도를 절대적인 방어 태세로 급히 전환했다.

‘정상적인 놈이 아니로군. 내가 너무 만만히 보았다.’

고작해야 허연 기사 하나를 상대로 대마법사의 꼴이 말이 아니다. 하지만 호기를 부리다가 역전을 당하는 것이야말로 망신살이 뻗치는 일이며, 대대손손 굴욕으로 기록될 터. 우선은 물러서기로 한다.

그가 전략적 후퇴를 선택하며 빠르게 뒷걸음을 쳤을 때였다.

바로 그 순간을 노렸다는 듯이 허벅지 옆으로 날카로운 흰 빛이 스쳐 지나갔다.

“……?!”

빠르게 움직이던 도중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적중했을 화살이었다. 운 좋게 아슬아슬하게 비껴 나갔지만 문제는 그것이 또 한 번 어딘가에서 자신을 노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

“누구냐! 대체 어디에서? 다가오는 기척 같은 건 전혀 느끼지 못했……”

“역습이다, 이 열받는 시체 자식아! 다음 화살은 씹히지 않도록 목구멍에다 꽂아 주마!”

거친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고 나서야 왕은 어째서 자신이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울퉁불퉁한 바윗덩어리를 밟고 뛰는데도 소리도 흔적도 없는 엘프 스텝. 바람 같은 몸을 이용해 주변의 아무 곳을 도움닫기로 삼아도 되는 탄력적인 도약력. 암살자처럼 단숨에 고지를 잡더니 그 높이에서 가속을 더한 화살 비를 무더기로 쏘아 낸다.

“이런 천하의 몹쓸 자식들을 보았나……!”

클로드 때문에 진이 빠져서 가뜩이나 기운도 없고 피곤한데 그 와중에 버르장머리 없는 엘프 놈의 암살 시도까지 차단해야 하고, 거기에 슬슬 장기전으로 예상되는 그림마저 감안해야 한다.

물론 호전적인 그의 성격상 수준 높은 용사들과의 만남은 즐겁긴 했다. 즐겁긴 한데 그래도 이런 식은 아니다. 놈들은 자신을 마치 악당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는 내 집을 지키는 것뿐인데. 가만히 잘 자고 있는 나를 깨운 저놈들이 잘못된 것 아닌가.’

몇백 년 만에 깨어나선 쉼 없이 몸을 움직인 탓에 너무나도 피로하다. 평소에 운동이라도 좀 해 둘걸. 숨을 헉헉거린 그가 분통을 터트리며 고함쳤다.

“너희들 왜 그러냐! 대체 왜 그래!”

마법사가 아닌 놈들은 원래 다 이런 식인가? 무모한 일에 제 몸 아끼질 않는 건가? 그러다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숨이 차서 못 살겠다!”

이게 이렇게까지 큰일이 될 줄이야. 곱게 물러서서 돌아가면 그도 더 괴롭히는 일 없이 모두를 고이 보내 줄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괜한 객기를 부리며 미적거리더라도 대마법사의 힘을 보여 주면 겁을 먹고 달아나겠지도 싶었고.

그런데 세상 천지에 어디 이런 독종들이 다 있었나.

공주를 안전히 보호한 뒤로 특히 저 기사 놈의 눈깔이 약간 돈 것처럼 회까닥 뒤집히더니, 골렘들을 있는 대로 다 망가뜨리며 전투 기계처럼 자신을 맹렬히 쫓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다간 체력전에서 밀려 자칫 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미래가 보일 정도로.

“헉헉, 내 평생 10분 이상 달리기도 한 적 없는 몸이거늘. 나를 이리 움직이게 해? 이런다고 내가 초침을 내어 줄 것 같으냐. 그건 안 돼! 엄연히 나라마다 왕실의 법도가 있고 규칙이 있거늘. 네놈들은 그런 기본적인 예의조차 모르는 것이냐?!”

“초침 때문에 그런 게 아닙니다.”

묵묵히 입을 다물고 검을 휘두르던 녀석이 칼끝을 아래로 떨어트리곤 제법 공손한 자세로 답했다.

“허, 그럼 이리 광인처럼 구는 이유가 무엇이냐. 여기서 다 같이 죽자는 게야? 그런 짓을 해도 난 이미 죽어서 네놈만 손해란 말이다. 이런 부족하고! 모자라고! 어리석은! 젊은이 같으니라고! 요즘 것들은 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나 때는 말이야……”

“공주님을 풀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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